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 ‘해가 진다’, 잠든 아이 위로 흘러가는 산양의 시간
비탈에 몸을 누인 아이와 능선을 지나는 동물들…1984년 색채 리놀륨 판화에서 일상의 관찰이 시적 이미지로 넓어지는 순간
[KtN 박준식기자]푸른 비탈에 아이가 잠들어 있다. 몸을 옆으로 웅크리고 한쪽 팔을 베개처럼 받친 채 눈을 감았다. 곁에는 공 하나가 놓여 있다. 아이보다 높은 능선에서는 산양과 양을 닮은 동물들이 줄을 이루고, 오른쪽 두 마리는 뿔을 맞댄 채 서 있다. 하늘은 넓고 비어 있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1984년작 ‘해가 진다(Sunset)’는 저녁의 풍경을 그리면서도 지는 해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이의 잠과 동물의 이동, 비어가는 하늘과 기울어진 땅으로 하루가 저물어가는 시간을 만든다.
작품을 크게 나누는 것은 비탈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낮아지는 경사가 거의 전체를 가로지르며 하늘과 땅을 갈라놓는다. 위쪽에는 동물들이 있고 아래쪽에는 아이가 있다. 사람과 동물을 같은 장소에 그렸지만 서로 직접 마주하게 하지 않았다. 아이는 잠들어 있고 동물들은 아이의 존재와 무관한 듯 능선을 따라 움직인다.
아이의 몸은 작품 아래쪽에서 가장 큰 형상이다. 연보라색 상의와 어두운 바지, 갈색을 머금은 얼굴과 팔다리가 푸른 땅 위에 놓인다. 몸을 둥글게 웅크린 자세 때문에 머리와 어깨, 허리와 무릎을 잇는 윤곽이 하나의 큰 곡선을 만든다. 얼굴은 아래를 향하고 눈은 감겨 있다. 입과 코, 눈썹을 이루는 선도 많지 않다.
잠든 몸에는 힘이 빠져 있다. 오른팔은 얼굴 아래로 접혀 있고 왼팔은 땅을 향해 내려온다. 두 다리도 자연스럽게 포개졌다. 자세를 극적으로 만들거나 아이의 잠에 특별한 사건을 덧붙이지 않았다. 들판에서 놀다가 그대로 잠든 듯한 일상의 상태가 먼저 들어온다.
아이 옆의 공은 작은 물건이지만 작품의 성격을 바꾼다. 공이 없었다면 잠든 아이는 훨씬 고립된 형상으로 읽힐 수 있다. 둥근 공 하나가 놓이면서 조금 전까지 이어졌을 놀이와 움직임이 남는다. 지금 작품에 그려진 것은 정지된 잠이지만, 그 앞에는 아이가 움직였던 시간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발치와 몸 주변에 자란 작은 풀과 꽃도 비탈을 빈 색면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꽃 몇 송이는 아이의 손 가까이에 있고 가느다란 풀은 몸 주변에서 위로 올라온다. 식물을 촘촘하게 채우지 않고 드문드문 남겼기 때문에 넓은 땅의 여백은 그대로 유지된다.
아이의 아래쪽 세계가 잠과 정지에 가깝다면 능선 위에는 움직임이 있다.
왼쪽의 동물 한 마리는 이미 작품 바깥으로 향하는 듯 서 있다. 그 뒤를 다른 동물이 따르고 중앙에는 몸을 낮춘 동물이 있다. 오른쪽에서는 뿔이 크게 자란 두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 여러 동물이 같은 방향과 같은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걷고, 서고, 몸을 낮추고, 서로 맞서는 동작이 하나의 능선 위에 이어진다.
동물들의 크기는 아이보다 훨씬 작다. 그러나 하늘을 배경으로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존재감은 약하지 않다. 몸통 내부에는 짧은 선을 반복해 털의 방향을 만들었고 다리는 가늘고 길게 땅으로 내려온다. 뿔은 몸보다 훨씬 간결한 선으로 뻗어 하늘의 빈 공간을 가른다.
특히 오른쪽 두 마리가 만드는 형상이 강하다. 서로 마주한 머리와 뿔이 중앙에서 맞닿고, 몸은 반대 방향으로 벌어진다. 비탈은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지만 두 동물의 뿔은 위로 솟는다. 땅의 경사와 동물의 수직적인 움직임이 충돌하면서 작품 상단에 긴장이 생긴다.
쉬가예프는 아이와 동물 사이에 별도의 사건을 만들지 않았다. 아이가 동물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동물이 아이에게 다가오는 것도 아니다. 두 세계는 같은 땅을 공유하면서 서로 다른 시간을 보낸다. 아이는 잠들고 동물은 움직인다.
‘해가 진다’의 인상은 바로 이 거리에서 만들어진다.
제목은 일몰을 가리키지만 태양은 어디에도 없다. 붉게 물든 수평선도, 길게 늘어진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은 위쪽의 연한 청색에서 아래쪽의 밝은 빛으로 부드럽게 옅어진다. 쉬가예프는 해 자체를 묘사하는 대신 하루가 끝날 무렵 나타나는 상태를 사람과 동물, 색의 변화로 옮겼다.
1982년대 초반부터 현실의 풍경과 생활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던 쉬가예프의 초기 작업 가운데 ‘해가 진다’는 한 단계 다른 성격을 드러낸다. 산과 집, 마을의 일상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눈앞의 풍경을 기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서로 다른 존재를 한 공간에 배치해 하나의 정서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1984년의 색채 리놀륨 판화 작업에서는 색과 형태를 압축하는 실험도 두드러졌다. 쉬가예프는 자연을 세밀하게 재현하기보다 큰 색면과 선으로 정리하면서 판화 안에서 깊이와 색채의 변화를 만들어갔다. ‘해가 진다’에서도 하늘과 땅을 복잡한 풍경 묘사로 채우지 않았다. 넓은 두 개의 색 영역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푸른 비탈은 단순한 배경색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는 여러 흔적이 겹친다. 자주색에 가까운 짧은 선과 긁힌 자국이 곳곳에 남고, 작은 식물이 간격을 두고 솟는다. 넓은 색면을 유지하면서 필요한 곳에만 선을 더했다.
하늘은 그보다 훨씬 비어 있다. 화면 상단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공간에 별다른 사물이 없다. 옅은 청색에서 흰색으로 이어지는 색의 변화와 작은 흔적만 남는다. 비어 있는 하늘이 넓을수록 능선 위 동물들의 윤곽은 선명해지고, 아래쪽에 웅크린 아이는 더 낮고 깊은 곳에 놓인다.
구도의 중심을 반드시 한가운데 두지 않은 점도 눈에 띈다. 아이는 아래쪽 오른편에 치우쳐 있고 공은 왼쪽에 떨어져 있다. 동물들은 상단을 따라 길게 퍼졌다. 어느 하나가 작품 전체를 독점하지 않는다.
대신 각 형상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균형을 잡는다. 아이의 머리는 오른쪽에 있고 발은 왼쪽으로 향한다. 능선 위 동물들의 흐름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비탈 역시 같은 방향으로 내려간다. 작품 전체에 하나의 긴 사선이 반복되면서 느린 이동감이 생긴다.
여기에 아이의 둥근 몸과 공이 다른 리듬을 만든다. 비탈과 동물은 길게 이동하지만 아이는 몸을 접어 한곳에 머문다. 공 역시 완전한 원에 가까운 형태로 정지해 있다. 이동하는 선과 멈춰 있는 원형이 같은 공간에 놓인다.
색채의 배치에서도 아이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땅과 동물에는 청록색과 녹색 계열이 넓게 쓰였고 아이의 옷에는 연보라색이 들어갔다. 강렬한 원색으로 인물을 떼어내지는 않았지만 주변과 다른 색을 사용해 잠든 몸을 자연스럽게 찾게 한다.
쉬가예프가 자연과 인간을 다루는 방식도 조금씩 드러난다. 자연은 사람을 둘러싼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능선 위의 동물들은 아이의 이야기를 꾸며주는 장식이 아니며, 아이 역시 풍경을 설명하기 위해 놓인 작은 인물이 아니다. 사람과 동물이 각각의 움직임을 가진 채 같은 땅에 존재한다.
후기 쉬가예프의 회화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해가 진다’는 특히 흥미롭다. 이후 작품에서는 여성과 신화적 동물, 전통적 기호와 자연의 형상이 만나고 충돌하면서 현실을 넘어선 관계를 만든다. 동물은 구체적인 생명체이면서 동시에 기억과 신화가 겹쳐지는 존재로 확장된다.
1984년의 동물들을 곧바로 후기의 신화적 형상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작품 속 산양과 양은 아직 현실의 비탈을 걷는다. 아이 역시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해가 진다’가 보여주는 것은 상징의 완성보다 인간과 동물을 하나의 공간에 놓고 서로 다른 상태와 움직임을 바라보기 시작한 시선이다.
‘림마’에서는 한 사람과 생활공간이 촘촘한 연필선으로 연결됐다. ‘누드’에서는 몸과 의복, 실내의 사물이 색면과 윤곽으로 조직됐다. ‘해가 진다’에서는 공간이 밖으로 넓어진다. 실내를 채우던 생활용품 대신 넓은 하늘과 비탈이 들어오고, 한 사람의 몸 옆에는 동물의 무리가 놓인다.
작품의 밀도 역시 달라졌다. ‘림마’가 사물과 선을 많이 남겼다면 ‘해가 진다’는 상당 부분을 비웠다. 무엇을 더 그릴 것인가보다 어디까지 덜어낼 것인가가 중요해졌다. 하늘을 넓게 비우고 땅도 하나의 큰 색면으로 묶었다. 필요한 형상만 남기면서 아이와 동물의 관계가 오히려 또렷해졌다.
쉬가예프의 작품 세계가 이후 사실적인 관찰에서 추상과 신화적 형상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생각하면 생략의 증가는 중요하다. 구체적인 정보를 덜어낼수록 하나의 형상이 여러 의미를 품을 여지가 커진다. 집은 단순한 건축물 이상의 형태가 되고, 동물은 개별적인 생명체를 넘어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만드는 형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
‘해가 진다’는 아직 그 변화의 초입에 있다. 작품의 근거는 분명히 현실이다. 잠든 아이의 몸은 구체적이고 공과 풀, 산양과 양도 알아볼 수 있다. 다만 현실의 요소를 배치하는 방식이 단순한 기록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잠든 아이와 움직이는 동물의 대비가 대표적이다. 하나는 정지하고 다른 하나는 이동한다. 하나는 비탈 아래에 있고 다른 하나는 능선 위에 있다. 아이는 눈을 감았고 동물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몸을 움직인다. 두 영역을 연결하는 서사는 따로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품에는 설명되지 않은 여백이 생긴다.
아이가 왜 그곳에서 잠들었는지 알 수 없다. 동물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제시되지 않는다. 오른쪽 두 마리가 실제로 싸우는 순간인지, 잠시 뿔을 맞댄 상태인지도 작품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 쉬가예프는 사건의 전후를 설명하지 않고 한순간만 남겼다.
이 설명의 부재가 ‘해가 진다’를 단순한 목가적 풍경과 갈라놓는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아이가 평화롭게 잠든다는 이야기만으로 작품을 닫기에는 위쪽 동물들의 움직임이 강하고, 동물의 장면만을 강조하기에는 아래쪽 아이의 몸이 너무 크다. 두 영역은 서로를 설명하지 않은 채 한 작품 안에 공존한다.
쉬가예프의 후기 작업에서 반복되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 역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설명하는 구조와는 거리가 있다. 여성과 동물, 사람과 자연의 형상이 만나면서 의미는 관계 속에서 생긴다. ‘해가 진다’에서는 그런 조형적 사고가 아직 현실적인 풍경 안에서 작동한다.
제목의 ‘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다시 중요해진다. 쉬가예프는 일몰을 태양의 이미지로 대표시키지 않았다. 하루의 끝을 잠드는 몸과 움직이는 동물, 넓게 비워진 하늘로 바꿨다. 눈에 보이는 하나의 자연현상을 그리는 대신 시간이 지나가는 상태를 여러 형상으로 나눠 놓았다.
아이 곁의 공도 이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놀이를 멈춘 공, 잠든 몸, 여전히 움직이는 동물들이 같은 시간 안에 놓인다. 인간의 하루는 멈추지만 자연의 움직임은 계속된다. 작품은 그 차이를 거창한 상징으로 설명하지 않고 서로 다른 자세로 보여준다.
쉬가예프가 이후 신화와 원형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자연과 동물은 더욱 복합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출발점에는 관찰한 현실이 있었다. 산과 집을 보고, 사람의 얼굴과 생활공간을 보고, 아이와 동물이 있는 비탈을 바라봤다. 현실의 형상을 충분히 관찰한 뒤 조금씩 덜어내고 다시 배열하면서 독자적인 조형언어가 만들어졌다.
‘해가 진다’에서 쉬가예프는 그 과정을 한층 더 밀고 나간다. 풍경의 세부를 줄이고 하늘을 비웠으며, 사람과 동물을 서로 떨어뜨렸다. 남겨진 형상 사이의 거리가 작품의 이야기를 대신한다.
1984년의 저녁은 그래서 태양 없이 완성된다.
능선을 걷는 동물들이 있고, 비탈 아래에는 아이가 잠들어 있다. 놀이를 멈춘 공이 곁에 남았고 작은 꽃과 풀이 몸 주변에서 자란다. 하늘은 서서히 색을 잃는다. 쉬가예프는 지는 해를 그리지 않고 하루가 저무는 시간을 그렸다.
‘해가 진다’는 현실의 풍경을 관찰하던 쉬가예프가 사람과 자연을 단순한 재현의 대상에서 관계의 형상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작품으로 읽힌다. 아이의 잠과 동물의 이동 사이에 놓인 넓은 거리는 이후 인간과 동물, 현실과 신화가 한 작품 안에서 만나게 되는 쉬가예프 조형세계의 오래된 흔적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