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사이트⑫] ‘Rashomon’, 네 개의 증언으로 하나의 진실을 흔든 1950년
구로사와 아키라·하시모토 시노부가 아쿠타가와 단편 두 편 결합…숲의 빛과 이동 촬영, 서로 어긋나는 증언으로 영화 서사의 범위 넓혀
[KtN 최유식기자]폭우가 무너져가는 성문을 때린다. 나무꾼과 승려는 비를 피해 라쇼몽 문 아래에 앉아 있다. 두 사람은 사흘 전 숲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리며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한다. 한 사무라이가 죽었고 아내는 성폭력을 당했다. 도적은 붙잡혔다.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은 법정에서 차례로 입을 열었지만 같은 사건을 설명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1950년 8월 26일 일본에서 공개된 구로사와 아키라(Akira Kurosawa)의 ‘Rashomon’은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추리극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도적 다조마루와 사무라이의 아내, 죽은 사무라이의 영혼, 사건을 목격한 나무꾼에게 같은 일을 다시 말하게 한 뒤 서로 다른 네 개의 이야기를 모두 영상으로 옮겼다. 어느 하나를 최종적인 사실로 확정하지 않은 채 88분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출발점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Ryūnosuke Akutagawa)가 쓴 두 편의 단편이었다. 1922년 발표한 ‘In a Grove’가 살인과 성폭력, 서로 충돌하는 증언의 구조를 제공했고, 1915년 발표한 ‘Rashomon’에서는 폐허가 된 성문과 인간의 도덕이 무너진 공간을 가져왔다. 각본은 구로사와와 하시모토 시노부(Shinobu Hashimoto)가 함께 썼다. 서로 다른 두 단편을 하나로 묶으면서 숲에서 벌어진 사건을 라쇼몽 문 아래에서 다시 듣는 액자 구조가 만들어졌다.
영화의 공간은 크게 세 곳으로 압축된다. 폭우가 쏟아지는 라쇼몽 문, 증언이 이어지는 재판 공간, 사건이 벌어진 숲이다.
라쇼몽 문에서는 사건을 둘러싼 대화가 이어진다. 재판 공간에서는 인물들이 자신이 기억하는 일을 말한다. 숲에서는 말로 전달된 기억이 실제 사건처럼 펼쳐진다. 현재와 증언, 기억이 계속 교차하면서 관객은 같은 장소와 같은 인물을 여러 번 다시 만나게 된다.
법정에는 판사의 모습이 없다.
다조마루와 아내, 무당의 몸을 빌려 증언하는 죽은 사무라이는 카메라 앞을 바라보며 말한다. 관객이 판사의 자리에 앉은 듯한 구도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판정해야 하지만 판정을 위한 객관적인 증거는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말을 마치면 영화는 곧바로 숲으로 이동해 증언을 눈앞의 사건처럼 재현한다.
문제는 네 개의 이야기가 모두 그럴듯하다는 데 있다.
미후네 도시로(Toshiro Mifune)가 연기한 다조마루의 증언에서는 자신이 사무라이와 당당하게 결투를 벌여 승리한 인물로 등장한다. 교 마치코(Machiko Kyō)가 맡은 아내의 이야기에서는 남편의 차가운 시선과 모멸감이 사건의 방향을 바꾼다. 모리 마사유키(Masayuki Mori)가 연기한 사무라이는 무당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한다. 마지막에 나무꾼이 내놓는 이야기는 앞선 세 사람의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인 설명과 달리 두 남자의 결투까지 서툴고 두려움에 찬 싸움으로 바꿔놓는다.
같은 인물의 성격도 증언자가 달라질 때마다 변한다.
다조마루가 자신을 설명할 때는 거침없는 검객이지만 나무꾼의 기억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허둥대는 남자다. 아내는 한 이야기에서는 무력한 피해자로, 다른 이야기에서는 남편과 다조마루의 행동을 자극하는 인물로 달라진다. 사무라이 역시 명예를 지킨 남자와 목숨을 구걸하는 남자 사이를 오간다.
구로사와는 대사만 바꾸지 않았다. 배우의 움직임과 카메라, 편집 속도까지 각 증언에 맞춰 달리했다.
관객에게 남는 것은 누가 사실을 말했느냐는 정답보다 사람이 자신을 설명할 때 기억과 욕망, 체면이 얼마나 깊게 개입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범죄 현장을 재구성하는 영화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까지 파고드는 구조로 확장된다.
나무꾼의 이야기마저 최종적인 사실로 확정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시신을 발견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뒤늦게 사건 전체를 목격했다고 털어놓는다. 더구나 사건 현장에 있었던 값비싼 단검이 사라진 이유가 드러나면서 나무꾼 역시 자신의 행동을 감추기 위해 일부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네 번째 이야기까지 들은 뒤에도 관객이 완전한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다.
‘Rashomon’의 서사 구조는 영화 밖에서도 하나의 개념으로 확장됐다. 서로 같은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와 기억에 따라 상충하는 설명을 내놓는 현상을 ‘라쇼몽 효과(Rashomon effect)’라고 부르는 표현이 학술 분야까지 자리 잡았다. 인류학자 칼 G. 하이더(Karl G. Heider)는 1988년 학술지 ‘American Anthropologist’에 ‘The Rashomon Effect: When Ethnographers Disagree’를 발표하며 서로 충돌하는 관찰과 증언을 분석하는 틀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서사의 실험만으로 영화의 변화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나무꾼이 숲으로 들어가는 초반부에서 카메라는 뒤와 앞, 옆을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나뭇잎과 가지 사이로 움직이는 인물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은 듯 방향을 바꾸고, 고개를 들어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직접 바라본다. 대사는 거의 없고 인물의 걸음과 카메라 이동, 음악과 숲의 소리가 긴 시퀀스를 끌고 간다.
촬영감독 미야가와 가즈오(Kazuo Miyagawa)는 카메라를 태양을 향해 직접 돌렸다. 당시 촬영에서 피하려 했던 강한 역광과 렌즈 플레어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숲의 짙은 그늘에서는 거울로 자연광을 반사해 배우의 얼굴과 나뭇잎 사이에 움직이는 빛을 만들었다.
숲은 밝지만 모든 것이 잘 보이는 공간이 아니다.
강한 햇빛이 나뭇잎을 통과하면서 얼굴과 땅 위에서 계속 흔들린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빠르게 교차하고 카메라는 일정한 방향을 유지하지 않는다. 사건이 벌어진 공간에서 시야가 선명해질수록 오히려 사실은 더 불분명해진다.
폭우가 쏟아지는 라쇼몽 문과 강렬한 햇빛이 내려오는 숲도 서로 대조된다. 문 아래에서는 세 사람이 인간을 믿을 수 있는지를 놓고 말을 이어가고, 숲에서는 빛과 그림자가 끊임없이 교차한다. 법정은 다시 거의 그림자 없이 밝은 공간으로 처리된다.
미야가와의 흑백 촬영은 서로 다른 세 공간을 조명만으로도 구분한다. 이후 미조구치 겐지와 오즈 야스지로, 이치카와 곤 등 일본 주요 감독들과 작업한 미야가와에게도 ‘Rashomon’은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린 촬영작이 됐다.
구로사와는 무성영화의 시각적 표현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무꾼이 숲을 걷는 대목처럼 대사 없이 이미지와 움직임만으로 진행되는 부분이 긴 이유다. 카메라 이동과 편집 자체로 공간과 심리를 만드는 방식은 영화 전체에서 반복된다. 스티븐 프린스(Stephen Prince)는 ‘Rashomon’의 촬영과 편집을 구로사와가 무성영화 시대의 시각적 힘을 다시 끌어오려 했던 작업으로 분석했다.
음악을 맡은 하야사카 후미오(Fumio Hayasaka)의 작업도 반복되는 이야기 구조와 맞물린다.
여인의 증언을 비롯한 부분에는 모리스 라벨의 ‘Boléro’를 연상시키는 리듬이 사용된다. 같은 리듬이 되풀이되면서 조금씩 강도가 달라지는 음악은 동일한 사건이 다른 형태로 반복되는 영화의 구조와 겹친다. 음악을 계속 채우기보다 침묵과 현장음을 길게 남기는 대목도 많다.
미후네 도시로의 신체 연기는 다조마루의 불안정한 성격을 더 크게 만든다.
다조마루는 바위 위에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몸을 긁고, 웃고, 뛰고, 갑자기 칼을 뽑는다. 구로사와는 배역을 준비하면서 미후네에게 사자의 움직임을 참고하도록 했다. 교 마치코에게는 다른 동물의 움직임에서 발견한 몸짓을 연기에 적용하도록 주문했다. 인물의 성격을 대사뿐 아니라 걷고 앉고 웃는 방식으로 구분하려는 연출이었다.
같은 배우가 증언마다 조금씩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런 신체 연기에서 나온다.
다조마루의 자랑스러운 기억 속 결투와 나무꾼이 봤다고 주장하는 결투는 같은 미후네와 모리가 연기하지만 전혀 다른 싸움처럼 보인다. 한쪽에서는 검객의 명예가 앞서고 다른 쪽에서는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몸을 지배한다.
구로사와가 바꾼 것은 아쿠타가와의 사건 배열에만 머물지 않았다.
‘In a Grove’는 서로 모순되는 증언을 제시한 뒤 명확한 답 없이 끝난다. 영화는 이후 라쇼몽 문으로 돌아가 버려진 아기를 등장시킨다. 행인은 아기의 옷까지 가져가려 하고, 나무꾼은 이를 막는다. 행인은 나무꾼이 사건 현장에서 단검을 훔쳤을 가능성을 들춰낸 뒤 떠난다.
나무꾼도 완전히 결백한 사람은 아니었던 셈이다.
승려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거의 잃는다. 나무꾼이 아기를 데려가겠다고 나서자 처음에는 경계한다. 나무꾼은 이미 여섯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한 명이 더 늘어도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승려는 아기를 건네고, 영화 내내 쏟아지던 비도 멈춘다.
진실을 밝히지 않은 영화가 마지막에 남기는 것은 사실의 해답이 아니라 행동이다.
누가 사무라이를 죽였는지, 네 사람 가운데 누구의 기억이 실제 사건과 가장 가까운지는 해결되지 않는다. 나무꾼 역시 거짓말을 했고 절도 의심까지 받는다. 그런 인물이 버려진 아이를 책임지겠다고 선택한다.
인간의 말은 믿기 어렵지만 모든 인간의 행동까지 같은 결론으로 묶지는 않는다. 아쿠타가와의 단편이 남긴 불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확실한 진실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할 가능성을 마지막에 남긴다.
1950년 일본에서 공개됐을 당시 국제적인 성공을 예상한 작품도 아니었다.
다이에이(Daiei)가 제작한 ‘Rashomon’은 일본에서 두드러진 흥행 성공작은 아니었지만 비평적으로 완전히 외면받은 작품도 아니었다. 영화잡지 ‘키네마 준포’의 그해 일본영화 평가에서는 5위에 올랐다. 일본에서 실패작으로 취급되다가 서구가 처음 발견했다는 식의 설명은 실제 흐름과 차이가 있다.
국제적인 전환은 이듬해 베니스에서 찾아왔다.
일본에서 영화를 본 이탈리아필름 관계자 줄리아나 스트라미졸리(Giuliana Stramigioli)가 베니스국제영화제 출품을 권했고, ‘Rashomon’은 1951년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일본영화가 국제 영화계에서 대규모 관심을 받기 시작한 계기로 이어졌다.
베니스 수상 뒤 미국 RKO가 북미 배급에 나섰고 1951년 12월 미국에서 공개됐다. 1952년 열린 제2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당시 정규 경쟁부문으로 외국어영화상이 만들어지기 전 특별상 형태의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Rashomon’의 국제적 성공 뒤 일본영화에 대한 서구 영화계의 관심도 넓어졌다. 미조구치 겐지(Kenji Mizoguchi), 오즈 야스지로(Yasujirō Ozu)를 비롯해 이미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감독들의 작품이 국제 영화제와 해외 배급망을 통해 더 넓게 소개되는 흐름이 이어졌다. ‘Rashomon’ 한 편이 일본영화를 처음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일본영화를 국제 영화문화의 주요 흐름으로 인식하게 만든 분기점 가운데 하나가 됐다.
서구 관객이 ‘Rashomon’을 받아들인 과정에도 한계는 있었다.
1951년 베니스에서 영화는 일본어 음성에 이탈리아어 자막으로 상영됐고, 당시 영어권 비평가 가운데 일부는 일본어는 물론 이탈리아어 자막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작품을 접했다. 줄거리와 문화적 배경보다 카메라 움직임과 빛, 편집 같은 시각적 요소가 먼저 주목받은 배경 가운데 하나였다.
역설적으로 언어의 장벽은 ‘Rashomon’의 시각적 설계를 더 강하게 부각했다.
나무꾼을 따라 숲 깊숙이 들어가는 카메라, 햇빛을 정면으로 받는 렌즈, 인물들이 관객을 바라보는 법정, 같은 사건을 다른 몸짓과 편집으로 되풀이하는 구성은 대사의 세부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 못해도 감지할 수 있었다.
‘Rashomon’ 이후 동일한 사건을 여러 인물의 관점에서 반복하는 구성은 영화와 TV에서 하나의 익숙한 서사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1964년에는 마틴 리트(Martin Ritt)가 ‘The Outrage’라는 미국 서부극으로 다시 만들었고, 서로 충돌하는 관점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식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반복됐다.
다만 이후의 많은 작품과 ‘Rashomon’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여러 관점을 차례로 제시한 뒤 마지막에 실제 진실을 공개하는 영화들도 많다. ‘Rashomon’은 그런 해답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마지막 증언을 한 사람까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을 남겨둔다. 관객에게 모든 정보를 준 뒤 정답을 찾게 하는 퍼즐이 아니라, 인간의 증언만으로 완전한 객관성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끝까지 흔드는 방식이다.
1950년 영화의 출발점에는 한 남자의 죽음과 한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 있다. 88분 뒤에도 사건 기록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 대신 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설명하고 싶은지가 남는다.
폭우 아래에서 인간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던 승려도 마지막에는 한 사람의 행동을 보고 다시 아기를 건넨다.
‘Rashomon’은 진실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진실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말과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할 수 있는지를 네 번의 이야기로 밀어붙인다. 구로사와가 마지막에 멈춘 곳은 다섯 번째 증언도, 범인을 밝히는 판결도 아니었다. 비가 그친 성문 밖으로 버려진 아이를 안고 걸어나가는 나무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