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 120년①] 제도 밖 화가에서 프랑스 미술의 정전으로…세잔의 120년
1874년 혹평에서 2026년 그랑팔레까지…볼라르·컬렉터·미술관을 거치며 달라진 세잔의 자리
[KtN 임민정기자]1874년 파리에서 열린 첫 인상주의 전시에서 폴 세잔(Paul Cezanne)의 그림은 환영받지 못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세잔의 작품을 정신 이상과 연결하는 표현까지 동원했고, 인상주의를 지나치게 밀어붙였다고 공격했다. 같은 인상주의 진영에서도 세잔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0여 년이 지난 2026년, 파리 그랑팔레에는 세잔 작품 69점이 다시 모였다. 피카소와 마티스, 고갱, 몬드리안부터 데이비드 호크니와 피터 도이그까지 세잔의 영향을 받은 78명 작가의 작품 105점도 함께 걸렸다. 총 174점 규모의 'Cezanne et nous'는 한 화가의 생애를 따라가는 회고전이 아니라 1880년대 이후 세잔이 현대미술에 남긴 흔적을 140여 년에 걸쳐 되짚는 전시다.
1870년대의 세잔과 2026년 그랑팔레의 세잔 사이에는 작품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이 놓여 있다. 생전 프랑스 미술 제도의 중심부에 쉽게 들어가지 못했던 화가는 사후 화상과 컬렉터, 동료 작가와 미술관을 거치며 현대미술의 출발점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세잔의 생전 이력은 오늘날의 위상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입학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공식 살롱에서도 반복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프랑스 미술관들이 세잔 작품을 소장하기 시작한 시점도 늦었다. 반면 해외 컬렉터들은 프랑스 공공 미술관보다 먼저 세잔 작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관객에게 세잔의 그림은 지금처럼 미술관에서 익숙하게 마주하는 명화가 아니었다. 전통적인 원근법과 명암법에 기대지 않는 공간, 두텁게 쌓인 형태, 그대로 남은 붓질, 미완성처럼 보이는 부분은 19세기 후반 회화의 익숙한 질서에서 벗어나 있었다. 1870년대 관객에게는 평면적으로 느껴질 만큼 전통적인 깊이 표현과도 거리가 있었다.
오늘날 세잔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특징들이 당시에는 오히려 낯섦의 근거가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평가의 방향은 뒤집혔다. 다른 화가들은 세잔의 불안정한 공간과 형태에서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는 세잔의 평가가 달라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화상이었던 볼라르는 세잔 작품을 100점 이상 확보했고 1895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세잔이 190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개인전은 다섯 차례 더 이어졌다. 작품을 본 컬렉터가 늘었고 국제적인 수집망도 형성됐다.
미술관의 평가가 앞선 것은 아니었다. 작품을 전시한 화상과 작품을 구매한 컬렉터, 세잔의 회화를 직접 본 동료 작가들이 먼저 움직였다.
피카소(Pablo Picasso)는 세잔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첫 번째 위대한 스승으로 받아들였다. 세잔 작품 여섯 점을 소장했고, 구조와 공간, 형태를 다루는 방식은 피카소가 입체주의를 전개하는 과정과도 연결됐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역시 세잔을 높이 평가했다.
세잔의 위상은 작품 가격이나 소장 이력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한 세대의 화가들이 세잔을 다시 읽으면서 미술사 속 위치도 달라졌다. 생전에는 당대 회화와 어긋난다고 평가됐던 형식이 후대에는 현대회화가 출발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
생트빅투아르 산은 세잔의 반복적인 탐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소재 가운데 하나다. 고향 엑상프로방스 인근에 자리한 산을 80점이 넘는 작품에 담았다. 같은 산을 여러 차례 그리면서 형태와 색, 공간의 관계를 계속 달리했다.
후대 작가들도 생트빅투아르 산을 다시 그렸다. 마스던 하틀리(Marsden Hartley)는 1927년 산을 붉은 색조로 바꿔 그렸고, 자오우키(Zao Wou-Ki)는 2005년 세잔에게 헌정하는 작품을 남겼다. 한 지역의 풍경은 세잔을 거쳐 20세기와 21세기 미술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는 대상으로 확장됐다.
세잔의 제도적 위치가 크게 달라진 것은 사후였다. 1906년 세잔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그랑팔레에서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유럽 회화를 새롭게 전개할 세대의 작가들이 세잔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접했다.
그랑팔레와 세잔의 관계는 한 세기가 넘게 이어졌다. 1995년에도 파리의 주요 세잔전이 이곳에서 열렸다. 2026년에는 'Cezanne et nous'가 다시 같은 공간에 자리 잡았다.
1907년의 그랑팔레가 사후 세잔을 미술사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공간이었다면, 2026년의 그랑팔레는 이미 정전에 들어간 세잔을 78명의 후대 작가와 다시 연결한다.
세잔 사후 120년이 지난 2026년 전시는 프랑스 주요 미술기관의 협업으로 규모를 넓혔다. 오르세미술관(Musée d’Orsay), 오랑주리미술관(Musée de l’Orangerie),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가 소장품을 함께 내놓았다. 세 기관이 이 정도 규모로 컬렉션을 결합한 것은 처음이다. 네 명의 큐레이터가 약 3년에 걸쳐 전시를 준비했다.
세잔을 바라보는 방식도 1907년과 달라졌다. 한 명의 거장을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갱(Paul Gauguin), 마티스, 피카소,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조안 미첼(Joan Mitchell),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피터 도이그(Peter Doig) 등 서로 다른 시대의 작가를 함께 배치했다.
같은 세잔을 읽는 방법도 하나로 수렴하지 않는다. 고갱은 세잔의 낯선 성격을 상징주의와 연결했고, 브리짓 라일리(Bridget Riley)는 세잔의 구조를 옵아트로 확장했다. 도이그는 미완성처럼 남겨진 선과 어색한 형태에 관심을 보였다. 후대 작가들은 같은 세잔에게서 서로 다른 회화적 가능성을 가져갔다.
세잔이 생전에 만들지 못했던 제도적 중심은 사후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됐다. 화상과 컬렉터가 작품을 유통했고, 동료와 후대 화가들이 회화적 가치를 다시 읽었으며, 미술관과 대형 회고전이 미술사적 위치를 굳혔다.
2026년 그랑팔레에 모인 174점은 세잔의 명성이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낸다. 1874년 비평가들이 낯설다고 밀어냈던 회화는 1907년 대규모 회고전을 거쳤고, 1995년 다시 파리의 중심에 섰으며, 2026년에는 현대미술 140여 년을 연결하는 기준점 가운데 하나로 제시됐다.
'Cezanne et nous'는 2027년 1월 17일까지 그랑팔레에서 열린다. 1906년 세잔의 죽음 이후 약 120년 동안 달라진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평가의 구조였다. 제도 밖에 머물렀던 화가를 먼저 받아들인 화상과 컬렉터, 뒤이어 세잔에게서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발견한 작가들, 이후 작품을 정전으로 편입한 미술관의 시간이 지금의 세잔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