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 ‘비둘기를 든 소녀’, 현실의 풍경에 낯선 질서가 들어오다
소녀와 비둘기, 말과 도시의 인물을 한 공간에 겹친 1986년 색채 리놀륨 판화…관찰 중심의 초기 작업에서 상징적 형상으로 이동하는 쉬가예프의 변화
[KtN 박준식기자]한 소녀가 비둘기를 손에 올리고 서 있다. 반대편 손은 어깨 높이까지 올라가 둥근 물체를 받치고 있다. 소녀의 몸 앞을 짙은 청색의 말이 가로지르고, 말의 머리는 아래로 숙여져 있다. 오른쪽에는 검은 옷을 입은 인물이 등을 보인 채 멀어지고, 뒤편에는 도시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직선 구조가 솟아 있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1986년작 ‘비둘기를 든 소녀(Girl with pigeon)’에서는 현실에서 알아볼 수 있는 형상들이 등장하지만 하나의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묶이지 않는다.
1983년 ‘림마’에서 한 사람과 생활공간을 촘촘하게 관찰하고, 1984년 ‘해가 진다’에서 잠든 아이와 능선을 지나는 동물을 넓은 여백 속에 떨어뜨렸던 쉬가예프의 시선은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 크게 달라진다. 사람과 동물, 사물은 현실의 비례와 거리에서 조금씩 풀려난다. 소녀와 말, 비둘기와 뒤편의 인물이 서로 다른 크기와 방향으로 한 작품에 들어오면서 재현보다 형상 사이의 관계가 앞에 놓이기 시작한다.
소녀의 크기부터 현실적인 공간감과 거리가 있다. 상반신은 작품 중앙에서 크게 솟아 있지만 하반신은 말의 몸과 겹치며 상당 부분 가려진다. 머리는 말보다 높고, 양팔은 좌우로 벌어져 작품의 상단을 넓게 점유한다. 소녀를 실제 공간에 서 있는 인물로 묘사하기보다 작품을 구성하는 중심축으로 세운 모습에 가깝다.
얼굴은 오른쪽을 향한다. 눈과 코, 입은 옆모습으로 정리됐고 머리카락은 뒤로 길게 내려온다. 머리 위에는 여러 줄의 띠가 둘러져 있으며 이마 주변에는 작은 장식이 반복된다. 얼굴과 목에도 선이 촘촘하게 들어간다.
인물의 표정에서는 극적인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비둘기를 바라보지도 않고 관람자를 향하지도 않는다. 시선은 작품 오른쪽을 향한 채 멀리 빠져나간다. 양손에 서로 다른 대상을 들고 있지만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는 표정이나 몸짓은 없다.
오른손 위의 비둘기는 선명하다. 몸통과 날개, 긴 꼬리와 목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날개의 깃털은 여러 개의 가는 선으로 갈라지고 꼬리는 뒤쪽으로 길게 퍼진다. 작은 발은 소녀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
비둘기는 날지 않는다. 소녀가 움켜쥐고 있지도 않다. 손과 새가 맞닿아 있지만 긴장보다는 균형이 먼저 들어온다. 새는 손 위에 서 있고 소녀의 팔은 거의 수평으로 뻗어 있다. 사람과 동물이 한 선 위에서 이어지는 구성이다.
반대편 손에 들린 둥근 물체는 성격이 훨씬 모호하다. 원 안에는 가는 선들이 교차하고 중앙에는 짙은 흔적이 있다. 작품에 제시된 정보만으로 정확한 대상을 단정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명칭보다 소녀의 양팔 끝에 서로 다른 두 형상이 놓였다는 사실이다.
왼쪽의 원과 오른쪽의 비둘기는 소녀를 사이에 두고 균형을 이룬다. 한쪽은 거의 완전한 원에 가깝고 다른 한쪽은 머리와 목, 날개와 꼬리를 가진 생명체다. 정적인 기하학적 형태와 살아 있는 동물의 형태가 양쪽에 놓인다.
소녀의 두 팔은 그 사이를 연결한다. 몸통은 수직으로 서고 팔은 좌우로 펼쳐진다. 단순한 자세이지만 작품의 기본 골격을 만든다. 인물을 중심으로 좌우에 형상을 배치하는 방식은 현실의 우연한 순간을 포착했다기보다 의도적으로 구성된 질서에 가깝다.
화면 아래쪽에서는 말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말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작품을 길게 가로지른다. 짙은 청색과 자주색이 섞인 몸통은 거대한 색면을 이루고, 소녀의 밝은 상반신과 강하게 대비된다. 몸은 수평으로 뻗지만 머리는 아래로 깊게 숙였다. 목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선이 대각선으로 떨어지면서 소녀의 수직적인 자세와 부딪힌다.
말의 얼굴에는 흰 천이나 장식처럼 보이는 형태가 씌워져 있다. 눈 주변에는 검은 무늬가 들어가고 입 가까이에서는 끈이 아래로 이어진다. 소녀의 손이 그 끈을 잡은 듯 연결된다. 사람과 말은 몸이 겹칠 뿐 아니라 하나의 가는 선으로도 이어진다.
여기에서 쉬가예프의 인물과 동물은 ‘해가 진다’와 다른 관계를 갖는다. ‘해가 진다’에서는 잠든 아이가 비탈 아래에 있고 동물들은 높은 능선을 따라 움직였다. 같은 자연 안에 존재하지만 서로 접촉하지 않았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소녀의 손에 새가 올라가고 다른 손 가까이에는 말의 고삐가 이어진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거리가 좁아졌다.
소녀의 몸과 말의 몸이 겹치는 방식도 현실적인 원근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말은 작품 전면을 가로지르고 소녀는 그 뒤에 서 있지만, 소녀의 치마와 말의 다리, 몸통의 경계가 복잡하게 포개진다. 두 형상은 앞과 뒤로 명확하게 분리되기보다 하나의 구조 안에서 서로 끼어든다.
색채가 결합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소녀의 상의는 밝은 크림색에 가깝고 말은 깊은 청색과 자주색으로 채워졌다. 배경은 연분홍에서 연녹색, 옅은 청색으로 이어진다. 자연스러운 야외의 색을 재현하기보다 인물과 동물의 위치를 구별하는 색면이 먼저 들어온다.
1984년의 ‘해가 진다’에서도 쉬가예프는 넓은 색면을 이용했지만 자연의 비탈과 하늘이라는 공간적 근거는 비교적 분명했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색이 현실의 장소를 설명하는 역할에서 한층 멀어진다. 하늘인지 벽인지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배경 위에 소녀와 말이 떠오른다.
오른쪽 아래에 등장하는 인물은 작품의 공간을 더욱 낯설게 만든다.
검은 옷을 입은 인물은 등을 보인 채 오른쪽으로 걸어간다. 머리와 목 주변에는 흰 천이 둘러져 있고, 몸의 대부분은 검은색으로 묶였다. 소녀와 비교하면 크기가 훨씬 작다. 두 인물이 실제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를 정확하게 계산하기보다 크기의 차이로 거리를 만들었다.
뒤편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의 수직 구조가 있다. 건물이나 도시 시설을 연상시키지만 세부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몇 개의 직선과 색면만으로 인공적인 공간의 흔적을 남겼다. 소녀와 말의 유기적인 윤곽 옆에 직선 구조가 들어오면서 자연과 도시, 생명체와 인공물이 한 작품 안에서 만난다.
이제 쉬가예프의 공간은 특정 장소를 충실하게 기록하는 풍경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햇빛 비친 집’에서는 산과 집, 말의 위치가 하나의 실제 풍경으로 이어졌다. ‘림마’에서는 실내의 가구와 생활용품이 한 사람의 생활환경을 만들었다. ‘해가 진다’에서는 비탈과 하늘이라는 자연 공간 안에 아이와 동물이 떨어져 있었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 이르면 형상들이 현실의 장소보다 조형적인 관계에 따라 배치되기 시작한다.
소녀가 어디에 서 있는지보다 소녀의 양손에 무엇이 놓였는지, 말이 얼마나 큰 색면을 이루는지, 멀어지는 인물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작품의 수직과 수평도 이를 뒷받침한다. 소녀의 몸은 중앙에서 위로 솟는다. 두 팔은 좌우로 벌어지고 말의 몸은 작품 하단을 수평으로 가로지른다. 말의 머리는 아래로 떨어지고 오른쪽 인물은 작품 밖으로 이동한다. 여러 방향의 움직임이 하나의 중심에 고정되지 않는다.
쉬가예프의 선도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형상을 분해한다. 말의 몸에는 굵은 곡선과 짧은 해칭이 반복되고, 소녀의 옷에는 사선이 교차한다. 머리카락과 머리 장식에서는 길고 짧은 선이 규칙적으로 이어진다. 비둘기의 깃털은 가느다란 선으로 퍼진다.
같은 선이 모든 대상을 같은 방식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머리카락에서는 흐름을 만들고, 옷에서는 질감을 만들며, 말의 몸에서는 부피와 방향을 만든다. 비둘기에서는 깃털의 가벼움을 만든다. 현실의 외형을 따라가는 선이면서 동시에 작품 전체에 리듬을 배치하는 선이다.
소녀의 얼굴도 ‘아산바이 아타’와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아산바이 아타’에서는 주름과 수염, 눈과 귀의 구체적인 특징이 한 개인의 얼굴을 만드는 데 집중됐다. ‘비둘기를 든 소녀’의 얼굴은 훨씬 간결하다. 옆모습은 몇 개의 강한 윤곽으로 정리되고 머리 장식과 머리카락의 패턴이 얼굴만큼 큰 비중을 갖는다.
개인의 세부가 줄어들면서 인물은 특정한 한 사람인 동시에 더 넓은 형상으로 이동할 가능성을 얻는다.
이 변화는 쉬가예프의 이후 작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후기 회화에서 여성과 환상적인 동물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인물과 동물이 각자 독립된 주인공으로 서기보다 서로 만나고 마주하며 관계를 만든다. 전통 문양과 여러 기호도 작품 안으로 들어와 현실과 신화의 경계를 느슨하게 한다.
‘비둘기를 든 소녀’를 완성된 신화적 회화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소녀와 말, 비둘기는 여전히 알아볼 수 있는 현실의 형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아산바이 아타’처럼 개별 인물의 얼굴을 깊이 파고들거나 ‘림마’처럼 구체적인 생활공간을 촘촘하게 기록하는 방식에서는 분명히 멀어졌다.
현실의 대상은 남아 있지만 현실의 질서가 달라진다.
바로 이 변화가 1986년의 작품을 중요하게 만든다. 쉬가예프가 이후 사실적인 재현의 한계를 넘어 추상과 연상, 신화적 이미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형상을 배열하는 방식 자체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녀와 비둘기의 관계도 섣불리 평화나 자유의 상징으로 고정할 필요가 없다. 비둘기는 오랜 미술사에서 다양한 상징을 지녔지만, 작품만으로 쉬가예프가 특정 의미를 의도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부족하다. 오히려 한 손 위에 살아 있는 새를 올려놓고 다른 손에는 둥근 형상을 배치한 구성이 작품 내부에서 어떤 균형을 만드는지 보는 편이 중요하다.
말 역시 유목문화의 상징이라는 익숙한 해석만으로 읽으면 작품의 조형적 긴장이 줄어든다. 말은 거대한 청색 덩어리로 작품 아래쪽을 점유하고 소녀의 몸을 가른다. 머리를 낮춘 자세는 위로 뻗은 소녀의 몸과 반대 방향을 만든다. 상징이기 전에 작품의 구조를 바꾸는 형상이다.
쉬가예프가 훗날 신화와 전통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비슷한 태도가 깊어진다. 오래된 기호를 단순히 설명하거나 재현하기보다 현대적인 선과 색, 서로 다른 형상의 충돌 속에 다시 놓는다.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서로 다른 체계를 한 작품 안에서 부딪치게 한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그런 조형적 사고가 아직 현실적인 인물과 동물의 모습 속에 남아 있다.
작품 위쪽의 소녀는 정지해 있다. 비둘기도 손 위에 머문다. 아래쪽의 말은 머리를 숙였고 오른쪽 인물은 작품 밖으로 걸어간다. 정지와 이동이 동시에 일어난다. 한 인물의 행동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고 서로 다른 상태가 한 공간에 겹친다.
그래서 작품은 쉽게 한 문장의 이야기로 닫히지 않는다.
소녀는 왜 비둘기를 들고 있는지, 다른 손의 둥근 형상이 무엇인지, 말과 오른쪽 인물이 어떤 관계인지 작품은 설명하지 않는다. 서사의 연결고리를 줄인 자리에 색과 선, 크기와 방향의 관계가 들어온다.
쉬가예프의 초기 작업을 따라가면 변화는 점차 분명해진다. 사람과 생활을 관찰하던 눈은 사물을 선택하고 압축하는 단계로 나아갔고, 넓은 색면과 여백을 통해 현실의 공간을 다시 구성했다. 1986년의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서로 다른 형상들을 현실의 인과관계보다 조형적인 질서 안에 놓는다.
훗날 쉬가예프의 작품을 채우게 되는 신화적 동물과 여성, 전통의 기호는 바로 이런 변화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실의 외형을 버린 뒤 갑자기 신화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과 동물을 오래 관찰하고, 형태를 줄이고, 위치를 바꾸고, 서로의 관계를 다시 구성하는 과정이 먼저 있었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 중요한 것은 비둘기 하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다. 소녀와 비둘기, 말과 멀어지는 인물이 왜 한 작품 안에서 이토록 다른 크기와 방향을 갖는지를 보는 일이다.
1986년의 쉬가예프는 현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자리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사람과 동물은 여전히 구체적인 모습을 지녔지만 서로를 연결하는 방식은 이미 현실의 풍경보다 자유로워졌다. 소녀의 펼친 두 팔, 손 위의 새, 작품을 가로지르는 푸른 말,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인물이 한 공간에 겹치면서 이전 작품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낯선 질서가 만들어진다.
‘비둘기를 든 소녀’는 그 변화가 선명해지는 작품이다. 관찰에서 출발한 쉬가예프의 형상이 현실의 경계를 조금씩 벗어나고, 사람과 동물이 관계를 통해 의미를 얻는 세계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후 신화와 원형,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조형언어로 묶어내게 될 쉬가예프의 예술이 이 작품에서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