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생 로랑 SS27, 금과 검정으로 읽는 하우스의 언어
사하리엔의 금속성 광택부터 검정 드레스의 긴 자락까지…색이 재단과 질감, 몸의 비율을 바꾼 방식
[KtN 박인경기자]파리 트로카데로에 금빛 사하리엔이 들어섰다. 큰 주머니와 벨트, 넓은 어깨를 갖춘 생 로랑(Saint Laurent)의 익숙한 옷이었다. 트렌치와 재킷, 레이스 드레스와 짧은 상의에도 금색이 이어졌다. 검정은 긴 금빛을 걷어낸 뒤 모습을 드러냈다. 안토니 바카렐로(Anthony Vaccarello)가 선보인 SS27은 많은 색을 섞지 않았다. 금과 검정이라는 제한된 팔레트 안에서 재단과 질감, 몸을 드러내는 범위를 달리하며 옷의 성격을 바꿨다.
금색을 화려함이나 부의 상징으로만 읽기에는 이번 컬렉션에서 맡은 역할이 더 복잡하다. 금은 옷을 장식하는 색이면서 동시에 표면을 드러내는 색이었다. 주름은 더 깊게 보였고 직조된 문양은 촘촘하게 살아났다. 몸에 붙는 직물에서는 굴곡을 따라 밝기가 달라졌고, 레이스에서는 금빛 사이로 피부가 들어왔다.
색을 좁히자 오히려 형태가 또렷해졌다. 새로운 색이 등장할 때마다 시선을 돌리는 대신 같은 금빛 안에서 재킷의 길이와 어깨 폭, 허리가 들어가는 위치, 스커트가 끝나는 선을 비교하게 된다. 생 로랑 SS27에서 색은 옷을 덮는 장식보다 옷을 읽게 하는 장치에 가까웠다.
사하리엔은 생 로랑의 역사에서 오래된 옷이다. 군복과 사파리웨어에서 가져온 큰 주머니와 벨트, 셔츠형 칼라는 실용복의 흔적을 남긴다. 바카렐로는 형태를 지우지 않고 표면을 바꿨다. 기능을 전제로 만들어진 옷에 금속성 광택을 입히면서 사하리엔이 가진 실용성과 금이라는 장식성이 한 벌 안에서 맞붙는다.
금빛은 구조를 감추지 않는다. 넓은 어깨는 빛을 받으며 더 크게 드러나고, 벨트가 조인 허리에는 깊은 음영이 생긴다. 구겨진 소재에서는 주름마다 밝기가 달라진다. 익숙한 사하리엔을 새로운 형태로 다시 그리기보다 오래된 형태를 전혀 다른 표면 위에 올려놓은 방식이다.
재킷과 스커트에서는 금보다 비율이 먼저 남는다. 어깨는 몸 밖으로 뻗고 허리는 안쪽으로 좁아진다. 펜슬 스커트와 가는 팬츠는 상체의 부피를 되풀이하지 않고 골반과 허벅지를 따라 내려간다. 넓은 어깨와 가는 하체라는 바카렐로의 생 로랑은 그대로지만, 재킷 길이가 달라질 때마다 같은 비율도 전혀 다른 인상을 만든다.
골반까지 내려오는 재킷에서는 어깨에서 허리까지 선이 천천히 좁아진다. 밑단이 올라가면 넓은 어깨와 허리의 차이가 짧은 거리 안에서 한꺼번에 나타난다. 형태의 변화보다 길이의 조정이 몸의 비율을 크게 바꾼다.
금빛의 깊이는 소재에서 갈렸다. 라메(lamé)는 넓은 면으로 빛을 되돌리고, 기퓌르 레이스(guipure lace)는 문양 사이로 피부를 드러낸다. 브로케이드(brocade)와 자카드(jacquard)는 직조의 높낮이마다 밝고 어두운 부분을 만들고, 오간자(organza)와 무슬린(mousseline)은 얇은 천이 겹치는 정도에 따라 색의 농도를 바꾼다. 금박을 입힌 라텍스에서는 매끄러운 광택과 몸의 움직임이 한꺼번에 나타난다.
금이라고 모두 같은 밝기로 빛나는 것은 아니었다. 넓은 아우터에서는 빛이 큰 면으로 번졌고, 레이스에서는 금빛과 피부가 섞였다. 촘촘한 직조에서는 문양이 먼저 떠올랐고, 얇은 천에서는 걸음에 따라 밝기가 달라졌다. 색 하나를 길게 사용하면서도 단조로움에 빠지지 않은 이유가 소재에 있다.
특히 피부가 개입하는 순간 금색의 성격은 크게 달라진다. 레이스에서는 문양 사이의 빈 곳으로 피부가 들어오고, 크롭 톱에서는 상의와 하의 사이의 복부가 넓게 드러난다. 금빛이 몸 전체를 덮는 것이 아니라 몸의 일부를 둘러싸며 경계를 만든다.
사하리엔에서는 벨트가 천을 안쪽으로 모아 허리를 만들었다. 짧은 상의에서는 허리를 감싸던 천 자체가 사라진다. 같은 허리를 강조하면서 하나는 옷으로 조이고 다른 하나는 비워둔다. 생 로랑 SS27의 금빛은 이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트로카데로의 조명까지 더해지면서 금은 옷 밖으로 퍼졌다. 모델 머리 위를 채운 샹들리에형 조명과 금색 의상이 비슷한 색조로 이어지고, 검은 바닥에는 옷과 불빛이 함께 비쳤다. 에펠탑을 앞에 둔 장소의 힘에 기대기보다 그 위에 또 하나의 금빛 환경을 만든 셈이다.
이런 연출에서는 개별 옷과 쇼 전체의 이미지가 서로 경쟁한다. 재킷의 주머니와 절개, 직조 문양을 가까이 들여다보기 전에 금빛 옷과 샹들리에, 검은 바닥이 한꺼번에 들어온다. 사진과 영상으로 남는 패션쇼에서는 옷 한 벌보다 브랜드가 만든 전체 인상이 먼저 소비될 가능성도 커진다.
생 로랑 SS27의 금색은 그래서 옷과 무대 사이에 걸쳐 있다. 재킷의 표면에서 시작한 빛이 샹들리에로 이어지고, 배경의 조명이 다시 옷에 들어온다. 금이 하나의 색이라기보다 컬렉션과 공간을 한데 묶는 공통된 톤으로 사용됐다.
검정이 등장하면서 이런 관계가 달라진다. 금색에서는 의상과 조명이 서로 스며들었다면 검은 천은 밝은 배경과 분리된다. 반짝임이 줄어든 자리에서 어깨와 허리, 슬릿과 긴 자락이 앞으로 나온다.
검정 드레스에는 천도 다시 많아진다. 상체를 넓게 감싸고 한쪽 다리를 깊게 드러내거나, 몸 주변으로 큰 주름을 만든 뒤 바닥까지 자락을 떨어뜨린다. 금색의 짧은 상의에서 밖으로 나왔던 몸은 검은 천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바카렐로의 거취설 때문에 검정을 작별의 색으로 읽으려는 해석도 나왔다. 바카렐로는 2016년 생 로랑을 맡았고 SS27 공개 시점에는 재임 10년을 넘겼다. 컬렉션을 전후해 퇴임 가능성을 거론하는 보도가 이어졌고, 쇼가 끝난 뒤 샤를로트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의 공연과 기립박수도 있었다. 다만 생 로랑과 케어링(Kering)은 바카렐로의 퇴임을 공식 발표하지 않았다.
검정 역시 생 로랑에서 새삼스러운 색이 아니다. 검정 수트와 드레스는 하우스의 오래된 복식 가운데 하나이고, 바카렐로의 재임 기간에도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SS27의 검정을 작별이라는 서사에 곧바로 묶기보다 금빛 뒤에서 옷을 어떻게 달리 보이게 했는지 살펴보는 편이 컬렉션에 더 가깝다.
금에서는 표면이 살아났다. 구겨진 주름과 촘촘한 직조, 레이스 사이의 피부와 금속성 광택이 끊임없이 시선을 움직였다. 검정에서는 재단과 부피가 남았다. 어깨의 크기, 허리의 위치, 깊은 슬릿과 길게 떨어지는 드레스 자락이 보다 또렷하게 읽혔다.
생 로랑의 금과 검정을 화려함과 어둠, 시작과 끝처럼 단순하게 나눌 필요는 없다. 이번 컬렉션에서 두 색은 서로 다른 부분을 앞으로 끌어냈다. 금은 소재와 몸의 굴곡을 드러냈고, 검정은 옷의 윤곽과 길이를 남겼다.
바카렐로가 생 로랑에서 보낸 10년 동안 넓은 어깨와 가는 하체, 검정 테일러링, 높은 힐과 드러난 피부는 여러 차례 되풀이됐다. SS27에서는 익숙한 요소들이 금이라는 강한 색 안에서 다시 만났다. 과거의 형태를 버리는 대신 소재와 길이, 피부를 드러내는 범위를 달리해 같은 옷을 새롭게 읽게 했다.
트로카데로의 금빛 조명이 꺼진 뒤에도 남는 것은 결국 재단과 몸이다. 사하리엔의 큰 주머니와 벨트, 넓은 어깨 아래 좁아진 허리, 레이스 사이로 보이는 피부, 크롭 톱 아래의 복부, 검정 드레스의 긴 자락이 서로 다른 색 속에서 모습을 바꿨다.
생 로랑 SS27에서 컬러는 옷을 장식하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 아니었다. 금은 표면과 몸을 가까이 끌어왔고, 검정은 불필요한 반짝임을 걷어내며 선을 남겼다. 두 색을 따라가면 생 로랑이 무엇을 입혔는지보다 무엇을 먼저 보게 했는지가 더 선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