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폴 세잔 'Le Jardin des Lauves', 완성하지 않은 자리에서 회화가 시작된다

1906년 무렵 생애 말기에 그린 정원…비어 있는 캔버스와 끊어진 색면 사이에서 자연을 다시 조직한 세잔의 마지막 회화

2026-10-06     임민정 기자
폴 세잔 'Le Jardin des Lauves'(약 1906). 세잔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세잔 사망 이듬해인 1907년 파리 그랑팔레에서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 The Phillips Collection, Washington, D.C.

[KtN 임민정기자]폴 세잔(Paul Cezanne)의 'Le Jardin des Lauves'(약 1906)를 처음 마주하면 풍경보다 먼저 빈 곳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와 정원, 하늘을 이루는 색은 캔버스를 빈틈없이 덮지 않는다. 흰 바탕이 넓게 남아 있고 붓질은 중간에서 멈춘 듯 끊어진다. 짙은 남색과 보라, 초록, 황토색이 서로 맞닿으면서도 완전히 이어지지 않는다.

전통적인 풍경화라면 미완성으로 여길 만한 상태다. 세잔의 작품에서는 바로 그 비어 있는 부분이 회화의 구조를 만든다.

작품 위쪽에는 짙은 청색과 남색, 보라색이 뒤엉킨 나뭇가지와 잎의 덩어리가 놓여 있다. 나무의 윤곽을 세밀하게 그리지 않고 짧고 넓은 붓질을 겹쳐 무게를 만든다. 검푸른 색 사이에는 갈색과 녹색이 섞이고, 아래로 길게 늘어진 몇 개의 붓자국이 가지와 줄기의 방향을 암시한다.

반대편에는 옅은 보라색이 넓게 퍼진다. 구름인지 나뭇잎인지 명확한 경계는 사라지고 색의 덩어리만 남는다. 자연의 개별 사물을 하나씩 구별하기보다 서로 다른 색면이 부딪치고 떨어지는 관계로 풍경을 구성한 방식이다.

중앙에는 정원의 녹색이 집중된다. 밝은 초록과 짙은 녹색, 청록색, 황토색이 작은 단위로 반복된다. 나무 한 그루, 건물 한 채를 완성해 놓기보다 짧은 붓질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정원의 밀도를 만든다. 어느 부분은 형태가 분명해지고, 바로 옆에서는 다시 흰 캔버스 안으로 흩어진다.

세잔은 자연을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을 남겨놓을 것인가를 결정하면서 풍경을 만든다. 채색된 부분과 비어 있는 부분이 같은 비중으로 작동한다. 흰 여백은 색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붓질 사이에 빛을 끌어들이고, 서로 붙어 있을 색면들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작품 아래쪽의 녹색 띠는 특히 선명하다. 밝은 연두와 노랑, 초록이 넓고 짧은 붓질로 이어지며 정원의 바닥을 만든다. 위쪽의 짙은 남색과 보라가 무겁게 내려앉은 것과 달리 아래쪽은 밝고 가볍다. 어두운 상부와 밝은 하부가 서로 맞서면서 작품 전체의 균형을 잡는다.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짙은 수평선도 중요하다. 실제 정원의 담이나 구조물을 떠올릴 수 있지만 구체적인 사물을 설명하는 선이라기보다 위와 아래의 공간을 나누는 회화적 경계에 가깝다. 세잔은 풍경 속 요소를 묘사하면서 동시에 색과 선의 구조로 바꾼다.

원근법도 안정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가까운 정원과 멀리 있는 나무 사이에 명확한 깊이의 단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짙은 색은 앞으로 나오고 밝은 색은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흰 바탕이 그 관계를 끊어놓는다. 관람자의 눈은 한 번에 공간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색의 덩어리를 따라 이곳저곳을 이동한다.

세잔의 후기 회화에서 자연은 하나의 고정된 시점으로 정리되는 대상과 점점 멀어진다. 'Le Jardin des Lauves' 역시 정원을 한순간의 풍경으로 붙잡기보다 여러 번 바라본 흔적을 캔버스에 남긴 작품에 가깝다. 나무를 보고, 다시 하늘을 보고, 아래의 풀과 땅으로 시선을 옮긴 시간이 서로 다른 붓질로 축적된다.

그래서 작품은 완결된 이미지보다 관찰의 과정에 가까워진다.

세잔의 붓질은 사물의 표면을 매끄럽게 덮지 않는다. 각각의 터치가 자신이 놓인 자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짙은 남색 위에 보라가 올라가고, 초록 옆에 황토색이 놓이며, 그 사이로 캔버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물감이 무엇을 묘사하는가와 동시에 물감이 캔버스 위에 어떻게 놓였는가가 보인다.

이 지점에서 'Le Jardin des Lauves'는 풍경화이면서 추상회화의 문턱에 가까워진다. 나무와 정원이라는 대상은 남아 있지만 작품을 지탱하는 것은 색면의 크기와 방향, 붓질의 간격, 채워진 곳과 비어 있는 곳의 균형이다.

위쪽의 짙은 청색 덩어리만 보면 자연의 일부라기보다 거의 독립적인 추상 형태처럼 보인다. 중앙의 초록색과 청록색 역시 나무나 풀을 묘사하는 동시에 하나의 색채 구조를 만든다. 아래쪽의 밝은 녹색 띠도 실제 땅이면서 수평으로 길게 놓인 색면이다.

세잔은 자연을 버리지 않으면서 자연을 회화의 언어로 바꾸고 있었다.

1880년의 'Pommes et biscuits'에서 사과와 탁자의 원근을 흔들었다면, 생애 마지막 시기의 'Le Jardin des Lauves'에서는 사물의 경계 자체가 훨씬 더 느슨해진다. 사과는 여전히 둥근 형태를 유지했지만 후기 풍경의 나무와 정원은 색의 파편 속으로 흩어진다.

세잔이 오랫동안 탐구했던 문제도 여기에서 더욱 압축된다. 눈앞의 자연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으면서 자연과의 관계를 잃지 않는 것, 캔버스의 평면성을 숨기지 않으면서 깊이를 만드는 것, 색 자체를 형태와 공간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Le Jardin des Lauves'에서는 그 세 가지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흰 캔버스는 특히 후기 세잔을 이해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모든 공간을 채워야 그림이 완성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색이 필요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분한다. 빈 곳 때문에 붓질 하나하나의 방향이 더 또렷하게 드러나고, 색과 색 사이의 긴장도 커진다.

미완성처럼 보이는 부분을 단순히 작업이 끝나지 않은 흔적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다. 작품 안에서 여백은 이미 적극적으로 기능한다.

아래의 밝은 연두색은 흰 바탕과 만나면서 빛을 얻고, 위쪽의 보라와 남색은 비어 있는 면 옆에서 더 무거워진다. 색이 물감 자체의 농도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공백과의 관계 속에서 달라진다.

브리짓 라일리가 훗날 색과 색 사이의 관계를 회화의 주제로 밀어붙였다면, 세잔의 후기 풍경에서는 그보다 앞서 색이 사물의 종속물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초록은 나뭇잎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초록이라는 독립적인 색면으로 작동한다.

세잔의 후대 작가들이 같은 작품에서 서로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열린 구조에 있다. 입체주의는 공간의 분절을 읽었고, 추상회화는 색면의 구조를 가져갔으며, 이후의 화가들은 붓질과 미완성, 캔버스 바탕까지 하나의 회화적 언어로 받아들였다.

1906년 무렵의 'Le Jardin des Lauves'에는 거창한 서사가 없다. 정원과 나무, 하늘과 땅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세잔은 평범한 풍경을 완벽하게 묘사하는 대신 자연이 회화로 바뀌는 순간을 그대로 남겼다.

붓질은 멈추고, 색은 연결되다가 끊기며, 캔버스는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완성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졌던 과정이 작품의 일부가 된다.

세잔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나온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더 많은 것을 그리는 능력이 아니다. 무엇을 그리지 않고 남겨둘 것인가, 어디에서 붓질을 멈출 것인가, 색과 공백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둘 것인가가 회화의 구조를 결정한다.

'Le Jardin des Lauves'에서 자연은 완전히 재현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나무와 정원은 색과 붓질 사이에서 가까스로 모습을 유지한다.

세잔이 현대미술에 남긴 가장 깊은 변화도 그 사이에 있다. 회화는 세계를 빈틈없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며, 보이지 않는 부분과 완성되지 않은 부분까지도 그림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것. 'Le Jardin des Lauves'는 세잔이 생애 마지막에 도달한 회화를 완성된 형태보다 남겨진 여백으로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