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 ‘호숫가’, 풍경을 삼킨 붉은 형상과 신화의 기호들
호수와 산의 윤곽을 지우고 청색·적색·금빛으로 재구성한 1989년 유화…자연의 관찰에서 신화적 상상력으로 확장된 쉬가예프의 회화
[KtN 박준식기자]짙푸른 색이 캔버스 전체를 감싸고 있다. 중앙에는 붉은색과 금빛이 뒤엉킨 거대한 형상이 자리 잡았고, 그 안쪽으로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길쭉한 청록색의 형태가 가로로 뻗어 있다. 오른쪽에는 붉은 곡선이 반복되는 어두운 형상이 떠 있으며, 왼쪽에는 둥근 기호와 작은 선들이 흩어져 있다. 호수의 수평선도, 물가의 나무도, 산의 윤곽도 뚜렷하지 않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1989년작 ‘호숫가(Beside Lake)’는 자연의 외형을 따라가는 풍경화에서 벗어나 물과 생명, 기호와 색채가 뒤섞인 공간을 구축한다. 구체적인 장소를 가리키는 제목과 달리 캔버스에는 호수를 둘러싼 사물보다 자연을 기억하고 상상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형상들이 자리한다.
‘호숫가’에서 청색은 물을 묘사하는 색에 머물지 않는다. 상단의 어두운 남색은 왼쪽으로 갈수록 회청색과 녹색을 품고, 오른쪽에서는 보라색에 가까운 짙은 청색으로 변한다. 중앙의 붉은 형상 아래에도 청색이 스며들고, 하단에서는 다시 검푸른 색이 넓게 퍼진다. 서로 다른 농도의 푸른색이 캔버스를 연결하지만 물의 깊이나 거리, 빛의 방향을 일정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쉬가예프는 호수를 하나의 수평적인 공간으로 펼치기보다 여러 형상이 출현하고 사라지는 색채의 영역으로 바꿨다.
중앙의 붉은 형상은 작품의 시선을 가장 강하게 붙잡는다. 왼쪽의 검은색과 갈색이 뒤섞인 부분에서 시작해 오른쪽으로 부풀어 오르며, 위쪽에는 노란색과 금빛에 가까운 붓질이 집중돼 있다. 붉은색 내부에는 어두운 선과 밝은 흔적이 교차하고, 일부에서는 물감이 긁히거나 밀린 듯한 질감이 드러난다. 매끈한 윤곽을 가진 하나의 사물이라기보다 여러 형태가 겹쳐 만들어진 덩어리다. 중앙 상단에서 수직으로 솟은 갈색과 금빛의 긴 형태는 나무줄기나 기둥을 떠올리게 하지만 아래의 붉은 덩어리와 결합하면서 독립된 사물로 분리되지 않는다.
붉은 형상 안쪽에는 청록색의 길쭉한 형태 두 개가 가로로 놓여 있다. 위쪽의 좁은 형태는 짙은 윤곽으로 둘러싸였고, 아래쪽에는 작은 붉은 점과 노란 선이 흩어져 있다. 끝부분에서는 붉은 선이 갈라지며 바깥으로 뻗는다. 물고기의 몸과 지느러미를 연상시키는 구조지만 생물의 해부학적 형태를 충실하게 따른 모습은 아니다. 붉은색의 큰 덩어리 안에 청록색의 작은 형상이 들어가면서 서로 다른 생명체가 겹쳐진 듯한 구성이 만들어진다.
1986년 ‘수중 세계’에서 쉬가예프는 물고기의 눈과 몸통, 지느러미를 비교적 분명하게 남겨뒀다. 물고기들은 청색과 보라색의 물속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엄쳤고, 수초와 둥근 기호들이 그 사이를 채웠다. ‘호숫가’에서는 물고기를 떠올리게 하는 형태가 남아 있지만 독립된 생명체로 분리되지 않는다. 청록색의 형상은 붉은 덩어리 내부에 들어가고 주변의 선과 색이 그 경계를 침범한다. 물속 생물을 하나씩 배치하던 구성에서 여러 존재의 형태를 한 덩어리 안에 중첩하는 구성으로 옮겨간 것이다.
붉은 형상의 오른쪽에는 밝은 회색과 흰색이 세로로 길게 내려온다. 주변에는 작은 붉은 점과 흰 점들이 모여 있고, 그 옆으로 짙푸른 곡선이 크게 휘어진다. 흰색의 세로 형태는 위쪽의 붉은 덩어리와 아래쪽의 어두운 청색을 연결하면서 작품 중앙에 강한 수직축을 만든다. 오른쪽으로 휘어진 푸른 곡선과 맞물려 넓은 공간을 둘로 나누지만 경계는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 붉은 점과 흰 점들이 경계 주변에 흩어지면서 두 영역은 다시 연결된다.
오른쪽 가장자리의 어두운 형상에는 붉은 곡선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 길게 늘어난 몸통이나 잎맥, 뼈의 구조를 연상시키는 선들이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지만 특정한 생명체로 완결되지는 않는다. 짙은 청색과 검정이 섞인 바탕 위에 붉은 선이 놓이면서 중앙의 붉은 덩어리와 색채의 관계를 맺는다. 형태는 떨어져 있어도 같은 붉은색이 반복되기 때문에 작품의 중심과 가장자리가 서로 연결된다.
왼쪽에는 오른쪽과 다른 종류의 기호들이 나타난다. 붉은 테두리 안에 금빛의 작은 원이 들어간 형태가 세로로 놓여 있고, 그 아래에는 가느다란 선이 이어진다. 중앙 왼쪽에는 청색의 원형 구조가 있으며 내부를 가로지르는 선과 작은 곡선이 겹쳐 있다. 하단의 황갈색 부분에도 검은 십자형 기호가 놓여 있다. 둥근 테두리와 교차하는 선이 반복되면서 작품의 여러 위치에 서로 닮은 구조가 생긴다.
기호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정렬되지 않는다. 왼쪽의 작은 원형은 붉은색 바탕에 놓여 있고, 중앙의 푸른 원형은 검푸른 공간 속에 있으며, 아래쪽의 십자형은 황갈색 면 안에 들어 있다. 같은 원과 교차선의 구조가 서로 다른 색채와 만나면서 각각 다른 무게를 얻는다. 쉬가예프는 기호를 하나의 장식적인 무늬로 반복하기보다 주변의 색과 형상에 따라 역할이 달라지도록 배치했다.
1987년 ‘납치’에서도 붉은색의 거대한 형상과 둥근 기호, 짐승의 머리와 바퀴를 연상시키는 구조가 한 캔버스에 등장했다. 당시에는 길게 뻗은 붉은 몸체가 가로형 작품을 관통하며 강한 이동감을 만들었다. ‘호숫가’에서는 붉은색이 중앙에 응축되고 주변의 기호들이 서로 다른 위치로 흩어진다. 붉은 형상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이 한 방향으로 이동했던 ‘납치’와 달리 ‘호숫가’에서는 중앙에서 시작한 시선이 좌우의 원형과 세로 형태, 오른쪽의 붉은 곡선 사이를 오간다. 가로형 캔버스를 사용하면서도 작품을 조직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호숫가’의 형상들은 자연과 신체, 사물의 경계에 머문다. 중앙의 붉은 덩어리는 하나의 동물처럼 읽히다가 여러 생명체가 결합한 형태로 바뀌고, 위로 솟은 갈색의 긴 부분은 나무나 기둥처럼 보인다. 오른쪽의 붉은 곡선은 생물의 몸 안쪽 구조를 떠올리게 하며, 왼쪽의 원형들은 구체적인 사물보다 기호에 가깝다. 어느 하나의 대상이 작품 전체를 설명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형상이 청색의 넓은 공간에서 관계를 맺으며 호숫가라는 장소를 구성한다.
쉬가예프의 초기 풍경화와 비교하면 변화의 폭이 크다. 1980년대 초 색채 판화 ‘햇빛 비친 집’에서는 산과 집, 말이 각각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배치됐다. 산의 능선과 집의 지붕, 땅의 구획이 뚜렷했고, 색채는 현실의 풍경을 단순화하면서도 장소의 구조를 유지했다. ‘호숫가’에서는 산과 집 같은 구체적인 지표가 사라지고 물의 색과 생명체의 흔적, 기호들이 공간을 대신한다. 풍경을 이루는 대상의 외형보다 장소에서 출발한 감각과 기억을 형상으로 조직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1989년의 쉬가예프는 구체적인 대상의 관찰과 추상적인 형상의 결합을 더욱 적극적으로 밀고 나갔다. ‘지진’에서는 검은 선이 사람과 동물의 윤곽을 뒤흔들었고, ‘납치’에서는 동물과 기계, 기호가 하나의 붉은 구조 안에 결합했다. ‘호숫가’에서는 형상을 파괴하거나 강하게 끌어당기는 움직임보다 여러 이미지가 한 공간에 겹쳐 머무르는 방식이 두드러진다. 자연에서 출발한 형태들이 서로 다른 의미를 품은 채 공존하는 구성이다.
캔버스의 물감도 이런 변화를 뒷받침한다. 청색의 바탕은 한 번에 균일하게 칠한 면이 아니라 어두운 색과 밝은 색을 겹쳐 만든 표면이다. 붉은 형상에는 노란색과 금빛의 짧은 붓질이 더해지고, 중앙의 청록색 부분에는 가는 선과 작은 점들이 남아 있다. 왼쪽 아래의 붉은색과 황갈색이 만나는 곳에서는 붓질이 서로 밀려 들어가며 경계가 흐려진다. 색이 정해진 윤곽 안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색과 섞이면서 형상의 일부를 만들거나 지운다.
상단의 넓은 청색은 작품의 다른 부분보다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그러나 중앙으로 내려오면 붉은색과 금빛, 청록색이 집중되고, 하단에서는 다시 어두운 청색과 붉은색이 뒤섞인다. 색의 밀도가 높은 중앙과 넓게 펼쳐진 주변부의 대비가 작품에 깊이를 만든다. 원근법에 따라 멀고 가까운 대상을 나누지 않더라도 색채의 집중과 확산만으로 공간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중앙 상단의 수직 형태와 오른쪽의 길게 내려오는 밝은 형태도 눈에 띈다. 위쪽에서는 갈색과 금빛의 선들이 솟아 있고 오른쪽에서는 흰색과 회색의 길쭉한 형상이 아래로 이어진다. 두 부분 사이에는 붉은색의 넓은 덩어리가 놓여 있다. 수직으로 뻗는 선과 수평으로 퍼지는 색면이 교차하면서 작품 중앙의 구조를 붙잡는다. 주변의 원형과 곡선은 이러한 큰 축 사이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호숫가’가 일반적인 풍경화와 다른 점은 관람자의 시선이 머무를 수 있는 고정된 위치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물가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높이나 호수의 수평선이 정해져 있지 않고, 형상들의 크기도 현실의 비례를 따르지 않는다. 청록색의 길쭉한 형태와 원형 기호, 붉은 덩어리는 서로 다른 거리에서 본 대상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공간에 겹쳐 있다. 자연을 한 시점에서 바라본 풍경보다 여러 관찰과 기억이 한꺼번에 들어온 구성이다.
쉬가예프의 후기 작업에서 신화적 동물과 전통의 기호,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흐름도 ‘호숫가’에서 읽힌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이 바라보는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생명체를 떠올리게 하는 형상과 추상적인 기호가 공간을 만들고, 서로 다른 색채가 그 관계를 연결한다. 신화는 특정한 이야기를 순서대로 재현하는 방식보다 자연과 존재를 새롭게 결합하는 조형적 질서로 나타난다.
작품 오른쪽 상단의 흰 기호는 주변의 어두운 청색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두 개의 짧은 곡선이 아래로 내려오며 하나의 작은 점과 연결된 형태다. 주변의 다른 형상에 비해 단순하지만 넓은 푸른 공간에 홀로 놓여 있어 시선을 끈다. 중앙의 복잡한 붉은 덩어리와 달리 몇 개의 선만으로 만들어진 기호가 독립된 위치를 차지한다. 쉬가예프는 형상을 복잡하게 쌓는 방식과 극도로 줄이는 방식을 한 작품에서 함께 사용한다.
왼쪽 하단의 황갈색 부분에도 원형과 십자형이 남아 있다. 색채가 붉은색에서 황갈색으로 옮겨가는 영역에 놓인 기호는 주변의 거친 붓질과 대비된다. 짧고 분명한 선이 넓은 색면 안에서 형태를 유지하면서 추상적인 공간에 또 하나의 기준점을 만든다. 중앙의 청록색 형상, 오른쪽의 붉은 곡선, 왼쪽의 원형들이 서로 다른 성격을 갖지만 모두 넓은 청색 바탕 안에서 연결된다.
‘호숫가’는 쉬가예프가 자연을 관찰해 그리는 방식에서 자연의 형상과 기억을 다시 조합하는 방식으로 옮겨간 결과다. 산과 집을 색면으로 단순화했던 초기 판화, 생명체를 푸른 공간에 배치했던 ‘수중 세계’, 동물과 기계를 결합했던 ‘납치’, 선으로 형상을 흔들었던 ‘지진’의 조형적 탐색이 이 작품에서 겹친다. 구체적인 풍경의 외형은 사라졌지만 자연에서 출발한 색채와 생명체의 흔적은 남아 있다.
1989년 ‘호숫가’에서 쉬가예프는 물을 그리기 위해 호수의 윤곽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짙푸른 공간에 붉은 형상과 청록색의 생명체, 원형과 십자형의 기호를 놓고 서로 다른 형태가 공존하는 질서를 만들었다. 자연을 바라보던 시선은 자연을 구성하는 이미지와 기호의 관계로 확장됐고, 풍경은 실제 장소의 재현에서 기억과 상상력이 겹쳐지는 회화로 바뀌었다. 쉬가예프가 이후 전개한 신화적 회화의 조형언어도 현실의 자연을 지우는 데서가 아니라 자연의 형상을 새로운 관계 속에 다시 배치하는 과정에서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