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자라의 미래, ‘빠른 패션’에서 ‘패션을 만드는 이름’으로
존 갈리아노와 2년 협업…아카이브·쿠튀르·문화 콘텐츠까지 넓어진 자라 매장과 온라인은 더 크게, 제품은 더 특별하게…대량생산과 창작 권위의 결합으로 향하는 50년 이후
[KtN 박인경기자]자라(Zara)가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에게 아카이브를 맡긴 선택은 유명 디자이너를 앞세운 한정판 협업으로만 보기 어렵다. 갈리아노와의 계약은 2년에 걸쳐 이어지는 장기 협업이고, 첫 결과물 ‘Re{form}’ Vol. 1은 기존 자라 의류를 다시 자르고 조립하는 방식으로 출발했다. 한 번의 화제성을 겨냥한 캡슐 컬렉션보다 자라가 앞으로 어떤 패션 기업으로 보이고 싶은지를 드러내는 움직임에 가깝다. Reuters
자라는 이미 충분히 크다. 모기업 인디텍스(Inditex)는 2025년 399억 유로의 매출과 62억 유로의 순이익을 기록했고, 2025년 한 해 동안 신규 개점과 확장·전면 개조를 포함해 전 세계 매장 400여 곳에 손을 댔다. 자라를 포함한 그룹 매장은 97개 시장에서 5460개에 이른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매장의 숫자만 더 늘리는 성장이 아니다. 수많은 나라에서 같은 빨간 세일 표지와 빠른 상품 교체로 기억되던 자라에 다른 가치를 더하는 일이다. Inditex Annual Report
갈리아노의 등장은 그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압축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자라의 경쟁력은 속도에 있었다. 런웨이와 거리에서 움직이는 유행을 빠르게 읽고 상품으로 만들어 매장에 내놓는 능력이 자라를 세계적인 패션 유통 기업으로 키웠다. 소비자는 몇 달을 기다리지 않고 현재 유행하는 실루엣과 색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속도만으로 차이를 만드는 시대는 오래가기 어렵다. 온라인 플랫폼은 더 빨라졌고, 저가 패션의 가격 경쟁도 거세졌다. 스마트폰에서는 수많은 브랜드의 신상품이 동시에 쏟아진다. 디자인을 빨리 상품화한다는 장점만으로 자라가 다른 기업과 충분한 거리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자라가 최근 내놓는 답은 ‘더 빨리’보다 ‘자라에서만 볼 수 있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다.
존 갈리아노가 자라의 과거 옷을 해체해 다시 만든 Re{form}은 이런 변화와 정확히 맞물린다. 버튼업 셔츠와 재킷, 드레스처럼 대량생산을 통해 널리 판매했던 옷이 더 이상 값싼 기본 상품으로만 남지 않는다. 갈리아노의 재단과 해체, 재조립을 거치면서 자라의 과거 자체가 디자인 자산으로 바뀐다.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명품 브랜드가 수십 년 된 아카이브를 꺼내 새 컬렉션으로 되살리는 일은 익숙하다. 오래된 드레스와 가방, 로고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브랜드의 자산이다. 대량생산 패션은 사정이 달랐다. 지난 시즌 상품은 다음 시즌이 오면 빠르게 뒤로 밀렸다.
자라는 이제 과거 상품까지 다시 꺼내고 있다.
50년 동안 쌓인 옷을 단순히 오래된 재고로 두지 않고 창작자가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기록으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변화는 작지 않다. 자라가 상품을 얼마나 빨리 교체하는 회사인가에서, 얼마나 많은 패션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회사인가로 시선을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2025년 자라 창립 50주년을 전후해 진행된 작업도 같은 방향에 놓여 있다. 스티븐 마이젤(Steven Meisel)이 연출한 프로젝트와 세계적인 모델들이 참여한 작업, ‘Zara 50 Creators’를 통해 케이트 모스(Kate Moss), 애니 리보비츠(Annie Leibovitz), 크리스티 털링턴(Christy Turlington), 신디 크로퍼드(Cindy Crawford), 데이비드 베일리(David Bailey) 등 패션과 사진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연결했다. 자라는 옷을 판매하는 매장 밖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며 사진과 영상, 전시와 창작 프로젝트를 브랜드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Inditex Annual Report
갈리아노와의 협업은 이 흐름을 디자이너의 영역까지 확장했다.
중요한 것은 자라가 명품 브랜드가 되려는지 여부가 아니다. 자라가 수천 개 매장과 거대한 온라인 판매망을 포기하고 소수 고객만을 상대할 가능성은 낮다. 현재의 사업 규모 자체가 대중성을 전제로 한다. 오히려 앞으로의 자라는 거대한 유통망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위에 명품 패션에서 익숙했던 창작 방식과 문화적 권위를 얹는 방향에 가까워 보인다.
대량생산과 희소성은 본래 잘 어울리지 않는다. 누구나 살 수 있다는 것이 자라의 강점이라면, 특별한 옷은 아무 데서나 볼 수 없어야 가치가 커진다. 자라는 두 요소를 한 회사 안에 놓으려 하고 있다.
평소에는 셔츠와 데님, 니트와 재킷을 대규모로 판매한다. 동시에 일부 컬렉션에서는 존 갈리아노 같은 디자이너에게 훨씬 넓은 창작 범위를 준다. 일상적인 상품과 수집하고 싶은 상품을 같은 브랜드 안에 두는 방식이다.
가격도 자연스럽게 넓어진다. 모든 상품을 비싸게 만드는 대신 기본 제품은 대중적인 가격대에 남기고, 제작과 소재가 복잡한 일부 제품은 훨씬 높은 가격을 책정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자라는 가격 하나로 설명되는 브랜드에서 벗어난다.
매장도 같은 변화를 겪고 있다. 인디텍스는 대형 매장 개조와 디지털 기술 투자를 이어가고 있고, 자라에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착장을 조합하고 실루엣을 확인할 수 있는 Try-On 기능도 도입됐다. 2025년 기준 해당 기능은 26개 시장에 적용됐다. 매장은 옷을 쌓아놓고 빠르게 판매하는 공간에서 상품·기술·서비스를 함께 경험하는 공간으로 달라지고 있다. Inditex Annual Report
자라의 미래가 갈리아노 같은 스타 디자이너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훨씬 큰 변화는 대량생산 기업이 디자인과 기술, 매장, 콘텐츠를 하나의 구조로 묶는 데 있다.
스마트폰에서 옷을 고르고 인공지능으로 착장을 확인한 뒤, 대형 플래그십에서는 이전보다 정교한 공간과 서비스를 경험한다. 한쪽에서는 기본 상품을 대규모로 판매하고 다른 쪽에서는 유명 사진가와 디자이너가 만든 프로젝트가 브랜드의 이미지를 끌어올린다. 자라가 구축하려는 경쟁력은 가격이나 속도 한 가지로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지속가능성 역시 같은 선상에서 봐야 한다.
Re{form}이 자라 아카이브를 다시 사용한다고 해서 자라의 사업 전체가 순환형 패션으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거대한 생산량을 유지하는 기업에서 한정된 아카이브 재구성 프로젝트와 전체 환경 부담은 별개 문제다.
인디텍스는 2025년 사용 섬유 가운데 88%를 자체 기준상 환경 영향이 더 낮은 소재로 조달했고, 이 가운데 47%가 재활용 원료라고 밝혔다. Zara Pre-Owned도 17개 시장에서 운영되고 있다. 동시에 자라의 환경적 평가는 개별 컬렉션의 상징성보다 전체 생산량과 공급망, 제품 수명, 재사용 체계가 실제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Inditex Annual Report
오히려 Re{form}에서 주목할 부분은 오래된 옷을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다.
패스트패션은 오래 입는 옷보다 빨리 바뀌는 옷과 가까웠다. 갈리아노는 그 논리를 거꾸로 돌렸다. 과거에 팔았던 셔츠와 재킷을 버려진 시간으로 처리하지 않고 다시 들여다봤다. 이전 상품이 다음 디자인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자라가 50년 동안 축적한 옷의 양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다만 여기에는 자라가 피하기 어려운 긴장도 있다.
갈리아노의 쿠튀르 감각과 마이젤의 사진, 유명 창작자와의 프로젝트가 늘어날수록 자라의 이미지는 높아질 수 있다. 반대로 이런 작업이 일부 협업에만 집중되고 대부분의 상품은 이전과 똑같은 속도로 소비된다면 브랜드의 문화적 외피와 실제 사업 사이의 거리가 커진다.
명품의 언어를 가져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라가 쿠튀르와 아카이브, 유명 사진가와 창작자를 끌어들인다고 해서 명품 브랜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명품의 가치는 높은 가격이나 유명 디자이너 한 사람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재와 제작, 수선, 제품 수명, 서비스, 브랜드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디자인 언어까지 함께 쌓여야 한다.
자라가 향하는 곳은 그래서 ‘럭셔리화’라는 한 단어로 정리하기 어렵다.
오히려 패션의 대중성과 창작의 희소성을 동시에 가진 거대한 플랫폼에 가깝다. 세계 각지의 매장과 온라인에서는 막대한 규모의 상품을 판매하면서, 브랜드의 가장 앞쪽에는 존 갈리아노와 스티븐 마이젤 같은 이름을 세운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유통망 안에 쉽게 복제하기 어려운 창작물을 넣는 방식이다.
성공한다면 자라가 얻는 것은 가격 상승만이 아니다.
‘유행을 빠르게 따라가는 회사’라는 오래된 평가에서 벗어나 ‘패션계의 중요한 창작자가 작업하고 싶어 하는 회사’라는 인식을 확보할 수 있다. 다른 브랜드가 만든 유행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위치에서 벗어나 자라 안에서 만들어진 옷과 이미지가 다음 유행의 출발점이 되는 구조도 가능해진다.
존 갈리아노와의 2년은 그래서 한 디자이너의 복귀만을 말하지 않는다.
자라가 세계 최대 수준의 패션 유통망을 가진 기업에서 창작의 권위까지 가진 패션 브랜드로 이동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에 가깝다. 매장은 이미 크고 판매망도 넓다. 기술 투자도 계속되고 있다. 이제 자라가 더 얻으려는 것은 규모가 아니라 패션 안에서 차지하는 자리다.
50년 동안 자라는 빠르게 만드는 법을 익혔다.
앞으로의 50년에는 무엇을 오래 남길 것인지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 존 갈리아노가 과거의 자라 셔츠를 다시 잘라 새 옷으로 만든 선택은 그래서 흥미롭다. 빠르게 지나간 옷을 다시 꺼내는 순간, 자라는 자신의 과거를 처음으로 미래의 재료처럼 다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