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방혜자 ‘비상’…흩어진 색이 날개가 되다, 부직포 위로 번진 생명의 움직임
남청·보라·갈색·주황의 흔적이 옅은 바탕을 가로지르는 2000년작 한지에서 부직포로 넓어진 재료 탐구…천연안료의 스밈이 빛과 상승의 리듬으로
[KtN 박준식기자]방혜자의 2000년작 ‘비상’에는 옅은 회백색과 미색의 바탕 위로 남청과 보라에 가까운 짙은 색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진다. 갈색과 주황빛은 그 사이를 파고들며 번지고, 밝은 바탕은 색과 색 사이에 넓은 여백을 남긴다. 날개의 구체적인 형상보다 안료가 퍼지고 갈라지고 다시 이어지는 흐름이 작품 전체에 상승과 확산의 감각을 만든다.
작품 전면에는 여러 색의 덩어리가 서로 다른 밀도로 놓여 있다. 짙은 남청과 보라는 왼쪽과 중앙, 오른쪽을 오가며 불규칙하게 이어지고, 그 주변에는 갈색과 황토빛, 주황빛이 짧고 가는 흔적으로 스민다. 색과 색 사이에 남은 밝은 부분은 각각의 덩어리를 분리하면서 동시에 시선이 이동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든다.
이 간격에서 작품의 호흡이 생긴다. 짙은 안료가 밀집한 곳에서는 무게가 깊어지고, 바탕이 넓게 드러나는 곳에서는 공기가 들어온다. 시선은 어두운 흔적을 따라 이동하다 다시 밝은 섬유의 영역으로 빠져나간다.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하는 구도보다 여러 지점에서 색이 생겨나고 사라지며 작품 전체로 흐름을 넓힌다.
남청과 보라의 가장자리도 단단한 윤곽으로 닫히지 않는다. 색은 섬유를 따라 번지고, 일부는 안쪽으로 스며들며, 또 다른 부분에서는 안료의 입자가 짙게 모인다. 같은 색 안에서도 농도가 달라지면서 가까운 부분과 먼 부분이 동시에 생긴다. 원근을 선으로 그리는 방식보다 안료가 부직포에 머문 정도가 깊이를 결정한다.
방혜자는 1970년대 한지를 작업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고, 1990년대에는 천연안료로 재료의 범위를 넓혔다. 1996년 이후 프랑스 남부 루시용의 붉은 흙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997년부터는 부직포를 주요 지지체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였다. 한지의 섬유에서 발견한 스밈과 물성에 대한 관심이 보다 열린 조직의 부직포를 만나면서 후기 회화의 공간도 달라졌다.
‘비상’은 이 변화가 대형 작업으로 깊어지던 시기에 제작됐다. 색을 표면에 덮는 행위와 함께 안료가 섬유 사이에서 이동하고 머무는 과정 자체가 구성의 일부가 됐다. 붓의 방향, 물기의 흐름, 안료의 농도와 부직포의 조직이 함께 작품의 형태를 만든다.
1961년 ‘지심’의 물성과 나란히 놓으면 40년 가까운 변화가 더욱 선명하다. ‘지심’에서는 유화 물감의 두께와 거친 마티에르가 어둠의 밀도를 만들었다. 물감을 쌓고 긁은 흔적 사이에서 밝음이 올라왔다. ‘비상’에서는 재료의 두께보다 색이 스며드는 깊이가 앞에 선다.
무거운 유화의 표면에서 가벼운 섬유와 천연안료의 층으로 이동하면서 빛을 만드는 방식도 달라졌다. 안료가 짙게 머문 곳과 옅게 스친 곳, 색이 빠져나가며 섬유가 드러난 곳 사이의 차이가 작품의 깊이를 만든다. 물감의 덩어리 안에서 밝음을 찾던 초기 회화가 재료 내부의 흐름을 통해 빛을 만들어가는 단계로 옮겨간 것이다.
천연안료가 만드는 색의 성격도 ‘비상’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남청과 보라, 갈색과 주황은 각각 독립된 선명한 색으로 분리되기보다 서로 스미며 복합적인 중간색을 만든다. 밝은 부분 역시 순백으로 정리되기보다 회백색과 미색, 옅은 황토빛을 품는다. 짙음과 밝음 사이에 수많은 색의 단계가 생기면서 작품 전체에 미세한 진동이 이어진다.
‘비상’이라는 제목은 이런 색의 움직임 속에서 구체화된다. 짙은 흔적들은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고, 색의 덩어리는 서로 떨어졌다가 다시 가느다란 번짐으로 이어진다. 갈색과 주황빛은 남청과 보라 사이에서 온도를 높이며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옮긴다. 작품 전체가 한 방향으로 솟는 운동보다 여러 색이 동시에 퍼지고 떠오르는 상태를 만든다.
왼쪽과 중앙에 자리한 어두운 흔적은 크기와 밀도를 달리하며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한층 성긴 흐름을 만든다. 색의 무게가 어느 한곳에 고정되지 않으면서 캔버스 전체에는 부유하는 듯한 감각이 생긴다. 비상은 날개의 윤곽보다 색의 분산과 간격, 안료가 번지는 속도 속에서 형성된다.
부직포의 밝은 바탕은 이 움직임을 받아내는 중요한 공간이다. 안료가 비껴간 섬유는 어두운 색 사이에서 빛이 머무는 자리로 작동한다. 색이 밀집한 곳과 바탕이 넓게 드러난 곳이 교차하면서 작품의 표면에는 공기층과 같은 깊이가 생긴다. 짙은 안료가 물질의 무게를 만들고, 밝은 섬유가 그 무게를 가볍게 풀어낸다.
방혜자의 후기 회화에서 빛은 밝은 색 하나로 설명되는 대상보다 재료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감각에 가깝다. ‘비상’에서도 색이 들어간 곳과 바탕이 열린 곳, 안료가 짙게 스민 곳과 섬유가 옅게 비치는 곳의 차이가 밝음을 만든다. 빛을 별도의 형상으로 덧붙이는 방식보다 재료 사이에 밝음이 생겨날 조건을 마련하는 쪽으로 회화가 깊어진다.
천연안료와 부직포가 만나는 과정에는 재료 자체의 움직임도 적극적으로 들어온다. 안료와 물기가 섬유를 따라 이동하면서 짙고 옅은 흔적을 만들고, 일부 색은 예상보다 멀리 번지며 또 다른 부분에서는 농도를 높인다. 작가의 손과 재료가 서로 반응하면서 표면은 미리 정해진 선보다 더 복합적인 흐름을 갖는다.
이 시기 방혜자는 지지체를 바닥에 수평으로 펼쳐 작업하는 방식도 이어갔다. 종이와 천의 주름, 안료의 스밈과 흐름, 섬유의 성질이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작품은 작가의 행위와 재료의 반응이 만나는 공간으로 변했다. 2000년대 초 대형 부직포 작업에서는 전통 회화의 배채법을 응용한 방식도 이어지며 색이 지지체의 앞뒤를 통과하는 깊이가 더욱 확장됐다.
‘비상’은 후기 방혜자의 재료 탐구가 본격적인 공간성을 얻는 시기에 놓여 있다. 한지에서 발견한 섬유의 물성을 부직포로 넓히고, 천연안료가 스며들고 번지는 성질을 작품의 구조로 받아들였다. 빛은 표면에 올린 효과에서 재료 안쪽에서 올라오는 감각으로 깊어졌다.
남청과 보라의 짙은 색 역시 빛의 형성과 함께 작동한다. 깊은 색이 자리한 주변에서 회백색과 미색의 바탕은 더욱 밝아지고, 밝은 섬유는 다시 어두운 안료의 농도를 선명하게 만든다. 밝음과 어둠이 서로를 밀어내기보다 하나의 공간 안에서 깊이를 나누며 공존한다.
이 관계는 ‘비상’에 독특한 무게를 준다. 흙과 안료, 섬유라는 물질의 감각은 작품에 남아 있고, 그 물질은 색의 분산과 스밈을 통해 가벼운 움직임으로 전환된다. 깊은 남청과 보라가 바탕 위에 무게를 만들면서도 색의 가장자리는 계속 풀어지고 흩어진다. 물질성과 상승감이 한 표면 안에서 동시에 살아난다.
2000년이라는 제작 시점도 방혜자의 작업에서 의미가 크다. 1990년대 천연안료와 루시용의 흙을 받아들이고 부직포까지 재료의 폭을 넓힌 뒤, 새로운 재료가 대형 작품 안에서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후 작품에서는 별처럼 흩어진 빛, 중심에서 퍼지는 원과 우주의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이 더욱 깊어진다.
‘비상’에서는 후기 원형 작품처럼 하나의 밝은 핵이 전체를 지배하기보다 빛의 감각이 작품 여러 곳에 분산돼 있다. 어두운 색의 틈마다 밝은 바탕이 드러나고, 서로 다른 크기의 색 흔적이 작품 곳곳에서 움직인다. 빛이 하나의 형상을 얻기 전, 물질의 흐름 속에서 여러 방향으로 태어나는 상태에 가깝다.
그래서 ‘비상’은 방혜자의 후기 회화로 넘어가는 중요한 지점으로 읽힌다. 안료와 섬유, 밝음과 어둠, 짙음과 비어 있는 부분이 서로 맞물리며 작품 전체에 생명력을 만든다. 색은 형태를 설명하는 재료에서 벗어나 스스로 움직이고 공간을 만드는 주체가 된다.
방혜자는 ‘비상’에서 날개의 형상을 직접 제시하기보다 천연안료가 부직포의 섬유를 따라 스며들고 흩어지는 흐름으로 상승과 확산의 감각을 만들어냈다. 남청과 보라의 무게 사이로 갈색과 주황빛이 번지고, 밝은 섬유는 그 색들 사이에 넓은 호흡을 남긴다.
흙과 안료, 섬유라는 구체적인 물질은 방혜자의 손을 거치며 가벼운 움직임과 빛으로 전환된다. ‘비상’은 색이 물질의 무게를 품은 채 서서히 떠오르고 퍼져 나가는 순간, 방혜자의 회화가 재료의 깊이에서 빛의 감각으로 나아가던 2000년의 흐름을 응축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