[Atelier] 나비킴 김현정 ‘햇살 내리는’…빛을 받은 나비, 색의 입자로 풀리다
코발트 블루 위로 번지는 백색과 연보라의 날개 분채를 점처럼 겹쳐 스테인드글라스의 투과광을 좇은 2007년…‘날으는 빛’과 LED로 향한 색채 실험의 전환점
[KtN 박준식기자]커다란 나비 한 마리가 푸른 공간을 가득 채운다. 양쪽 날개는 흰빛에 가까운 옅은 색으로 열리고, 그 안쪽으로 청색과 보라색이 여러 겹 스며든다. 날개의 윤곽은 짙은 선으로 닫히지 않는다. 백색과 연한 황색의 테두리가 주변의 푸른색과 맞닿으면서 형상을 만들어낸다. 나비를 선으로 그렸다기보다 빛이 주변의 색을 밀어내며 날개의 형태를 드러낸 듯하다.
나비킴(Navikim·김현정) 작가의 2007년작 ‘햇살 내리는(Sunny Rainy)’는 나비를 그리는 방식보다 나비에 들어오는 빛을 색으로 바꾸는 방식에 무게가 실린 작품이다. 2006년 ‘첫 만남’의 나비가 검은 날개맥과 분명한 색면을 지닌 구체적인 생명체였다면, 1년 뒤 ‘햇살 내리는’에서는 선이 옅어지고 색의 미세한 입자가 형상을 대신한다.
작품 하단을 채운 짙은 청색은 깊은 바탕을 만들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청색의 농도가 옅어진다. 나비 날개 안에서도 같은 변화가 반복된다. 깊은 코발트 블루와 보랏빛이 남아 있는 부분 옆으로 백색에 가까운 밝은 색이 들어오면서 날개가 안쪽에서부터 환해진다.
밝음은 균일하지 않다. 날개 전체를 흰색으로 덮는 대신 작은 색의 흔적들이 겹쳐져 있다. 파랑과 보라, 회백색이 서로 인접하면서 조금씩 다른 밝기를 만들고, 장지의 바탕색까지 색 사이로 스며든다.
김현정 작가는 이 작품에서 유리를 통과한 맑고 투명한 빛의 색을 표현하기 위해 신인상주의의 분할주의(Divisionism)에 주목했다. 안료를 완전히 섞어 하나의 색을 만드는 대신 작은 색의 입자를 겹치고 병치해 관람자의 시각 안에서 밝음이 형성되도록 한 것이다.
이 방식은 ‘프라하의 창’에서 시작된 경험과 이어진다.
2005년 프라하에서 김현정 작가가 마주한 것은 색유리에 칠해진 색 자체가 아니라 색유리를 통과하면서 변하는 햇빛이었다. 투명한 물질을 지난 빛은 벽과 공간 위에서 다시 색을 만들었다. ‘햇살 내리는’은 그 경험을 아직 장지와 분채라는 전통적인 회화 재료 안에서 붙잡고 있던 시기의 작업이다.
나비의 날개를 구성하는 백색과 청색의 경계도 그래서 단단하게 닫히지 않는다. 빛이 유리를 통과할 때 경계에서 번지고 퍼지는 것처럼 밝은 부분이 주변의 색 안으로 스며든다. 날개 가장자리의 옅은 황백색은 하나의 굵은 윤곽선이라기보다 짙은 청색과 만나는 과정에서 생긴 밝은 띠에 가깝다.
상단의 두 날개는 넓게 벌어져 있지만 완벽한 좌우 대칭으로 정돈되지 않는다.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에 들어간 청색의 농도와 색의 흔적이 서로 다르고, 하단의 작은 날개에서도 색이 균일하게 반복되지 않는다. 같은 나비 안에서도 빛이 닿는 위치에 따라 색의 깊이가 달라지는 구조다.
바탕에는 꽃과 식물을 연상시키는 옅은 형상들이 나비 주변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첫 만남’처럼 나비와 꽃이 각각의 윤곽을 가진 채 분리되지는 않는다. 푸른색과 회백색 사이에서 형태가 희미해지면서 나비와 자연이 같은 빛의 층 안에 놓인다.
나비가 자연 속에 놓여 있다는 설명보다 빛을 받은 자연과 나비가 하나의 색채 공간 안에서 겹쳐진다는 쪽에 가깝다.
‘햇살 내리는’이라는 제목도 이 관계와 맞닿아 있다. 햇살은 고정된 물체가 아니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고, 사물에 닿으며, 표면에 따라 다른 색을 만들어낸다. 작품에서도 빛은 독립된 흰색 원이나 광선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나비의 날개와 바탕의 색이 달라지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빛을 따로 그리지 않고 빛 때문에 변한 색을 그린 것이다.
김현정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마주한 한계도 이후 작업의 방향을 크게 바꿨다. 분채를 점처럼 중첩하며 투명한 색을 만들었지만, 안료는 기본적으로 빛을 반사하는 물질이다. 색을 계속 섞고 겹치면 오히려 명도가 낮아지고, 스테인드글라스에서 경험했던 투명하고 발광하는 듯한 밝음과 거리가 생긴다. 김 작가는 이 문제를 계기로 실제 광원을 작품에 들여오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2009년 ‘날으는 빛(Flying Light)’ 연작에서 RGB LED가 등장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햇살 내리는’에서는 물감으로 빛을 닮은 색을 만들었다. ‘날으는 빛’에서는 빨강·초록·파랑의 실제 광원을 겹쳐 빛 자체가 색을 만들도록 했다. 2007년과 2009년 사이의 변화는 재료 하나가 추가된 정도가 아니라 색을 만드는 원리가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햇살 내리는’은 김현정 작가의 작업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분채와 장지 안에서 가능한 밝음을 끝까지 밀어본 작품이면서, 동시에 회화적 안료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빛의 영역을 확인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첫 만남’에서 나비의 날개는 검은 선과 색면으로 구성됐다. ‘햇살 내리는’에서는 그 선이 옅어지고 수많은 색의 입자가 날개를 만든다. ‘날으는 빛’에 이르면 안료 대신 실제 빛이 나비의 몸을 통과한다.
나비의 변화는 곧 김현정 작가가 빛에 접근하는 거리의 변화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빛을 바라봤고, 다음에는 빛을 색으로 옮겼다. ‘햇살 내리는’에서는 빛을 받은 색이 얼마나 투명해질 수 있는지를 밀어붙였고, 그 한계 끝에서 실제 광원을 선택하게 된다.
푸른 바탕 위에 펼쳐진 2007년의 나비는 아직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 대신 날개의 짙은 청색과 옅은 백색 사이에서 빛이 색을 변화시키는 순간을 품고 있다. 훗날 LED가 나비 안으로 들어가기 전, 김현정 작가는 먼저 분채의 작은 입자 하나하나로 빛이 스며드는 길을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