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 Demeulemeester Paris④] 검은 가구와 흰 벽, 앤 드뮐미스터가 매장에 돈을 쓰는 방식
맞춤 가구·조명·촉각적 소재로 채운 무채색 공간…판매 면적을 줄이고 브랜드 체류 시간을 늘린 파리 플래그십
[KtN 박인경기자]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 파리 플래그십은 상품을 많이 쌓아놓는 매장이 아니다. 밝은 벽과 검은 천장, 낮은 검은 가구와 길게 이어진 의류 랙 사이에는 넓은 여백이 남아 있다. 매장 전체를 거의 무채색으로 정리하고 맞춤 제작한 가구와 조명, 촉각적인 소재를 사용했다. 150㎡라는 크기를 생각하면 판매 가능한 면적을 최대한 채우기보다 공간 자체의 인상을 남기는 데 상당한 비중을 둔 구성이다.
파리 플래그십의 경제적 의미도 여기서 시작된다. 매장 면적은 임대료와 직결되고, 내부에 들어가는 가구와 조명은 초기 투자비를 늘린다. 같은 공간에 더 많은 랙을 넣으면 한 번에 노출할 수 있는 상품 수는 늘어난다. 앤 드뮐미스터는 반대로 일부 면적을 비워두고 상품 사이의 거리를 넓혔다. 단위면적당 진열 수량을 늘리는 대신 브랜드의 분위기와 상품 하나하나의 존재감을 높이는 쪽을 택했다.
고가 패션 매장에서 여백은 단순한 미학적 선택에 그치지 않는다. 고객이 옷 한 벌을 충분히 보고, 소재를 만지고,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피팅까지 이어갈 시간을 확보하는 데 필요하다. 빠르게 많은 상품을 훑는 매장과 달리 구매까지 걸리는 시간이 긴 브랜드일수록 공간의 밀도는 판매 방식과 맞물린다.
앤 드뮐미스터의 파리점은 상품 진열과 체류 공간을 분리하기보다 한 동선 안에 섞었다. 벽면에는 의류 랙을 두고, 중앙에는 낮은 가구와 빈 공간을 남겼다. 방문객은 옷을 보다가 멈추고 다시 이동할 수 있다. 한쪽 벽에서 다른 쪽 벽으로 빠르게 지나가기보다 매장 안에서 속도를 늦추도록 한 구성이다.
이런 매장은 같은 150㎡라도 실제 판매 가능한 랙 수는 줄어들 수 있다. 반면 상품 하나가 차지하는 시각적 면적은 커진다. 의류가 서로 겹치지 않고 보이면 재단과 소재, 색의 차이를 읽기 쉬워진다. 고가 의류에서는 이런 차이가 제품 설명과 가격 설득에 직접 연결된다.
매장 인테리어에 들어가는 비용도 단순한 장식비로 볼 수 없다. 맞춤 가구와 조명은 일반 집기보다 초기 비용이 높을 수 있지만, 브랜드가 여러 시즌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고정 자산이 된다. 가구의 크기와 색, 조명의 밝기와 방향이 일관되면 시즌 상품이 바뀌어도 매장 전체의 인상은 유지된다.
이런 일관성은 브랜드 운영에도 중요하다. 옷은 시즌마다 바뀌지만 매장은 매일 고객을 맞는다. 컬렉션의 분위기가 달라져도 공간의 색과 가구가 브랜드의 기본 인상을 계속 유지하면 매장은 제품과 별도로 브랜드 정체성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앤 드뮐미스터 파리점은 흑백 대비를 강하게 사용했다. 검은 구조물과 밝은 벽을 나눠 놓으면서 의류의 실루엣이 배경에서 분리된다. 복잡한 장식이나 색을 많이 쓰지 않아 시즌별 컬렉션이 매장 인테리어와 경쟁하지 않는다.
매장을 한 번 꾸민 뒤 여러 시즌을 운영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절제는 실용적이기도 하다. 특정 시즌의 색이나 소재에 맞춰 인테리어를 크게 바꾸지 않아도 된다. 의류와 액세서리, 테이블웨어가 바뀌어도 같은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오프라인 매장에 이런 비용을 들이는 이유는 온라인 판매와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는 제품 사진과 가격, 사이즈를 확인하고 바로 구매할 수 있다. 매장은 같은 상품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 원단의 무게와 표면, 의복이 몸에 걸렸을 때의 선, 제품 사이의 관계까지 확인할 수 있어야 온라인과 다른 가치가 생긴다.
파리점의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내부는 이런 역할에 맞춰져 있다. 공간 자체가 시선을 빼앗기보다 옷과 오브제가 먼저 보인다. 의류를 많이 걸지 않아도 한 점이 충분한 시각적 면적을 차지한다. 고객 입장에서는 상품을 천천히 볼 수 있고, 브랜드 입장에서는 한 벌의 디자인을 더 선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체류 시간은 중요해진다. 방문 시간이 길어진다고 반드시 구매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고가 패션에서는 직원과의 상담과 피팅, 다른 상품군으로의 이동이 구매 과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방문객이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이런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
중앙의 가구와 여백은 고객 서비스에도 쓰일 수 있다. 옷을 보고 바로 나가는 구조가 아니라 잠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직원이 추가 상품을 제안하거나 다른 카테고리로 안내하기 쉬워진다. 의류에서 슈즈, 액세서리, Serax 테이블웨어까지 상품군을 넓힌 파리점에서는 이런 이동이 특히 중요하다.
공간이 커 보이도록 만드는 효과도 있다. 150㎡는 초대형 럭셔리 플래그십과 비교하면 크지 않지만, 중앙을 비우고 시야를 길게 열어두면 실제 면적보다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고객 동선과 시야를 확보하면서 작은 매장의 한계를 완화하는 방법이다.
반대로 여백에는 비용이 따른다. 비워둔 면적도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 자리에 랙을 하나 더 놓으면 더 많은 상품을 보여줄 수 있고, 진열 수량을 늘릴 수도 있다. 앤 드뮐미스터는 그 가능성을 줄이는 대신 옷 한 벌이 차지하는 공간과 매장 전체의 인상을 선택했다.
이 선택이 경제적으로 의미를 가지려면 상품 한 점의 판매가치와 고객의 구매 경험이 그 비용을 뒷받침해야 한다. 고가 패션은 대량 판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객단가와 브랜드 가치에 기대는 사업이다. 매장도 같은 원리로 운영된다. 많은 상품을 빠르게 회전시키는 대신 적은 수의 상품을 더 높은 가치로 제시하는 방식이다.
인테리어는 마케팅 비용과도 연결된다. 브랜드가 광고와 캠페인을 통해 전달하려는 이미지를 매장 자체가 반복해서 보여주면 공간은 상시적인 홍보 수단이 된다. 파리 패션위크 기간에 방문한 고객과 업계 관계자, 관광객이 같은 공간을 보고 사진과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도 브랜드 노출을 넓힐 수 있다.
온라인에서는 광고비를 지불할 때마다 새로운 노출을 사야 하지만, 오프라인 공간은 한번 구축한 뒤 일정 기간 계속 사용한다. 초기 투자비가 높은 대신 지속적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물론 임대료와 유지비가 계속 발생하기 때문에 실제 비용 효율은 장기간 운영 실적을 봐야 판단할 수 있다.
앤 드뮐미스터가 파리점에 맞춤 가구와 조명을 넣은 이유도 이런 장기 운영과 맞닿아 있다. 어느 브랜드에서나 볼 수 있는 범용 집기보다 특정한 형태와 재료를 사용하면 매장만의 인상이 남는다. 런던과 도쿄 등 이후 플래그십에서도 비슷한 디자인 언어를 이어갈 경우 매장 자체가 글로벌 브랜드 자산으로 축적될 수 있다.
각 도시에서 공간을 완전히 똑같이 복제할 필요는 없다. 다만 색과 소재, 가구의 비례처럼 핵심 요소를 유지하면 서로 다른 건물에서도 같은 브랜드라는 인식을 만들 수 있다. 파리점은 앞으로 확대될 매장망에서 어떤 부분을 공통으로 가져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첫 기준이 될 수 있다.
오프라인 확장이 계속될수록 이런 기준은 더 중요해진다. 매장마다 다른 인테리어를 새로 개발하면 비용과 시간이 늘어난다. 일정한 디자인 원칙을 갖추면 설계와 집기 제작, 운영 기준을 반복 적용하기 쉬워진다. 브랜드의 미학과 비용 관리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다.
파리점은 옷과 공간의 관계도 분명하게 잡았다. 밝은 벽은 검은 의류와 금속 구조물을 돋보이게 하고, 검은 가구는 밝은 제품과 오브제를 받쳐준다. 시선이 분산되지 않아 상품 자체의 선과 소재가 먼저 들어온다. 매장의 색을 줄인 대신 제품의 차이를 더 잘 보이게 한 구성이다.
Serax 테이블웨어가 같은 공간에 들어가도 이질감이 크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의류와 생활용품의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무채색 배경과 가구 체계 안에 놓이면서 하나의 브랜드 세계로 묶인다. 상품군이 늘어나도 매장이 여러 개의 코너로 잘게 나뉘지 않는다.
파리 플래그십에서 인테리어는 판매를 방해하는 장식과 판매만을 위한 집기 사이에 놓여 있다. 상품을 많이 넣는 효율은 일부 포기했지만, 대신 고객이 머무를 시간과 옷을 보는 거리를 확보했다. 맞춤 가구와 조명에는 비용이 들어가지만, 여러 시즌 동안 브랜드의 기본 인상을 유지하는 자산으로 쓸 수 있다.
이런 공간은 매출 총액만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방문객이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 피팅과 상담이 얼마나 구매로 이어지는지, 의류에서 슈즈와 액세서리로 이동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까지 함께 봐야 한다. 실제 수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파리점의 설계는 단순히 상품 수를 늘리는 방식과 다른 운영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밀라노에 이어 파리, 2027년 런던과 도쿄까지 플래그십이 늘어나면 공간 설계에 들어가는 비용도 함께 커진다. 동시에 각 매장이 브랜드 이미지를 전달하고 직접 판매를 만드는 역할도 확대된다. 신규점 하나의 인테리어가 비용으로 끝날지, 여러 도시에서 반복되는 브랜드 자산이 될지는 이후 매장 운영에서 결정된다.
앤 드뮐미스터 파리점은 150㎡ 안에서 상품보다 여백을 크게 남겼다. 판매 면적을 최대한 채우지 않고 옷과 가구, 고객 사이의 거리를 확보했다. 매장을 많이 파는 공간으로 만들기보다 옷의 가치가 충분히 전달되는 공간으로 만든 선택이다.
파리에서 투자한 것은 벽과 가구만이 아니다. 고객이 브랜드를 기억하는 방식까지 매장 안에 넣었다. 흰 벽과 검은 가구, 절제된 조명 사이에서 옷이 먼저 보이도록 한 공간은 앤 드뮐미스터가 오프라인 매장을 앞으로 어떤 자산으로 키우려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