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나비킴 김현정 ‘무한 8’…‘0’에서 ‘∞’로, 빛이 바꾸는 나비의 형상
평면 회화와 LED 아크릴 구조를 좌우에 배치…안료의 색과 실제 빛이 한 작품에서 교차 점등·점멸 따라 원에서 무한대로 이어지는 형태…생성과 비상을 시간 속에서 풀어낸 2013년작
[KtN 박준식기자]나비킴(Navikim·김현정) 작가의 2013년작 ‘무한 8(Infinity 8)’은 한 작품 안에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빛을 놓는다. 한쪽에는 붓과 안료로 만든 평면 회화가 자리하고, 다른 쪽에는 LED 광원을 품은 입체 아크릴 구조가 놓인다. 물감으로 만들어진 색과 실제 광원이 만들어내는 색이 좌우에서 마주하면서 작품은 고정된 하나의 상태보다 계속 변하는 관계를 만들어낸다.
작품의 좌우 분할은 단순한 형식적 구분보다 서로 다른 색의 성질을 드러내는 장치에 가깝다. 평면 회화의 색은 캔버스와 안료 위에 머문다. 붓질과 색층은 한 번 완성된 뒤 물리적인 형태를 유지한다. LED가 들어간 아크릴 구조의 색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광원이 켜지고 밝기가 변하면서 색도 함께 움직인다. 한쪽에는 고정된 색이, 다른 쪽에는 변화하는 빛의 색이 자리한다.
김현정 작가는 두 영역을 나누면서도 하나의 형태로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LED가 점등된 상태에서는 오른쪽의 원형이 ‘0’에 가까운 형태로 읽힌다. 빛의 상태가 변하면 오른쪽 원과 왼쪽의 타원이 서로 연결되면서 가로로 누운 무한대(∞)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빛의 변화가 색만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전체의 형태를 다시 읽게 하는 것이다.
‘0’과 ‘∞’ 사이에는 김현정 작가가 앞선 작업에서 이어온 생명과 순환의 사유가 놓여 있다. ‘제로’ 연작에서 타원은 알과 생명의 시작,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을 품은 형태였다. ‘무한 1’에서는 수직 타원의 내부를 넓게 비우면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무한 8’에서는 타원과 원이 빛의 상태에 따라 서로 연결되며 무한대의 형태까지 확장된다.
하나의 기호가 다른 기호로 넘어가는 과정이 작품의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관람자는 완성된 ‘0’과 ‘∞’를 동시에 보는 대신 LED가 켜지고 색이 달라지는 동안 형태가 이동하는 과정을 경험한다. 작품의 의미가 하나의 순간에 고정되기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성된다.
여기에 나비가 들어오면서 기호의 변화는 생명체의 움직임과 연결된다. 원은 알의 형태와 겹치고, 두 개의 타원이 이어지면 무한대가 되며, 다시 두 타원은 나비의 좌우 날개를 연상시킨다. ‘0-무한대-나비’가 서로 떨어진 세 개의 이미지로 놓이기보다 하나의 형태가 단계적으로 다른 의미를 얻는다.
알에서 시작된 형태가 열리고, 두 개의 원이 연결되고, 그 구조가 날개가 되는 흐름이다. 생성과 순환, 비상이라는 김현정 작가의 주제가 기호와 실제 빛의 움직임을 통해 한 작품 안에서 이어진다.
2012년 ‘무한 1’과 비교하면 변화가 선명하다. ‘무한 1’에서는 수직 타원의 내부를 비우고 색과 형상을 주변으로 보내면서 여백 자체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뤘다. 움직임은 조용했고 변화는 비워진 공간 안에서 잠재돼 있었다.
‘무한 8’에서는 그 잠재성이 실제 움직임으로 나온다. 원과 타원은 빛의 점등과 점멸에 따라 다른 관계를 만들고, LED 색이 순차적으로 변하면서 같은 구조도 계속 다른 인상을 갖는다. 비움 속에 머물던 가능성이 시간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단계로 이동한 것이다.
2012년 ‘무한 7’과의 차이도 있다. ‘무한 7’에서는 다섯 마리의 나비가 산을 향해 비상하고, 나비 부조 안의 LED가 심장박동처럼 점멸하며 생명의 리듬을 만들었다. 실제 광원이 나비의 몸 안에 들어오면서 정지된 회화에 시간과 운동을 더한 작품이었다.
‘무한 8’에서는 LED의 역할이 한 단계 더 복잡해진다. 빛이 나비를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작품의 형태와 상징 자체를 바꾼다. 빛이 들어왔을 때 ‘0’이 나타나고, 다른 상태에서는 좌우 구조가 연결돼 무한대를 형성하며, 타원의 결합은 나비의 날개로 이어진다. 광원이 조형의 분위기를 만드는 재료에서 형태를 변환시키는 장치로 확장된 것이다.
평면과 입체를 좌우에 함께 배치한 구성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왼쪽의 평면 회화에는 붓의 흔적과 안료가 남고, 오른쪽에는 돌출된 아크릴 구조와 실제 빛이 있다. 회화와 부조, 안료와 광원, 고정된 이미지와 변화하는 이미지가 한 작품 안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두 영역의 차이는 김현정 작가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빛나는 색채’의 문제와 직접 연결된다. 2005년 ‘프라하의 창’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맑은 빛을 물감으로 옮기려 했고, 2009년 ‘날으는 빛’에서는 RGB 광원과 투명 재료를 이용해 실제 빛의 색을 만들었다. 이후 ‘무한’ 연작에서는 LED가 완성된 작품 안으로 들어오면서 물감과 빛의 차이를 한 작품에서 직접 비교할 수 있게 됐다.
안료의 색은 빛을 받아 반사되면서 보이고, LED는 자체적으로 빛을 낸다. ‘무한 8’의 좌우 구조는 이런 차이를 설명으로 제시하기보다 실제 작품 안에서 만나게 한다. 붓으로 만든 색과 광원이 만든 색이 나란히 놓이면서 서로 다른 밝기와 투명성, 깊이를 만든다.
아크릴을 사용한 이유도 빛과 연결된다. 투명성과 반투명성을 조절할 수 있는 아크릴은 LED의 직접적인 밝기를 부드럽게 확산시키면서 형상 안쪽에서 빛이 차오르는 효과를 만든다. 광원 자체가 그대로 노출되기보다 아크릴을 통과하면서 나비와 원의 내부에서 밝음이 번진다.
이때 빛은 표면에 덧씌운 효과보다 형상 안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에 가까워진다. 나비가 바깥의 빛을 받아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색이 차오르고, 그 색이 형태 전체로 퍼진다. 김현정 작가가 ‘빛의 나비’를 외부의 빛을 찾아가는 존재에서 스스로 빛을 품은 존재로 바꾸어온 흐름이 ‘무한 8’에서도 이어진다.
빛의 색이 순차적으로 달라지는 과정은 작품에 또 하나의 시간을 만든다. 붉은 계열에서 다른 색으로 이동하거나 밝기의 상태가 달라질 때 원의 인상과 주변 색의 관계도 변한다.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어느 순간에 마주했는지에 따라 기억하는 색이 달라질 수 있다.
회화의 시간도 여기서 변한다. 한 번에 전체를 보는 평면회화와 달리 ‘무한 8’은 일정 시간 작품 앞에 머물러야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관람자가 작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 다른 색과 형태가 차례로 나타난다. 감상 시간 자체가 작품을 이해하는 조건으로 들어온다.
‘8’이라는 숫자와 무한대의 시각적 유사성도 작품의 구조와 맞물린다. 세로로 놓인 두 원은 숫자 8을 만들고, 가로로 눕히면 무한대 기호가 된다. 작품은 이 익숙한 형태 변환을 나비의 두 날개와 다시 연결한다. 숫자와 기호, 생명체의 형상이 하나의 기본 구조를 공유하면서 서로 다른 의미로 전환된다.
‘0’에서 ‘∞’로, 다시 나비의 날개로 이어지는 변화는 생성의 서사와도 맞닿는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명이 시작되고, 하나의 존재가 순환의 구조를 지나 날개를 펼치는 흐름이다. 김현정 작가가 반복해온 알과 나비, 빛과 비상의 관계가 ‘무한 8’에서는 하나의 움직이는 기호체계로 압축된다.
이 작품에서 ‘무한’은 끝없이 반복되는 동일한 상태보다 계속 다른 형태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에 가깝다. 원은 ‘0’이면서 알이고, 두 원의 연결은 무한대가 되며, 같은 구조는 다시 나비의 날개가 된다. 하나의 형태 안에 여러 상태가 잠재돼 있고 빛이 그 가능성을 차례로 밖으로 꺼낸다.
‘무한 8’은 그래서 김현정 작가가 LED를 회화에 더한 작품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평면과 입체, 안료와 광원, 정지와 변화, ‘0’과 ‘∞’, 알과 나비가 서로 전환되며 하나의 작품을 계속 새롭게 구성한다. 실제 빛은 색을 밝히는 역할을 넘어 형상의 의미를 움직이는 매체가 된다.
‘무한 8’에서 빛은 이미 만들어진 나비를 비추는 조명이 아니다. 광원이 켜지고 색이 변할 때 원은 ‘0’이 되고, 타원은 서로 연결돼 무한대를 만들며, 다시 두 개의 형상은 나비의 날개로 열린다. 김현정 작가의 ‘빛의 나비’는 이 작품에서 빛을 품는 단계를 넘어, 빛에 따라 자신의 형태와 의미까지 바꾸는 존재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