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브리짓 라일리 'Bali', 색은 어떻게 움직임이 되는가

1983년 수직 색띠만으로 구축한 시각의 리듬…형태를 지운 자리에서 색채와 간격이 만들어내는 움직임

2026-10-02     임민정 기자
브리짓 라일리(Bridget Riley) 'Bali'(1983). 세잔의 회화에서 구조와 시각적 관계를 받아들인 후대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Cezanne et nous'에 포함됐다. © Bridget Riley 2026. All rights reserved. Paris Musées, Musée d’Art Moderne, dist. GrandPalaisRmn/image ville de Paris

[KtN 임민정기자]브리짓 라일리(Bridget Riley)의 'Bali'(1983)에는 인물도 풍경도 없다. 캔버스를 채우는 것은 위에서 아래까지 이어지는 가느다란 수직 색띠다. 빨강과 주황, 노랑, 초록, 청록, 파랑을 비롯한 여러 색이 나란히 서 있지만, 작품 앞에서 먼저 감지되는 것은 개별 색의 이름보다 색과 색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움직임이다.

정지된 직선들이 반복될 뿐인데 작품은 좀처럼 정지해 있지 않는다. 어느 부분에서는 색띠가 앞으로 밀려나오는 듯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안쪽으로 물러난다. 강한 색이 이웃한 색과 부딪히며 밝기가 달라지고, 비슷한 계열의 색이 이어지는 곳에서는 경계가 느슨해진다. 캔버스에 실제 깊이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눈은 앞과 뒤, 가까움과 멂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Bali'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극도로 단순하다. 수직선과 색이다. 라일리는 복잡한 형상을 추가하는 대신 두 요소의 관계를 세밀하게 조정한다. 수직 색띠는 대체로 일정한 폭을 유지하지만 색의 배열은 하나의 짧은 패턴으로 단순 반복되지 않는다. 따뜻한 계열과 차가운 계열이 교차하고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이 번갈아 등장하면서 시선이 한곳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세로 방향의 직선은 본래 안정적이고 질서정연한 구조를 만들기 쉽다. 'Bali'에서는 오히려 안정된 구조가 색의 변화 때문에 흔들린다. 모든 선이 평행하게 내려오는데도 수평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면 색의 강도가 계속 바뀐다. 캔버스의 구조는 고정돼 있고 색의 관계가 움직인다.

작품을 가까이 볼 때와 조금 떨어져 볼 때의 인상도 다르다. 가까이에서는 개별 색띠의 경계와 색 자체가 먼저 들어온다. 거리를 두면 각각의 띠는 독립된 색에서 벗어나 주변 색과 묶이기 시작한다. 노랑 옆의 파랑과 주황 옆의 파랑은 같은 파랑이라도 다르게 느껴진다. 색은 고정된 속성보다 주변 관계에 의해 달라지는 감각으로 작동한다.

라일리의 추상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관계다. 한 색이 아름다운가보다 한 색이 옆의 색을 어떻게 바꾸는지가 중요하다. 작품을 구성하는 단위 하나하나는 단순하지만, 조합이 늘어날수록 시각적 결과는 복잡해진다. 색띠 하나를 따로 떼어놓으면 아무런 움직임도 없지만 수십 개가 나란히 놓이는 순간 리듬이 생긴다.

음악과 닮은 지점도 여기에서 나온다. 하나의 음보다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이 선율을 만들듯 'Bali'에서도 개별 색보다 색의 순서와 간격이 작품의 구조를 만든다. 특정 색이 다시 등장할 때는 이전과 다른 주변색을 만나고, 같은 계열의 색도 다른 조합 속에서 다른 강도로 느껴진다. 반복은 동일한 것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차이를 축적하는 방식에 가깝다.

색의 온도차는 작품의 움직임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주황과 노랑, 붉은 계열은 상대적으로 앞으로 다가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청록과 파랑은 뒤로 물러나는 듯한 감각을 만든다. 다만 이런 효과가 캔버스 전체에서 일률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색이 계속 교차하면서 전진과 후퇴의 감각도 빠르게 바뀐다.

그래서 'Bali'에는 하나의 고정된 중심이 없다. 전통적인 회화에서는 인물이나 사물, 특정 형태가 시선을 붙잡는 경우가 많지만 라일리는 그런 중심을 제거한다. 어느 부분도 다른 부분보다 절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시선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가운데와 가장자리로 이동하면서 작품 전체를 계속 탐색하게 된다.

캔버스 가장자리까지 이어지는 수직 색띠도 중요하다. 색은 내부에서 완결된 하나의 도형처럼 멈추지 않고 작품 바깥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실제 캔버스는 유한하지만 시각적 패턴은 경계 너머까지 연장될 가능성을 남긴다.

'Bali'에서 착시는 별도의 장식적 효과가 아니다. 눈이 색과 간격을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가 작품의 내용이 된다. 관람자는 완성된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읽는 대신 움직임을 직접 만들어낸다. 시선이 이동할 때마다 색의 관계가 달라지고, 작품도 조금씩 다른 상태로 경험된다.

라일리가 옵아트(Op Art)의 대표적인 작가로 분류되는 이유도 이런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아도 시각은 충분히 흔들릴 수 있고, 실제 움직이는 장치가 없어도 회화는 운동감을 만들 수 있다. 'Bali'는 기계적 움직임 대신 인간의 지각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세잔과 라일리의 관계를 함께 놓고 보면 'Bali'의 위치는 조금 더 흥미로워진다. 세잔이 자연을 원통과 구, 원뿔 같은 구조적 관계로 바라보며 회화의 공간을 다시 조직했다면 라일리는 구체적인 사물까지 걷어낸 뒤 색과 간격 자체를 구조로 삼았다. 세잔의 풍경과 라일리의 수직 색띠는 겉모습으로는 거의 닮지 않았지만, 눈앞의 대상을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회화 안에서 시각의 질서를 새롭게 조직한다는 점에서는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세잔에게 산과 사과, 인물은 회화를 구성하는 구조를 탐구하는 출발점이었다. 라일리에게는 수직선과 색이 같은 역할을 맡는다. 대상은 사라졌지만 관계는 남았다. 형태와 형태 사이의 긴장은 색과 색 사이의 긴장으로 옮겨간다.

1983년의 'Bali'가 지금도 강한 이유는 색채의 화려함에만 있지 않다. 단순한 수직선의 반복만으로 눈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적극적인 감각기관인지 드러낸다. 인간은 색을 하나씩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주변의 색과 비교하며 보고, 동일한 선도 전체 배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인다.

캔버스는 움직이지 않는다. 색띠도 변하지 않는다. 변화하는 것은 작품을 바라보는 눈이다. 'Bali'에서 회화의 운동은 물감 안에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색과 시선이 만나는 순간마다 새롭게 발생한다. 브리짓 라일리가 단순한 직선과 색만으로 만들어낸 것은 하나의 이미지라기보다 보는 행위 자체에 가까운 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