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뎀나의 구찌, 이제 필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기준’

SS27에서 매장으로 돌아온 구찌…수트·로퍼·홀스빗·드레스 사이에서 찾기 시작한 새 균형 뎀나의 과장과 구찌의 역사, 반복해서 입을 옷으로 연결될 때 다음 시대 열려

2026-10-28     임우경 기자

[KtN 임우경기자]밀라노 컨벤션센터 안에 들어선 구찌 매장은 뎀나(Demna)가 앞으로 만들어갈 구찌를 압축해 보여줬다. 검정 수트와 로퍼가 있었고, 흰 바지와 해링턴 재킷, 타탄 스커트와 퍼, 몸을 따라 떨어지는 드레스가 한 공간에 놓였다. 구찌 SS27 ‘The Store Show’는 화려한 매장을 하나 더 만든 쇼라기보다 뎀나가 구찌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꿀지 처음으로 넓게 펼쳐놓은 컬렉션에 가까웠다.

2026 FW에서는 고전 조각을 세운 전시 공간을 만들었고, Resort 2027에서는 뉴욕 타임스스퀘어를 무대로 삼았다. SS27이 택한 곳은 매장이었다. 박물관과 세계적인 상업도시를 거쳐 옷과 가방, 신발이 실제 고객을 만나는 장소로 돌아왔다.

[칼럼] 뎀나의 구찌, 이제 필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기준’. 사진=Alessandro Lucioni/Vogue Runway,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쇼 장소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SS27에서는 뎀나가 지금까지 가장 잘해온 방식과 구찌가 앞으로 필요로 하는 옷 사이의 거리가 눈에 띄게 좁아졌다.

뎀나는 패션에서 강한 이미지를 만드는 법을 아는 디자이너다. 몸보다 훨씬 큰 옷, 익숙한 비례를 무너뜨리는 실루엣, 평범한 물건을 낯설게 만드는 방법은 오랫동안 뎀나를 설명해왔다. 그런 능력은 패션쇼와 광고, 소셜미디어에서 강력하다. 한 컷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각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구찌에서는 다른 능력까지 필요하다.

구찌는 한 시즌의 이미지로만 움직이는 브랜드가 아니다. 수트와 로퍼, 가죽제품, 재킷, 셔츠, 니트, 드레스가 함께 팔린다. 1950년대의 홀스빗과 승마에서 출발한 여러 상징이 있고, 1970년대와 1980년대, 톰 포드(Tom Ford)가 만든 1990년대의 관능적인 구찌까지 서로 다른 시대의 기억이 겹쳐 있다.

뎀나가 구찌에서 성공하려면 자신의 미학으로 이 모든 역사를 덮어버리는 것보다, 구찌가 이미 가진 것을 지금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다시 정리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SS27 남성복에서 가능성이 먼저 나타났다.

재킷은 몸에 가까워졌고 팬츠는 로퍼를 덮지 않는 길이로 정리됐다. 흰 바지에는 해링턴 재킷과 퀼팅 재킷, 블레이저와 폴로셔츠가 붙었다. 거대한 어깨와 바닥까지 내려오는 바지로 새로운 실루엣을 만드는 대신 누구나 알고 있는 남성복의 크기와 길이를 조금씩 바꿨다.

[칼럼] 뎀나의 구찌, 이제 필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기준’. 사진=Alessandro Lucioni/Vogue Runway,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이 변화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럭셔리 브랜드에서 오래 남는 옷은 반드시 가장 새로워 보이는 옷과 같지 않다. 좋은 재킷은 다음 시즌에도 다시 입는다. 로퍼는 여러 벌의 팬츠와 함께 신는다. 블레이저와 니트, 가죽 재킷은 한 번의 패션쇼가 끝난 뒤에도 고객의 옷장에 남는다.

구찌 남성복이 앞으로 가져가야 할 힘도 여기에 있다. 매 시즌 새로운 남성상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구찌에 가면 사고 싶은 재킷, 바지, 로퍼가 있다는 인식을 쌓는 일이다. 시즌이 바뀌면 디자인이 완전히 사라지는 옷보다 조금씩 비례와 소재를 바꾸면서 계속 이어지는 옷이 필요하다.

구찌를 대표할 새로운 실루엣도 이런 축적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뎀나는 구찌에 필요한 것이 뚜렷한 실루엣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샤넬 재킷처럼 형태만으로 브랜드를 알아볼 수 있는 옷을 만들겠다는 뜻에 가깝다. SS27에서는 아직 하나의 답까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방향은 보이기 시작했다. 몸에 가까운 재킷, 짧아진 팬츠, 드러난 로퍼, 좁게 잡은 허리와 날카로운 어깨가 반복됐다.

홀스빗은 다른 고민을 보여준다.

로퍼에 있던 홀스빗을 벨트와 팬츠, 셔츠와 아우터로 옮겼다. 크기를 크게 키우기도 했고 여러 개를 겹쳐 사용하기도 했다. 누가 봐도 구찌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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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경계해야 할 부분도 여기 있다.

브랜드의 상징은 강할수록 좋은 것이 아니다. 홀스빗이 모든 옷의 중심에 놓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옷보다 장식이 먼저 보인다. 모노그램과 레드·그린 스트라이프까지 한꺼번에 강하게 사용하면 디자인보다 브랜드 표시가 앞설 수 있다.

구찌에 필요한 것은 상징의 양이 아니라 상징을 쓰는 정확성이다.

홀스빗 로퍼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도 금속 장식이 크기 때문이 아니다. 신발의 형태와 장식이 떨어져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나의 제품이 됐기 때문이다. 뎀나의 홀스빗 역시 같은 수준까지 가야 한다. 크게 만드는 것보다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만드는 편이 오래간다.

구찌의 과거를 얼마나 끌어올 것인지도 뎀나가 계속 마주할 문제다.

여성복에서는 1980~90년대의 흔적이 곳곳에 나타났다. 뾰족하게 올라간 어깨와 검정 재킷, 미디 스커트에는 당시 오피스웨어의 분위기가 남았고, 타탄과 굵은 체인, 부피가 큰 아우터에서는 훨씬 거친 옷차림이 섞였다. 드레스로 넘어가면 또 다른 구찌가 나타났다. 몸에 붙는 검정 드레스, 허리의 컷아웃, 비대칭 드레이프, 퍼플과 메탈릭 소재가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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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포드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있다고 해서 1990년대 구찌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톰 포드의 구찌가 성공했던 이유는 단순히 몸을 많이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 여성과 남성이 원하는 욕망을 새로운 옷과 이미지로 구체화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디자인을 반복한다면 향수가 될 뿐이다.

뎀나에게 필요한 것은 당시의 옷이 아니라 당시 구찌가 가졌던 태도에 가깝다. 입는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 좋은 재킷과 드레스 하나만으로도 구찌를 선택하게 만드는 힘이다.

SS27 여성복에는 가능성이 있다. 재킷은 어깨와 허리로 몸의 윤곽을 다시 만들고, 드레스는 피부와 옷감이 만나는 부분을 이용한다. 과거의 구찌를 그대로 복제하지 않으면서도 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뎀나가 앞으로 더 집중해야 할 것은 이런 차이를 구찌만의 방식으로 굳히는 일이다.

구찌 재킷의 어깨는 어느 정도 올라가야 하는가. 허리는 어디에서 잡혀야 하는가. 남성 팬츠는 어느 길이에서 끝나야 하는가. 홀스빗은 얼마나 보여야 하는가. 여성 드레스는 어느 정도의 노출과 드레이프를 가져야 하는가.

이런 선택이 몇 시즌 동안 반복될 때 하나의 브랜드가 만들어진다.

한 번의 패션쇼에서 모든 것을 보여주려 하면 반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 있다.

SS27에는 수트와 프레피, 가죽, 승마복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 타탄, 퍼, 비대칭 드레스까지 들어 있다. 폭은 넓지만 아직 어느 옷이 앞으로 뎀나의 구찌를 대표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뎀나가 다음 컬렉션에서 해야 할 일은 더 많은 것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 시즌에 꺼낸 것 가운데 오래 가져갈 것을 고르는 일이다.

구찌가 처한 사업 상황을 고려하면 선택은 더 중요해진다.

패션쇼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 것과 매출이 회복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고객이 다시 매장에 들어오고, 가방과 로퍼뿐 아니라 재킷과 바지, 니트와 드레스까지 사고 싶어져야 한다. 런웨이에서 화제가 된 한 벌보다 매장에서 여러 사람이 입어보고 선택하는 옷이 사업에는 더 오래 남는다.

그렇다고 구찌가 무난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안전한 검정 재킷과 잘 팔리는 로퍼만 늘어놓는 순간 뎀나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택한 이유도 약해진다. 반대로 모든 것을 크게 만들고 낯설게 만드는 순간 구찌와 뎀나의 이전 작업 사이의 차이가 흐려진다.

두 극단 사이에서 구찌다운 긴장을 만들어야 한다.

익숙한 수트에 예상하지 못한 비례가 들어가고, 오래된 홀스빗이 전혀 다른 위치에 놓이고, 단정한 재킷 옆에 과감한 드레스가 있어야 한다. 다만 모든 옷이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다. 조용한 옷과 강한 옷이 같은 매장에서 함께 팔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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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27의 ‘Store Show’가 앞으로도 기억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뎀나는 박물관과 타임스스퀘어를 지나 매장으로 왔다. 패션쇼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는 디자이너가 오히려 옷이 실제로 팔리는 장소를 무대로 골랐다. 구찌가 앞으로 필요한 변화와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뎀나의 구찌가 성공한다면 또 하나의 거대한 패션쇼를 만들었기 때문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구찌 매장에 들어가 재킷을 입어보고, 로퍼를 신고, 가방을 들어보고, 몇 년 입을 옷을 고르는 과정에서 새로운 구찌를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런웨이의 충격은 빠르게 소비된다. 좋은 옷은 옷장에 남는다.

뎀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매 시즌 세상을 놀라게 할 새로운 사건보다 구찌라면 이 정도는 지켜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드는 일이다. 재킷의 어깨와 팬츠의 길이, 홀스빗의 크기, 드레스가 몸을 감싸는 방법까지 몇 시즌 뒤에도 이어질 기준이 생긴다면 뎀나의 구찌는 비로소 한 사람의 강한 이미지에서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가진 브랜드로 넘어갈 수 있다.

SS27에서 매장을 런웨이로 만든 선택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구찌의 다음 시대는 패션쇼 무대보다 매장과 고객의 옷장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