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 ‘디레다우의 거리 I’, 붉은 하늘 아래 이어지는 삶

시장의 천막과 흙길, 세 여성으로 구성한 1980년대 거리 풍경…에티오피아에서 마주한 현실이 강렬한 색채와 인물의 관계로 재구성된 색채 리놀륨 판화

2026-10-15     박준식 기자

[KtN 박준식기자]짙은 붉은 하늘 아래 낮은 건물과 천막이 이어진다. 흙길에는 세 여성이 서로 다른 자세로 자리한다. 한 여성은 머리에 짐을 이고 오른쪽으로 향하고, 가운데 여성은 서서 앞으로 걸어간다.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여성은 바닥 가까이 몸을 낮췄다. 왼쪽 천막 아래에는 물건이 놓여 있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디레다우의 거리 I(Street in Dyre-Dau I)’은 거리에서 마주한 사람과 건물, 시장의 구조를 강렬한 색면으로 다시 짠 작품이다.

쉬가예프는 1980년대 중반 에티오피아에서 생활하며 현지의 사람과 풍경을 드로잉과 수채, 색채 리놀륨 판화로 남겼다. 키르기스의 산과 마을, 가족과 생활공간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던 초기 작업의 시선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시기다. 그러나 장소만 달라진 것은 아니다. ‘디레다우의 거리 I’에서는 현실을 기록하는 선 위로 색채가 강하게 올라오고, 개별 인물보다 사람들이 놓인 거리 전체의 구조가 중요해진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 ‘디레다우의 거리 I(Street in Dyre-Dau I)’, 색채 리놀륨 판화, 40×50㎝. 러시아 소장.

 

작품을 지배하는 색은 붉은색이다. 하늘 전체를 채운 짙은 적색은 자연스러운 하늘빛과 거리가 멀다. 일몰의 붉은 하늘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기보다 넓은 색면 하나를 작품 상단에 펼쳐 놓았다. 그 아래 흰 지붕과 노란 벽, 청색 띠가 차례로 놓이면서 거리의 공간이 층층이 갈린다.

‘해가 진다’에서 하늘은 옅은 청색에서 흰빛으로 빠져나가는 넓은 여백이었다. ‘디레다우의 거리 I’의 하늘은 반대로 밀도가 높다. 붉은색이 작품 위쪽을 단단하게 누른다. 풍경을 감싸는 배경이라기보다 작품의 정서를 결정하는 거대한 색면에 가깝다.

지붕의 흰색은 붉은 하늘과 직접 맞닿는다. 검붉은 건물의 측면과 노란 벽, 청색의 좁은 띠까지 색의 경계가 분명하다. 건축물은 세밀한 입체 묘사보다 색으로 구획된다. 지붕은 흰 면, 벽은 노란 면, 그늘은 짙은 적색과 녹색으로 나뉜다.

거리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아래쪽 흙길에는 갈색과 적갈색이 넓게 깔리고 짧은 선들이 수평으로 흩어진다. 선은 흙의 질감을 만들지만 모든 표면을 채우지는 않는다. 넓은 색면 위에 필요한 만큼의 흔적만 남겼다.

현실을 관찰하면서도 현실의 고유색에 묶이지 않는 변화가 선명하다.

쉬가예프의 초기 판화에서 색은 점차 대상을 설명하는 기능을 넘어 작품의 구조를 만드는 요소로 이동했다. ‘햇빛 비친 집’에서는 푸른 산과 흰 집, 붉은 지붕이 풍경의 깊이를 나눴고, ‘해가 진다’에서는 푸른 비탈과 넓은 하늘이 아이와 동물 사이의 거리를 만들었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청색의 말과 밝은 인물이 현실적인 공간감보다 형상 사이의 관계를 앞세웠다.

‘디레다우의 거리 I’에서는 색채의 독립성이 더욱 강하다. 붉은 하늘과 노란 건물, 녹색과 청색의 그늘이 실제 거리의 빛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작품 전체의 질서를 결정한다. 색이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을 다시 구성한다.

세 여성의 배치에서도 쉬가예프의 변화가 읽힌다.

오른쪽 여성은 작품 가장자리 가까이에 서 있다. 머리에는 넓은 그릇이나 바구니를 이고 있으며 몸은 긴 옷으로 감싸여 있다. 얼굴의 세부는 거의 없다. 인물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윤곽과 자세만 남았다.

몸은 길게 늘어난 수직형이다. 머리 위의 짐까지 더해지면서 작품 오른쪽에 강한 세로축을 만든다. 뒤쪽 건물의 수직선과도 겹친다. 인물은 거리의 한 사람인 동시에 구도를 세우는 긴 형상이 된다.

가운데를 걷는 여성은 반대 방향의 움직임을 만든다. 머리에 무언가를 얹고 긴 옷을 입은 채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옷을 가로지르는 붉은색과 노란색 선이 몸의 방향을 따라 흐른다. 발은 지면에 닿아 있지만 자세에는 이동감이 남아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검은 옷의 여성이 낮게 앉아 있다. 앞의 두 인물이 수직으로 길게 서 있는 데 비해 몸을 삼각형에 가까운 덩어리로 접었다. 얼굴은 짙은 색 안에 작게 들어가고 손과 발의 세부도 거의 사라진다.

서 있는 인물, 걷는 인물, 앉은 인물.

세 여성의 자세가 달라지면서 거리에는 별도의 사건 없이도 움직임이 생긴다. 쉬가예프는 누구를 중심인물로 내세우지 않는다. 인물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를 바라보거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각자 다른 방향과 자세를 유지한다.

왼쪽의 천막과 가판 공간은 세 인물과 또 다른 리듬을 만든다. 커다란 흰 천이 건물 앞을 덮고 있고 아래에는 여러 물건이 놓여 있다. 천의 가장자리는 직선으로 떨어지지 않고 불규칙하게 꺾인다. 그 아래 어두운 공간에서는 상자와 진열대, 물건의 윤곽이 서로 겹친다.

천막의 흰색은 작품에서 상당히 큰 면적을 차지한다. 붉은 하늘과 노란 벽 사이에 들어간 흰색이 강한 밝기를 만들면서 시선을 왼쪽으로 끌어당긴다. 오른쪽에는 세 사람이 있고 왼쪽에는 큰 천막이 있다. 인물의 수와 크기로 균형을 맞추지 않고 색면의 무게로 좌우를 조절했다.

쉬가예프가 거리를 바라보는 방식은 건축물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데 집중되지 않는다. 건물의 창문과 문, 지붕과 기둥은 필요한 부분만 남았다. 어떤 부분은 선으로 세밀하게 새겼고 어떤 부분은 하나의 색면으로 묶었다. 실제 거리에서 받아들인 수많은 정보를 선택하고 압축한 결과다.

이 선택은 사람을 그리는 방식에서도 반복된다.

1984년 ‘아산바이 아타’에서는 노인의 주름과 수염, 눈과 귀를 가까이 들여다봤다. 한 사람의 얼굴에 수많은 선을 집중시켰다. ‘디레다우의 거리 I’에서는 얼굴이 거의 사라진다.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표정보다 자세와 옷, 움직임이다.

개별 인물의 생김새를 줄인 대신 거리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해졌다. 쉬가예프의 관심이 초상적인 관찰에서 형상 사이의 관계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변화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익명의 장식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머리에 짐을 이고 걷는 여성, 바닥 가까이 앉은 여성, 가판대 주변에 놓인 물건들은 이 거리가 실제 생활의 공간임을 붙잡는다. 추상적인 색면으로 공간을 강하게 바꾸면서도 생활의 구체성은 놓치지 않는다.

바로 그 긴장이 작품을 지탱한다.

한쪽에는 현실의 관찰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현실에서 자유로워진 색채가 있다. 사람과 시장, 건물과 흙길은 구체적이다. 그러나 붉은 하늘과 노란 벽, 청색과 녹색의 그림자는 자연스러운 시각 경험에서 벗어난다. 현실을 알아볼 수 있는 형상과 현실을 변형하는 색이 한 작품 안에서 충돌한다.

쉬가예프가 이후 보여주는 조형세계에서도 서로 다른 체계를 한 작품 안에 두는 방식은 중요해진다. 구상과 추상, 전통적 형상과 현대적인 조형언어, 현실의 인간과 신화적 동물이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합쳐지지 않은 채 공존한다.

‘디레다우의 거리 I’에는 아직 후기의 신화적 동물이나 세계산, 생명나무와 같은 기호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은 분명 거리의 현실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현실을 재구성하는 방식은 이전보다 과감해졌다.

특히 하늘의 붉은색은 장소의 실제 모습을 설명하는 기능을 거의 내려놓는다. 하늘이 붉다는 사실보다 작품 상단 전체를 하나의 강한 색으로 닫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아래쪽의 갈색 흙길과 붉은 하늘이 위아래에서 작품을 감싸고, 그 사이에 노란 건물과 흰 천막, 세 여성이 들어간다.

색채가 하나의 건축처럼 작동한다.

흰 천막은 밝은 덩어리가 되고, 노란 벽은 넓은 직사각형이 된다. 여성의 긴 옷은 수직의 형태로 서고, 앉은 여성의 검은 옷은 삼각형에 가까운 덩어리로 굳어진다. 거리의 실제 대상들이 하나씩 기하학적인 역할을 얻는다.

쉬가예프는 현실의 대상을 지우지 않으면서 조형요소로 바꾸고 있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도 같은 변화가 나타났다. 소녀와 말, 비둘기와 멀어지는 인물이 현실적인 크기와 거리보다 조형적인 균형에 따라 놓였다. ‘디레다우의 거리 I’에서는 한 인물과 동물의 관계에서 벗어나 도시의 한 구역 전체가 같은 방식으로 재편된다.

사람과 건축물의 크기도 완벽한 원근법을 따르지 않는다. 오른쪽 여성은 작품 가장자리에서 크게 서 있고 중앙의 여성은 그보다 작다. 건물과 천막 역시 실제 거리의 깊이를 정확하게 계산하기보다 색면을 겹치는 방식으로 공간을 만든다.

평면성이 강해질수록 작품은 현실의 한순간을 찍어낸 기록에서 멀어진다. 대신 쉬가예프가 기억하고 선택한 거리의 요소들이 새로운 질서로 재배치된다.

에티오피아에서의 작업을 단순한 이국적 풍경의 기록으로 읽지 않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쉬가예프는 낯선 지역의 복식이나 시장을 장식적으로 나열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거리에서 본 사람과 건축, 천막과 색을 자신의 판화 언어 안에서 다시 조직했다.

인물들의 얼굴을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선택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세 여성의 차이는 피부나 표정의 묘사보다 몸의 방향과 옷의 형태, 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나타난다. 인물을 유형화했다고 단정하기보다 쉬가예프의 관심이 개별 초상에서 거리 전체의 관계로 옮겨갔다고 보는 편이 작품에 가깝다.

작품 하단의 흙길에는 수많은 짧은 선이 흐른다. 사람들의 발밑을 따라 수평에 가까운 선이 반복되면서 이동의 방향을 만든다. 건물에서는 수직과 수평이 강하고, 인물의 옷에서는 곡선과 사선이 많다. 서로 다른 선의 체계가 공간마다 구분된다.

하늘에는 선이 거의 없다.

위쪽을 비우고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선을 늘린 구성은 시선을 자연스럽게 거리로 끌어내린다. 붉은 하늘을 지나 흰 지붕과 노란 벽을 보고, 다시 인물과 흙길로 내려오면서 작품의 밀도가 높아진다.

‘해가 진다’에서 넓은 하늘과 푸른 비탈을 이용해 아이와 동물 사이의 거리를 만들었던 방식이 다른 장소에서 다시 변형된 셈이다. 이번에는 여백보다 색채의 충돌이 더 강하다.

쉬가예프의 1980년대 작업을 이어서 보면 현실과 조형 사이의 이동이 점차 선명해진다. ‘림마’에서는 생활공간을 세밀하게 관찰했고, ‘아산바이 아타’에서는 얼굴에 시간을 새겼다. ‘해가 진다’에서는 풍경의 정보를 크게 덜어냈고,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서로 다른 형상을 현실의 인과관계에서 풀어놓기 시작했다.

‘디레다우의 거리 I’에서는 거리 전체가 색과 형태의 구조로 바뀐다.

이후 쉬가예프의 작업에서 신화와 원형, 전통의 기호가 중요해지는 과정은 이런 변화와 떨어져 있지 않다. 신화를 그리기 위해 현실을 버린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하는 방법이 점차 자유로워졌다. 눈앞의 대상에서 출발하되 고유색과 실제 비례, 자연스러운 원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형상이 더 많은 의미를 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디레다우의 거리 I’에서 아직 중심은 현실의 사람들이다. 시장의 천막이 있고 건물이 있으며 세 여성이 각자의 위치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작품을 지배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다. 붉은 하늘과 노란 벽, 흰 천막과 짙은 옷이 만드는 색의 관계다.

거리의 하루는 그렇게 색채의 질서로 바뀐다.

쉬가예프는 에티오피아에서 마주한 풍경을 자신의 시선 밖에 있는 낯선 세계로 밀어내지 않았다. 사람이 걷고, 앉고, 물건을 나르는 일상의 움직임을 바라봤다. 동시에 관찰한 현실을 강렬한 색과 단순화된 형태로 다시 구성했다.

붉은 하늘 아래 세 여성은 서로 말을 건네지 않는다. 한 사람은 걷고, 한 사람은 앉아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머리에 짐을 인 채 서 있다. 뒤에서는 시장의 천막과 건물이 길게 이어진다. 별다른 사건 없이 각자의 시간이 흐른다.

‘디레다우의 거리 I’에서 쉬가예프가 붙잡은 것은 거리의 특정 사건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의 리듬이다. 실제 생활에서 출발한 관찰은 색과 선을 거치며 현실의 복사본에서 멀어진다. 이후 쉬가예프가 인간과 동물, 자연과 신화를 자유롭게 만나게 할 수 있었던 조형적 공간도 이런 변화 속에서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