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 ‘2005년 3월 24일’, 기억을 찢고 붙여 다시 세운 시간
구겨진 종이와 색면, 사진 조각을 겹친 2006년 혼합매체…구상과 추상을 오가던 쉬가예프가 특정한 날짜를 물질의 흔적으로 바꾼 작업
[KtN 박준식기자]갈색과 청색, 분홍색과 회색의 종이가 서로 맞물린다. 한쪽에는 흰색의 둥근 형상이 걸려 있고, 중앙을 가르는 밝은 세로 띠는 위아래를 관통한다. 아래쪽에는 인쇄된 사진과 문자의 파편이 끼어 있다. 종이는 구겨졌고 가장자리는 반듯하지 않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2006년작 ‘2005년 3월 24일(The 24th March, 2005)’은 한 해 전의 날짜를 제목으로 삼았지만, 특정 사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날짜를 설명하는 인물이나 장소 대신 찢고 구기고 붙인 종이와 색, 이미지의 파편이 작품 전면을 채운다.
쉬가예프의 1980년대 작업에서 현실은 사람과 풍경의 모습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림마’에서는 한 여성의 생활공간을 연필로 좇았고, ‘아산바이 아타’에서는 노인의 얼굴에 쌓인 시간을 선으로 새겼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사람과 동물의 관계가 현실의 공간에서 조금씩 풀려났고, ‘지진’에서는 형상을 지탱하던 윤곽까지 뒤흔들렸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작품을 만드는 재료와 방식은 더 넓어졌다. 사진과 인쇄물, 구겨진 종이와 물감이 한 작품에 겹치고, 현실은 완성된 형상보다 남겨진 흔적과 파편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색보다 종이의 상태다. 표면 전체에 촘촘한 구김이 남아 있다. 갈색과 청색, 분홍색과 흰색은 매끈하게 칠한 색면처럼 보이지 않는다. 접히고 눌린 흔적을 그대로 품는다. 색의 경계 역시 자로 그은 직선처럼 정돈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종이가 이어진 듯한 불규칙한 가장자리와 겹침이 작품의 구조를 만든다.
상단은 갈색과 청색이 크게 양분한다. 왼쪽의 갈색은 흙이나 오래된 종이를 떠올리게 하는 무거운 색이고, 오른쪽의 청색은 넓고 비교적 단순한 면으로 펼쳐진다. 두 색은 작품 상단을 크게 차지하지만 아래로 내려오면서 더 작은 색면으로 잘게 갈라진다. 분홍색과 회색, 짙은 청색, 녹색, 흰색이 서로 다른 크기의 조각처럼 이어진다. 위쪽의 큰 면에서 아래쪽의 복잡한 분절로 내려가는 구조다.
왼쪽 상단의 흰 형상은 작품 안에서 특히 강한 시각적 무게를 갖는다. 둥글게 휜 큰 흰 면과 왼쪽으로 돌출된 부분이 하나의 형상을 만들지만 구체적인 대상을 완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검은색의 작은 틈과 표면을 가르는 선이 들어가면서 하나의 기호처럼 남는다. 쉬가예프의 후기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기호적 형상과 맞닿는 대목이다.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기보다 몇 개의 면과 선으로 압축하고, 주변의 다른 색면과 관계를 맺도록 한다.
중앙을 위아래로 관통하는 밝은 세로 형태는 작품을 두 부분으로 가르는 동시에 서로 다른 조각을 연결한다. 위쪽에서는 흰색과 회색에 가까운 형태로 시작하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분홍빛과 갈색을 띤다. 일정한 폭으로 곧게 떨어지지 않고 중간마다 굵기가 달라진다. 왼쪽과 오른쪽에 흩어진 색면들이 이 세로축을 중심으로 맞물리면서, 파편적으로 보이는 구성이 완전히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는다.
수평의 구조도 강하다. 작품 중간에는 청록색과 노란색, 갈색의 좁은 띠가 이어지고, 그 아래에는 사진과 인쇄물 조각이 배치돼 있다. 세로로 내려오는 밝은 형태와 수평 띠가 교차하면서 작품 중앙에 일종의 골격을 만든다. 색면은 불규칙하고 종이는 구겨져 있지만 전체 구도에는 수직과 수평의 질서가 남아 있다.
‘2005년 3월 24일’은 그래서 무질서하게 찢어 붙인 콜라주와 다르다. 쉬가예프는 파편을 사용하면서도 파편 사이의 관계를 치밀하게 조정한다. 큰 색면과 작은 색면,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수직과 수평을 맞물리게 한다. 각각의 조각은 완전한 형태를 갖지 않지만 작품 전체에서는 서로를 밀고 당기며 균형을 만든다.
하단 가까이에 들어간 사진과 인쇄물은 작품의 시간을 현실 쪽으로 끌어당긴다. 인쇄된 얼굴과 문자, 작은 이미지들이 조각난 상태로 들어가 있다. 하나의 사진이나 문서가 온전히 제시되는 방식이 아니라 일부만 남는다. 색종이와 회화적 흔적 사이에 현실에서 가져온 이미지의 파편이 끼어드는 구성이다.
바로 앞선 2004년 ‘캐나다 여성의 여권’과 연결되는 변화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캐나다 여성의 여권’에서는 여성의 증명사진이 작품 중앙에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직사각형 사진을 노란 선과 물감이 가로지르면서 규격화된 이미지와 회화적 흔적이 충돌했다. ‘2005년 3월 24일’에서는 사진의 지위가 더 낮아진다. 사진은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고 여러 재료 가운데 하나로 들어간다. 얼굴과 문자는 잘린 채 색면 사이에 끼어 있으며 종이와 물감, 구김과 겹침이 사진보다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쉬가예프가 현실의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한 사람의 얼굴을 보여준 뒤 그 경계를 흔드는 단계에서, 이미지 자체를 잘게 나누어 새로운 구조의 일부로 편입하는 단계로 이동한다. 사진은 더 이상 작품을 설명하는 중심 이미지가 아니다. 다른 색면과 마찬가지로 잘리고 겹쳐지며 전체 구성에 들어간다.
제목은 이 추상적인 구조에 구체적인 시간을 부여한다. ‘2005년 3월 24일’이라는 날짜는 연도와 월, 일까지 특정한다. 반면 작품 안에서는 날짜를 달력이나 숫자로 크게 제시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시간과 파편적인 이미지 사이의 간격이 생긴다. 제목은 정확한 하루를 가리키지만 작품은 그 하루를 하나의 완결된 광경으로 복원하지 않는다.
쉬가예프가 선택한 것은 재현보다 축적에 가깝다. 구겨진 종이, 서로 다른 색, 사진과 인쇄물, 잘린 가장자리와 겹쳐진 면이 한 날짜 주변에 모인다. 기억이 과거의 순간을 사진처럼 온전하게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흔적을 남긴다는 점과 작품의 물질적 구조가 맞닿는다. 날짜는 정확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이미지는 완전하지 않다.
2004년 ‘캐나다 여성의 여권’에서 직사각형 사진과 불규칙한 물감의 충돌이 중요했다면 ‘2005년 3월 24일’에서는 규격화된 직사각형 자체가 여러 조각으로 확산된다. 작품 곳곳에 사각형에 가까운 색면이 있지만 어느 것도 완벽하게 반듯하지 않다. 청색과 분홍색, 회색과 녹색의 면들은 찌그러지고 구겨진 종이의 표면을 따라 형태가 흔들린다.
기하학적 질서와 손의 흔적이 동시에 남는다. 직선과 사각형을 이용해 구조를 세우면서도 표면은 매끈하게 정리하지 않는다. 쉬가예프는 완벽한 기하학적 추상으로 가지 않고, 물질이 가진 불규칙성을 작품 안에 그대로 둔다. 질서를 만들되 흔적을 지우지 않는 방식이다.
종이의 가장자리에서도 같은 성격이 나타난다. 작품 외곽은 반듯한 사각형이 아니다. 찢기고 닳은 듯한 윤곽이 그대로 드러난다. 상단과 오른쪽, 아래쪽의 가장자리는 작은 굴곡을 반복하며 흰 배경과 맞닿는다. 작품 내부의 색면이 부분적으로 사각형의 구조를 만들수록 외곽의 불규칙한 형태는 더 두드러진다.
쉬가예프의 초기 판화에서는 종이가 이미지를 담는 바탕이었다. ‘아산바이 아타’나 ‘비둘기를 든 소녀’, ‘지진’에서 관람자의 시선은 판에 새겨진 형상과 선으로 향했다. 2006년 작품에서는 종이 자체가 형상이 된다. 구김과 두께, 찢어진 경계와 겹친 흔적을 숨기지 않으면서 재료의 물성이 이미지와 같은 비중을 얻는다.
1987년 ‘지진’과의 거리는 멀어 보이지만 작업의 한 축은 이어진다. ‘지진’에서 쉬가예프는 선을 이용해 안정된 형상을 해체했다. 얼굴과 동물이 검은 선 사이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2005년 3월 24일’에서는 해체의 대상이 형상에 머물지 않는다. 사진과 종이, 색면까지 분절되고 다시 결합한다. 선으로 이미지를 흔들었던 작가가 이제 이미지와 재료 자체를 잘라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1988년 ‘절규’에서 인간의 몸을 압박했던 강한 흑백 대비도 사라졌다. 대신 갈색과 청색, 분홍색과 회색, 녹색과 흰색이 낮고 탁한 농도로 맞물린다. 색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폭발시키기보다 서로 다른 층을 만든다. 어떤 색은 다른 종이 위에 얹힌 듯하고, 어떤 색은 구김 사이로 스며든다. 작품을 한 번에 읽기보다 여러 층을 차례로 더듬게 한다.
쉬가예프의 후기 작업에서 신화와 원형, 전통의 기호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2005년 3월 24일’은 신화적 도상만으로 그의 작업을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현실의 사진과 인쇄물, 종이의 물질성, 추상적인 색면이 같은 작품에서 만난다. 오래된 기호와 현대적인 이미지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 서로 다른 성격의 요소를 한 공간에 놓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태도가 이어진다.
초기 작업에서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다뤘던 방식도 형태를 달리해 남아 있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소녀와 말, 비둘기의 위치와 방향이 작품의 긴장을 만들었다. 후기에는 관계를 이루는 대상이 사람이거나 동물일 필요가 없다. 사진과 색면, 찢어진 종이와 인쇄문자, 수직과 수평의 조각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 쉬가예프의 관심이 구체적인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 이미지와 재료 사이의 관계까지 넓어진 셈이다.
작품에 남아 있는 금빛과 노란색의 가는 흔적도 눈에 띈다. 넓은 색면 위를 세로로 흐르거나 작은 점처럼 흩어지면서 서로 떨어진 영역을 잇는다. 2004년 ‘캐나다 여성의 여권’에서 노란 선이 사진의 경계를 넘어 종이 전체를 연결했던 방식과 닮았다. 다만 이번에는 선보다 종이의 겹침과 색면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선은 구조를 지배하기보다 이미 만들어진 여러 층 사이를 통과한다.
작품 하단에는 작가의 서명이 남아 있다. 그 위와 주변에도 작은 색면이 촘촘하게 이어진다. 상단에서 크게 나뉘었던 갈색과 청색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수많은 작은 조각으로 분산된다. 하나의 큰 구조가 점차 파편화되는 흐름과, 흩어진 조각을 중앙의 수직축이 다시 묶는 흐름이 동시에 나타난다.
제목의 날짜와 작품의 형식 사이에서도 비슷한 긴장이 생긴다. 날짜는 시간을 하나의 점으로 고정한다. 2005년 3월 24일이라는 표기는 다른 날과 명확하게 구별되는 하루를 지목한다. 반면 작품의 표면은 고정된 한순간과 거리가 멀다. 구겨지고 붙고 겹쳐진 흔적에는 여러 차례의 손길과 서로 다른 재료의 시간이 함께 남는다.
한 날짜와 여러 시간이 한 작품에서 만난다.
쉬가예프가 1980년대 한 사람의 얼굴에 시간을 새겼던 방식과 비교하면 변화는 더욱 크다. ‘아산바이 아타’에서 시간은 노인의 주름과 수염에 있었다. 인간의 몸에 축적된 세월을 선으로 기록했다. ‘2005년 3월 24일’에서는 시간이 신체에서 빠져나와 종이의 표면으로 옮겨간다. 접힌 자국과 찢어진 가장자리, 사진과 인쇄물의 파편이 서로 다른 시간의 흔적을 만든다.
초상과 풍경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던 쉬가예프의 작업은 결국 현실을 구성하는 이미지와 물질 자체를 다루는 곳까지 확장됐다.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선, 산과 집을 나누는 색면, ‘지진’에서 형상을 파괴했던 검은 선, ‘캐나다 여성의 여권’에서 사진을 가로질렀던 물감은 2006년 작품에서 구겨진 종이와 잘린 이미지, 겹쳐진 색면으로 바뀐다.
‘2005년 3월 24일’은 한 사건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방식보다 한 날짜가 남긴 흔적을 어떻게 작품의 구조로 바꿀 것인가에 집중한다. 정확한 날짜는 제목에 남고 작품에서는 완전한 서사가 사라진다. 사진은 잘리고 문자는 끊기며 색면은 서로 겹친다. 종이마저 구겨진 상태로 작품의 일부가 된다.
쉬가예프는 기억을 깨끗한 이미지로 복원하지 않는다. 파편을 다시 완전한 모습으로 돌려놓지도 않는다. 갈라진 색면과 사진 조각, 구겨진 종이를 그대로 남겨둔 채 서로 다른 시간을 한 표면에 붙인다. ‘2005년 3월 24일’에서 날짜는 과거를 설명하는 표제가 아니라 작품 전체를 묶는 시간의 좌표가 된다. 한때 현실의 사람과 풍경을 판 위에 새겼던 쉬가예프는 이제 기억이 남긴 조각과 물질을 다시 세우며, 현실을 바라보는 자신의 조형언어를 또 다른 단계로 넓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