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독일이 주목한 'K-학교폭력 예방모델'…BTF푸른나무재단, 유럽 연대로 '가해자 교육' 해법 찾는다
교황청립 신학학술원장 "아동·청소년 위한 국제연대 중요"…사이버폭력 예방사업에 관심 115년 역사 독일 헤르네 재단과 19년 교류, 내년 20주년…'스탑앤고' 가해자 교육·영상상담 '마테메오' 국내 도입 검토 학폭 피해응답률 6년 새 세 배…'장난이었다'는 가해 인식 바꿀 해법 될까
[KtN 임우경기자] 학교폭력 피해를 겪었다고 답한 학생은 6년 새 세 배로 늘었다. 그런데 가해했다고 답한 학생은 피해 학생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맞은 쪽은 폭력으로 기억하는데 때린 쪽은 장난으로 넘기는 것이다. 이 인식 차이를 줄일 해법을 찾아 한국의 청소년 NGO가 바티칸과 독일을 찾았다.
BTF푸른나무재단(상임대표 이종익, 설립자 김종기)은 지난 9월 6일부터 15일까지 바티칸과 독일에서 국제교류 활동을 펼쳤다고 2일 밝혔다. 재단은 이번 방문으로 청소년 폭력예방과 디지털·AI 안전 분야의 유럽 협력망을 넓혔다. 바티칸에서는 지난해 시작된 교황청립 신학학술원과의 협력을 한 단계 진전시켰다. 독일에서는 현지 학교폭력 예방 체계를 살피며 국내에 들여올 만한 사례를 찾았다.
바티칸 "인도주의적 국제연대"…아시아 NGO 첫 연사 이후 협력 심화
재단은 교황청립 신학학술원을 방문해 교황이 임명한 안토니오 스타글리아노 원장과 면담했다. 스타글리아노 원장은 "아동·청소년을 위한 인도주의적 관점의 국제연대가 중요하다"며 "BTF푸른나무재단과의 협력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계 유지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학술원 관계자들은 재단이 삼성 등 글로벌 기업과 함께 추진해 온 사이버폭력 예방사업 '사이버정글 가디언 푸른코끼리'의 성과에 관심을 보였다. 양측은 청소년 안전을 위해 학술교류 등 협력을 이어가기로 뜻을 모았다. 2020년 시작된 '푸른코끼리' 사업에는 지난해 9월 기준 누적 142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업은 2024년 학교폭력예방법 개정으로 사이버폭력 정의와 피해 지원 조항이 법에 담기는 데도 힘을 보탰다.
면담에는 이종익 상임대표와 함께 신학학술원 고등연구위원회 카를로 시메오네 사무국장이 자리했다. 1718년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세운 신학학술원은 교황청 산하 학술원 가운데 하나로, 신학 연구와 함께 교황청 자문 역할을 맡고 있다.
재단과의 인연은 지난해 시작됐다. 재단은 신학학술원 국제세미나에 아시아 지역 청소년 NGO로는 처음 연사로 초청받았다. 올해 초에는 김종기 설립자가 학술원이 새로 만든 고등연구위원회의 초대 위원으로 위촉됐다. 고등연구위원회는 사회 발전, 과학 연구의 윤리 문제, 문화 변화 같은 세계적 의제를 논의하는 기구다. 종교와 관계없이 공공선에 헌신해 온 인사들로 위원을 구성한다. 학교폭력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세운 단체가 30여 년 만에 세계 가톨릭 신학계의 대화 상대가 된 것이다.
19년 이어온 독일 헤르네와의 우정…"가해자를 바꿔야 폭력이 멈춘다"
이번 방문에서 실무적으로 더 의미 있는 성과는 독일에서 나왔다. 재단은 독일 헤르네앤반네아이켈 청소년복지재단(헤르네 재단)을 찾아 그간의 협력 성과를 점검하고 앞으로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두 기관은 19년째 교류를 이어오고 있으며, 내년에는 민간 공익단체 정기교류 20주년을 맞는다.
헤르네 재단은 1911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헤르네시에서 문을 연 아동·청소년 복지 전문 기관이다. 올해로 115년째를 맞았다. 직원 약 1,000명이 일하고 있으며, 독일 아동청소년복지지원법과 소년법 등을 근거로 아동과 청소년, 가족을 위한 상담·보호·교육·치료 서비스를 입소형과 방문형으로 제공하고 있다.
헤르네 재단 얀 숄리 대표는 "지난 19년간 교류 동안 청소년 폭력예방과 디지털·AI 안전 분야에서 다양한 선진사례를 축적한 BTF푸른나무재단과 앞으로 더욱 깊이 협력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재단은 가브리엘레 쉬빌 헤르네시 부시장, 파흐풀 교육원 폴커 라인 대표, 도르트문트 공과대학교 사회교육학과 교수진도 만났다. 현장 기관과 행정, 학계를 한 번에 연결한 셈이다.
재단이 눈여겨본 것은 헤르네 재단 산하 시설 '스탑앤고'의 가해자 중심 교육 프로그램과 피해자 중심 지원체계다. 그동안 한국의 학교폭력 대응은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징계라는 두 축에 머물렀다. 징계 이후 가해 학생의 인식과 행동을 바꾸는 교육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스탑앤고 모델은 바로 이 빈칸을 겨냥한다.
이와 함께 재단은 파흐풀 교육원의 영상 상담기법 '마테메오', 헤르네 시청의 예술 접목 사업, 도르트문트 공대의 시각화 상담 방법론을 국내에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다. 말 대신 영상과 예술, 시각 자료로 마음을 여는 방식이다. 디지털 공간에서 생긴 상처를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회복시키겠다는 접근이다.
숫자로 본 위기…6년 새 세 배 된 피해응답률, 일상이 된 사이버폭력
재단이 해외로 눈을 돌린 배경에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국내 학교폭력 상황이 있다. 교육부가 최근 발표한 '2026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에서 피해응답률은 2.9%로 집계됐다. 2020년 0.9%의 세 배를 넘는 수치다. 피해 학생은 약 9만 1,600명이고, 이 가운데 초등학생이 5만 6,500명으로 가장 많았다. 반면 가해응답률은 0.8%에 그쳤다. 교육부는 이 차이를 두고 피해 학생은 폭력으로 받아들이지만 가해 학생은 단순한 장난으로 여겨 가해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재단이 지난 5월 공개한 자체 실태조사는 현장의 위기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전국 초·중·고생 8,476명을 조사한 결과 초등학생 피해 경험률은 12.5%로, 2023년보다 약 2.5배 늘었다. 피해 유형 중 사이버폭력이 14.5%를 차지했고, 폭력을 목격하고도 가만히 있었다는 응답은 54.6%에 달했다. 학교폭력이 점점 어린 나이로 내려가고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사이, 지켜보기만 하는 학생도 늘고 있다는 의미다.
가해와 피해 사이의 인식 차이, 번지는 방관, 늘어나는 디지털 폭력은 처벌만으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다. 재단이 이번 독일 방문에서 가해자 교육과 관계 회복형 상담을 가장 먼저 들여다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내에서 유럽, 그리고 UN으로…청소년의 목소리를 세계 무대로
재단 이종익 상임대표는 "헤르네 재단, 신학학술원은 물론 삼성 등 글로벌 기업들과도 함께 국제협력을 이어오며 청소년 폭력예방과 디지털·AI 안전을 위해 힘써왔다"며 "앞으로도 독일, 바티칸을 비롯해 UN 등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더욱 강화해 청소년 안전 증진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재단의 국제 활동은 청소년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으로도 이어진다. 재단은 현재 '2027 UN 청소년 대표단 선발 스피치 대회 〈로드 투 UN〉' 참가자를 10월 12일까지 모집하고 있다. 선발된 대표단은 내년 2월 뉴욕 UN 본부에서 열리는 UN 경제사회이사회 사회개발위원회 본회의에 참여한다.
1995년 설립된 재단은 2001년 국내 최초로 전국 학교폭력 실태조사를 시작했고, 2009년 UN 경제사회이사회 특별협의지위를 얻었다. 지금도 매년 UN 본회의에서 정책 제안 활동을 하고 있다. 학교폭력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인 김종기 설립자는 개인의 고통을 사회 변화로 이끈 공로로 2018년 인촌상, 2019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방문'을 넘어 '이식'으로…20주년이 시험대
이번 교류의 의미는 분명하다. 한국 학교폭력 정책의 가장 약한 고리인 가해자 교육과 관계 회복에 대해 검증된 해외 모델을 구체적으로 찾아냈다. 디지털·AI 시대일수록 마지막 안전망은 사람이라는 점도 확인했다. 트렌드 코리아 2026이 첫 키워드로 꼽은 '휴먼인더루프', 곧 AI가 아무리 똑똑해도 마지막 판단은 사람이 해야 한다는 흐름이 청소년 보호 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셈이다.
남은 과제도 뚜렷하다. 이번 발표는 대부분 '검토'와 '약속' 단계에 머문다. 헤르네 재단은 직원 1,000여 명 규모로, 독일 아동청소년복지지원법이라는 탄탄한 법적 기반 위에서 운영된다. 교육청과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중심인 한국 체계에 이 모델을 그대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마테메오 같은 기법은 숙련된 전문 인력 양성이 먼저다. 시범 운영 학교와 기간, 효과를 측정할 지표를 담은 실행 계획이 뒤따라야 이번 방문이 행사로 끝나지 않는다.
가해자 교육 모델이 자리 잡으면 '장난이었다'는 인식을 바로잡는 예방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피해자 지원 중심이던 정책의 균형도 맞출 수 있다. 영상과 예술, 시각화 기법을 활용한 상담은 말로 피해를 털어놓기 어려운 저연령 학생에게 특히 효과적일 수 있다. 정기적인 국제 소통 체계가 갖춰지면 한국의 사이버폭력 예방 경험을 유럽과 나누는 쌍방향 협력도 가능하다.
자녀를 잃은 아버지의 개인적 결심에서 시작한 단체가 31년 만에 300년 넘는 역사의 교황청 학술원, UN, 115년 된 독일 복지재단과 대등하게 대화하는 위치에 섰다. 한국 시민사회가 이룬 소중한 성과다. 무엇보다 19년간 한 번도 끊기지 않은 민간 교류는 일회성 MOU가 넘쳐나는 국제협력 현장에서 보기 드문 신뢰의 자산이다. 이제 그 신뢰를 교실의 변화로 증명할 차례다. 2027년, 교류 20주년이 그 성적표를 받는 해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