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방혜자 ‘물성과 빛’…흙의 입자에서 올라온 빛, 닥지에 스민 대지의 시간

청록과 황토·적갈색이 세 점을 가로지르며 겹치는 2007년작 닥지·천연안료·루시용 황토가 만든 색의 깊이…물질 안에서 생성되는 밝음

2026-10-17     박준식 기자

[KtN 박준식기자]방혜자의 2007년작 ‘물성과 빛’은 청록과 황토, 적갈색이 서로 스며드는 세 점의 작품으로 구성된다. 아래에서 넓게 번지는 청록 계열의 색 위로 황토와 붉은 흙빛이 내려오고, 두 색이 만나는 경계에는 금빛에 가까운 밝은 흔적이 겹친다. 닥지의 섬유와 천연안료, 프랑스 남부 루시용(Roussillon)의 실제 황토가 만나면서 색은 하나의 표면에 머무르기보다 안쪽으로 스며들고 다시 올라오는 깊이를 만든다.

방혜자, ‘물성과 빛’, 2007, 닥지에 천연안료·루시용 황토, 41×31㎝ 3점, 청록과 황토·적갈색 계열이 서로 스며들고 경계 부근에 밝은 색이 겹친다. 닥지와 천연안료, 실제 흙의 입자가 만나 색층 안에서 빛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세 점에는 서로 닮은 색이 흐르지만 각각의 농도와 번짐은 조금씩 다르다. 청록은 아래쪽에서 넓은 영역을 차지하며 깊게 퍼지고, 황토와 적갈색은 위쪽과 가장자리에서 밀도를 높인다. 두 계열의 색이 맞닿는 곳에서는 경계선보다 여러 겹의 중간색이 생긴다. 푸른색과 흙빛 사이에 밝은 황금빛이 스며들며 작품 전체의 온도를 바꾼다.

이 밝음은 흰색을 따로 올려 만든 빛과 성격이 다르다. 청록과 황토, 적갈색이 겹치며 농도가 달라지는 과정에서 밝은 부분이 떠오른다. 빛은 색 위에 놓인 별도의 형상보다 색층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각으로 자리한다.

‘물성과 빛’이라는 제목도 작품의 제작 방식과 정확히 맞물린다. 황토는 손에 잡히는 흙이고, 닥지는 식물 섬유로 만들어진 종이다. 천연안료 역시 광물과 자연에서 얻은 색의 입자를 품는다. 방혜자는 이런 구체적인 물질을 겹치면서 가장 비물질적으로 느껴지는 빛의 감각을 끌어낸다.

1990년대 이후 방혜자의 재료 탐구는 자연의 물질을 작품 안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깊어졌다. 천연안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1996년부터는 프랑스 남부 루시용의 붉은 흙을 작품에 들였다. 1970년대부터 이어온 한지 작업과 프랑스에서 만난 흙이 한 작품 안에서 만나는 구조가 형성됐다.

루시용의 황토는 단순한 색명이 아니다. 실제 대지의 입자가 작품 안에 들어온다. 흙의 미세한 입자는 안료와 섞이면서 닥지의 섬유 사이에 머물고, 물의 양과 종이의 흡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농도를 만든다. 한 번 칠한 균질한 색면보다 입자가 모인 곳과 흩어진 곳에서 표면의 밝기가 계속 달라진다.

방혜자가 오래 다뤄온 닥지는 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바탕이다. 닥지는 물과 안료를 흡수하면서 섬유 사이에 색을 품는다. 표면에 얹힌 색과 종이 안쪽까지 들어간 색이 함께 보이면서 얇은 종이 안에 여러 층의 깊이가 생긴다.

‘물성과 빛’에서는 닥지의 성질과 황토의 입자가 서로 맞물린다. 황토가 짙게 머문 부분은 땅의 밀도를 만들고, 안료가 옅게 스며든 부분에서는 종이의 밝음이 다시 올라온다. 청록 계열도 한 가지 농도로 이어지기보다 짙은 부분과 옅은 부분이 겹치며 물과 공기, 먼 공간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세 점을 나란히 놓은 구성도 이런 흐름을 넓힌다. 한 작품에서 시작된 청록과 황토의 관계가 옆 작품으로 이어지고, 다시 다른 농도와 방향으로 변한다. 각각의 작품은 독립된 사각형이지만 색의 흐름은 세 점 사이를 건너간다. 반복과 변화가 함께 작동하면서 작은 크기의 작품 세 점이 하나의 긴 호흡을 만든다.

청록과 황토의 조합에는 하늘과 땅, 물과 흙을 떠올리게 하는 감각도 겹친다. 방혜자는 1980년대부터 하늘과 땅, 우주와 생명의 관계를 작업 안에서 지속적으로 다뤘다. ‘물성과 빛’에서는 광대한 우주의 형상을 직접 펼치기보다 자연에서 가져온 색과 물질을 압축해 그 관계를 끌어낸다.

특히 루시용 황토가 들어오면서 대지는 상징에서 물질로 가까워진다. 땅을 닮은 색을 만들어내는 것과 실제 흙을 작품에 사용하는 일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대지는 작품의 주제이면서 동시에 작품을 이루는 재료가 된다. 자연을 바라보고 그리는 단계에서 자연의 일부가 직접 회화의 구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청록 역시 황토와 만나면서 다른 깊이를 얻는다. 차가운 청록 옆에 따뜻한 적갈색과 황토가 놓이면 두 색 사이의 온도 차이가 커지고, 경계의 밝은 부분은 더욱 선명해진다. 빛을 강한 흰색으로 밀어 올리는 대신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의 관계가 밝음을 만든다.

방혜자의 초기 작업과 비교하면 빛을 만드는 방식의 변화가 더욱 또렷하다. 1961년 ‘지심’에서는 짙은 유화 물감과 거친 마티에르 사이에서 밝은 부분이 드러났다. 1970년대 이후 닥지를 만나면서 색은 종이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는 천연안료와 흙의 입자가 그 깊이에 더해졌다.

2007년 ‘물성과 빛’에 이르면 종이와 흙, 안료의 성질 자체가 빛을 만드는 구조로 이어진다. 두꺼운 물감으로 밝음을 쌓아 올리는 방식보다 재료가 색을 흡수하고 다시 드러내는 과정이 앞에 선다. 방혜자의 빛은 시각적인 효과와 함께 재료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깊어진다.

‘비상’과 비교해도 흥미로운 차이가 생긴다. 2000년 ‘비상’에서는 부직포 위에 남청과 보라, 갈색과 주황빛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며 상승과 확산의 리듬을 만들었다. ‘물성과 빛’에서는 보다 응축된 사각형 안에서 청록과 황토가 넓은 색층을 이루고, 그 사이에서 밝음이 서서히 올라온다.

‘비상’의 빛이 색의 분산과 이동 속에서 생겨났다면 ‘물성과 빛’의 밝음은 서로 다른 물질이 맞닿는 경계에서 깊어진다. 흙과 종이, 천연안료가 한곳에서 만나며 색의 밀도가 달라지고, 그 차이가 빛의 감각으로 이어진다.

2000년대 방혜자 회화에서 빛과 물질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졌다는 점도 이 작품에서 선명하다. 정신적인 세계를 향할수록 재료의 존재감은 오히려 세밀해졌다. 어떤 종이를 사용할지, 어떤 안료가 얼마나 스며드는지, 흙의 입자가 어디에 머무는지가 작품의 깊이를 결정했다.

파리 세르누치박물관이 2019년 방혜자 회고전의 제목을 ‘Et la matière devint lumière’, 즉 ‘그리고 물질은 빛이 되었다’로 정한 흐름도 이 작품과 맞닿아 있다. 방혜자의 후기 작업에서는 종이와 흙, 안료라는 구체적인 물질이 서로 만나면서 밝음과 깊이, 우주의 감각으로 확장된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물성과 빛’에서는 가장 무거운 물질에 가까운 흙과 가장 가볍게 느껴지는 빛이 한 작품 안에 함께 존재한다. 황토의 입자는 닥지에 스며들어 물질의 밀도를 만들고, 청록과 적갈색 사이에서 떠오르는 밝음은 그 밀도에 호흡을 더한다. 물질의 무게와 빛의 감각이 서로 떨어진 두 영역으로 나뉘기보다 같은 색층에서 함께 만들어진다.

방혜자의 회화에서 자연은 색의 출처이면서 재료의 출처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다시 만난 닥지와 프랑스 루시용의 흙이 한 작품에 들어오면서 두 지역에서 축적한 재료의 경험도 겹친다. 닥지의 섬유가 황토를 받아들이고, 프랑스의 흙은 한국 종이 안으로 스며들며 새로운 색을 만든다.

‘물성과 빛’의 세 점에는 거대한 형상이나 강한 중심이 자리하기보다 서로 다른 물질이 만나며 만들어낸 작은 변화들이 축적돼 있다. 청록이 황토 속으로 스며들고, 적갈색이 번지며, 밝은 색이 경계를 따라 올라온다. 그 미세한 차이가 작품의 깊이를 만든다.

방혜자는 ‘물성과 빛’에서 빛을 물질의 반대편에 두기보다 흙과 종이, 안료가 서로 만나는 과정 안에서 찾아냈다. 실제 흙의 입자는 닥지의 섬유에 머물고, 천연안료는 그 사이를 오가며 여러 층의 색을 만든다. 청록과 황토가 맞닿는 곳에서 생겨난 밝음은 외부에서 비춰진 빛보다 작품 내부에서 올라오는 깊이에 가깝다. ‘물성과 빛’은 방혜자의 회화에서 물질이 곧 빛의 근원이 되어가는 2000년대 작업의 한 축을 응축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