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조운호 ‘블레드 호수’, 설산과 물빛 사이에 머문 인간의 흔적

차가운 청색의 알프스와 따뜻한 숲·붉은 지붕의 대비…번지는 수면과 여백으로 풀어낸 자연과 삶의 거리

2026-10-09     박준식 기자
조운호, ‘블레드 호수(Lake Bled)’, 2025.07.06, 수채화, 52×39cm. 알프스 산맥 아래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를 담았다.

[KtN 박준식기자]알프스의 긴 능선이 하늘 아래 펼쳐지고, 블레드 호수가 아래쪽을 넓게 채운다. 호수 가운데 솟은 종탑과 붉은 지붕, 숲을 두른 언덕은 거대한 설산 앞에서 작은 규모를 유지한다. 조운호의 수채화 ‘블레드 호수(Lake Bled)’는 산의 장엄함을 확대하기보다 설산과 호수, 숲과 건축물이 한 공간에 자리 잡은 풍경을 차분하게 펼쳐놓는다.

청색은 그림 전반을 묶는 가장 큰 색이다. 하늘의 맑은 파랑에서 설산의 회청색을 거쳐 호수의 짙은 청록과 푸른색까지 이어진다. 같은 계열의 색을 반복하면서도 농도와 붓질을 달리해 하늘과 산, 물의 성질을 나눴다.

설산에는 종이의 흰색을 적극적으로 남겼다. 능선과 정상의 눈은 흰 물감을 두껍게 올리기보다 비워둔 부분과 옅은 청색의 대비로 표현했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는 짙은 푸른 선은 산의 굴곡을 짚고, 멀리 놓인 산은 가까운 숲보다 경계를 부드럽게 처리해 깊이를 만든다.

산 아래로 내려오면 색의 온도가 달라진다. 섬과 숲에는 녹색뿐 아니라 노랑과 주황, 갈색, 붉은색이 섞였다. 설산의 차가운 청색과 맞닿으면서도 따뜻한 색이 넓게 번지지 않아 전체 풍경의 균형을 해치지 않는다. 붉은 지붕과 황금빛 나뭇잎이 푸른 산과 호수 사이에 작은 온기를 더한다.

종탑은 화면 중앙보다 왼쪽에 세워졌다. 길게 솟은 검은 첨탑과 흰 벽은 수평으로 펼쳐진 산과 호수 사이에서 뚜렷한 수직선을 만든다. 주변 건물과 숲은 낮게 이어지고, 종탑만 위로 길게 올라가면서 넓은 자연 속 인간의 흔적을 드러낸다.

건축물의 규모를 키우지 않은 점도 눈에 띈다. 설산은 작품 상단을 거의 가득 채우지만 마을과 종탑은 산 아래에 작게 머문다. 자연을 배경으로 밀어내고 사람의 공간을 앞세우기보다 거대한 산과 호수 안에 인간의 생활 공간을 놓았다.

오른쪽 언덕 위의 건축물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짙은 숲 위로 밝은 벽과 붉은 지붕이 드러나지만 주변 풍경보다 먼저 튀어나오지 않는다. 산과 호수 사이에 자리한 여러 건축물이 자연 속에서 서로 다른 높이와 거리를 만든다.

수면에서는 형태보다 색이 앞선다. 숲과 건축물의 모습이 거울처럼 정확히 되풀이되지 않는다. 짧은 수평 붓질 사이로 녹색과 황토색, 붉은색이 번지고, 일부는 물에 풀리듯 경계가 흐려진다. 육지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가졌던 색들이 호수에 닿으면서 흔들리는 빛의 흔적으로 바뀐다.

호수 중앙과 오른쪽에는 흰 여백도 넓게 남아 있다. 물감을 채우지 않은 자리가 수면에 반사된 빛처럼 작용하고, 그 주변을 청색 붓질이 끊어지며 지나간다. 색을 더하는 방식만큼 덜어내는 방식이 물의 움직임을 만든다.

조운호 작가는 차가운 푸른색과 따뜻한 색의 대비, 수면에 번지는 반사와 여백을 통해 고요함과 생명력이 함께 있는 풍경을 담았다. 그림에서도 산과 건축물은 비교적 형태를 유지하지만 숲과 호수에서는 경계가 느슨해진다. 단단한 산, 고정된 건축물, 흔들리는 물이 서로 다른 속도로 한 풍경을 이룬다.

수채화의 번짐도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하늘과 산에서는 넓고 옅게 퍼지고, 숲에서는 여러 색이 짧고 겹겹이 쌓인다. 호수에 이르면 붓질이 다시 길고 수평적으로 바뀐다. 하나의 기법을 반복하기보다 대상의 성질에 따라 물감의 농도와 움직임을 조절했다.

조운호 작가가 그려온 자연 수채화에서도 산과 물은 자주 등장해왔다. 설악산과 아이거봉, 브리엔츠호 등에서는 자연의 규모와 빛의 변화, 수면의 번짐이 주요한 조형 요소로 나타났다. 블레드 호수에서는 거대한 자연 안에 사람이 만든 공간이 보다 구체적으로 자리한다.

마테호른을 다룬 작업에서는 설원을 가로지르는 철도와 열차가 인간의 이동을 드러냈다. 블레드 호수에서는 이동보다 머무는 풍경이 앞선다. 종탑과 지붕, 언덕 위 건축물은 한곳에 자리 잡고 있고 호수는 그 모습을 다시 받아들인다. 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과 자연 속에 머무는 인간이라는 차이가 두 풍경을 갈라놓는다.

블레드 호수의 구성은 관광지의 세부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방식보다 색과 거리의 관계에 무게를 둔다. 설산의 넓이, 종탑의 수직선, 숲의 따뜻한 색, 호수의 반사가 서로 다른 영역을 이루고 세부 묘사는 상당 부분 덜어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도 거창한 상징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산은 산의 크기를 유지하고, 마을은 작은 규모로 남아 있다. 호수는 두 영역을 함께 받아들이면서도 형태를 그대로 복제하지 않고 색과 빛으로 흩어놓는다.

차가운 설산과 따뜻한 숲, 고정된 건축물과 흔들리는 수면이 각자의 성질을 유지한 채 한 풍경 안에 자리한다. 조운호의 ‘블레드 호수’는 알프스의 규모와 그 아래 이어지는 인간의 생활을 수채화의 투명한 색층과 여백으로 함께 담아낸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