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방혜자 ‘정관묘오’…적갈색 원과 서체, 고요한 응시가 만든 내면의 빛
정사각형 안에 응축된 적갈색 원…천연안료와 서체가 만난 1993년작 우주로 확장되기 전 원형의 깊은 내면성…색과 여백, 글씨로 다듬은 성찰의 시간
[KtN 박준식기자]방혜자의 1993년작 ‘정관묘오(靜觀妙悟)’는 정사각형 안에 적갈색 원 하나를 중심에 놓는다. 원의 내부에는 서체가 자리하고, 주변에는 종이의 밝은 여백이 넓게 남는다. 화면을 채우는 요소는 간결하지만 적갈색의 농도와 원의 가장자리, 글씨의 움직임이 서로 맞물리면서 작은 크기 안에 깊은 긴장을 만든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원의 무게다. 짙은 적갈색이 중앙에 응축돼 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색의 농도가 조금씩 달라진다. 기계적으로 그린 완전한 원보다 손과 안료의 움직임이 남은 유기적인 형태에 가깝다. 색이 짙게 머문 곳과 옅게 스민 곳이 이어지며 하나의 원 안에서도 여러 깊이가 생긴다.
적갈색은 붉은색의 온기와 흙빛의 무게를 함께 품는다. 밝고 선명한 원색보다 가라앉은 색의 밀도가 먼저 다가오고, 천연안료의 입자는 종이 표면에 미세한 차이를 남긴다. 색은 원의 형태를 채우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작품의 정서를 결정하는 물질이 된다.
원 안에 들어간 서체도 독립된 문장이나 장식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붓의 움직임과 적갈색 바탕이 겹치면서 글씨는 읽는 대상과 보는 형상 사이에 놓인다. 획의 굵기와 방향은 원의 정적인 구조 안에 움직임을 더하고, 글씨 사이의 빈 공간은 원 내부에도 다시 여백을 만든다.
‘정관묘오’라는 제목은 작품의 구성과 긴밀하게 맞물린다. ‘정관(靜觀)’은 고요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묘오(妙悟)’는 깊은 깨달음에 이르는 상태를 뜻한다. 작품은 복잡한 형상을 펼치기보다 원과 글씨, 색과 여백을 압축해 시선을 한곳에 머물게 한다. 바라보는 행위가 곧 내면으로 깊어지는 구조다.
정사각형과 원의 관계도 중요하다. 40×40㎝의 사각형은 안정된 외곽을 만들고, 그 안에 놓인 원은 끊어짐 없이 이어지는 순환의 형태를 만든다. 사각의 네 변이 화면의 질서를 잡고, 원은 그 안에서 유연하게 이어진다. 두 기하학적 구조가 만나면서 작품에는 정적인 균형과 순환의 감각이 함께 생긴다.
방혜자는 이후 원을 무한과 우주의 상징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 2011년 ‘하늘의 땅’에서는 작품의 지지체 자체가 원형으로 바뀌고, 중심에서 여러 색과 선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2020년 ‘빛의 기쁨 I’에서는 사각형 안에 밝은 중심과 동심원이 겹치며 빛의 에너지를 응축한다.
1993년 ‘정관묘오’의 원은 그보다 훨씬 내밀하다. 우주적 규모로 확장된 원보다 한 사람의 시선과 마음이 머무는 장소처럼 응축돼 있다. 크기도 작고 구성도 절제돼 있으며, 원 내부에는 글씨가 자리한다. 후기의 원이 빛과 우주의 확장으로 나아갔다면 이 시기의 원은 내면을 향해 깊이를 모으는 성격이 강하다.
방혜자의 원형 모티프는 1980년대 이후 자연의 음양과 계절, 오행과 동양철학에 대한 성찰 속에서 점차 구체화됐다. 천체와 성운, 새벽의 빛에 대한 관심도 함께 이어졌다. ‘정관묘오’에서는 이런 사유가 거대한 우주 이미지보다 한 개의 적갈색 원으로 압축된다.
1990년대 들어 천연안료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변화도 작품의 성격을 결정한다. 이전 유화에서 보였던 두꺼운 마티에르와 다른 방식으로 색의 깊이가 생긴다. 천연안료는 종이에 스며들며 입자와 농도의 차이를 만들고, 종이는 그 색을 안쪽으로 받아들이면서 부드러운 깊이를 만든다.
1992년 ‘제목 없음’에서는 아크릴릭 물감과 닥지, 먹, 천연안료, 파스텔 등 여러 재료가 함께 사용됐다. 불과 1년 뒤 제작된 ‘정관묘오’에서는 종이와 천연안료라는 훨씬 압축된 재료 구성으로 이동한다. 재료의 종류를 넓히는 실험과 함께, 필요한 요소를 줄여 색 자체의 밀도와 정신적 집중을 끌어내는 방향도 동시에 깊어지고 있었다.
‘정관묘오’의 적갈색은 이후 방혜자의 흙 작업으로 이어지는 색채 감각과도 연결된다. 1996년부터 프랑스 남부 루시용의 붉은 흙을 작품에 직접 사용하면서 대지의 물질이 실제 재료로 들어오게 된다. 1993년 작품에서는 천연안료가 만든 적갈색이 먼저 자리하며, 흙과 대지를 연상시키는 색의 깊이를 형성한다.
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생기는 미세한 농담도 작품에 생명감을 더한다. 중심과 둘레가 일정한 밀도로 닫히기보다 색이 조금씩 옅어지고 스며든 부분이 이어진다. 종이의 밝음이 적갈색을 통과해 올라오는 곳에서는 원 내부에도 은은한 빛이 생긴다.
빛을 다루는 방혜자의 방식도 이 작품에서는 매우 절제돼 있다. 후기 작품처럼 중심에서 강한 빛이 방사형으로 퍼지는 구조보다 천연안료의 농도와 종이의 여백이 밝음을 만든다. 짙은 적갈색이 존재할수록 주변의 밝은 종이는 더욱 선명해지고, 종이의 밝음은 다시 원의 깊이를 강조한다.
여백은 작품 바깥에 남은 빈 공간보다 원의 집중도를 높이는 적극적인 구성 요소로 작동한다. 사각형 전체를 색으로 덮는 대신 중앙의 원을 둘러싼 밝은 종이를 충분히 살리면서 시선은 자연스럽게 원으로 모인다. 동시에 원 주변의 넓은 여백은 작품에 정적과 호흡을 더한다.
이 구조는 제목의 ‘정관’과도 연결된다. 복잡한 형태를 따라 시선이 빠르게 이동하는 작품보다 하나의 원을 오래 바라보게 한다. 처음에는 적갈색 덩어리가 들어오고, 시간이 지나면서 색의 농도와 글씨의 획, 종이의 결, 원의 가장자리가 차례로 드러난다.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작은 차이가 깊어지는 작품이다.
원 안의 서체는 내면의 사유를 시각적으로 붙잡는 역할을 한다. 문자는 뜻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선으로 존재한다. 먹이나 붓으로 쓴 글씨에서 획의 속도와 힘은 의미와 함께 몸의 흔적을 남긴다. 방혜자는 원의 안정된 구조 안에 이러한 선의 움직임을 넣어 정적인 명상과 생동하는 행위를 한 자리에서 만나게 한다.
‘정관묘오’는 회화와 서예의 경계에서도 흥미로운 위치를 갖는다. 글씨를 별도의 설명으로 붙이는 방식보다 회화의 구성 안에 서체를 직접 받아들인다. 적갈색 원과 검은 획, 밝은 종이의 관계가 하나의 조형적 질서로 작동하면서 글씨의 의미와 시각적 리듬이 함께 읽힌다.
방혜자가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동서양의 재료와 표현법을 함께 다뤄온 흐름도 이 작은 작품에 응축돼 있다. 프랑스에서 익힌 유화와 프레스코, 판화, 스테인드글라스의 경험과 한국에서 다시 발견한 한지와 서체, 동양적 사유가 긴 시간 축적돼 있었다. ‘정관묘오’에서는 그 여러 경험 가운데 원과 종이, 천연안료와 글씨가 가장 절제된 형태로 결합한다.
작품 크기가 40×40㎝라는 점도 중요하다. 대형 회화처럼 관람자의 몸을 압도하는 방식보다 가까이 다가가 색의 농도와 글씨의 결을 살피게 한다. 작은 사각형 안에 시선을 모으면서 감상은 외부 공간보다 작품 내부의 밀도와 관계를 따라간다.
1990년대 방혜자의 작업은 이후 천연안료와 루시용의 흙, 부직포로 이어지는 물질 탐구의 중요한 시기였다. ‘정관묘오’는 그 가운데 천연안료의 색과 원형의 상징, 내면의 사유가 간결하게 만난다. 이후 재료와 크기, 공간이 확장되더라도 원과 빛, 마음을 연결하는 축은 계속 이어진다.
2011년 ‘하늘의 땅’에서 원은 작품 전체의 외곽이 되고, 2020년 ‘빛의 기쁨 I’에서는 중심의 밝음이 동심원과 함께 사방으로 퍼진다. ‘정관묘오’의 적갈색 원은 그 긴 변화의 앞쪽에서 내면을 향해 밀도를 모은다. 거대한 우주로 나아가기 전, 원은 먼저 마음을 들여다보는 장소가 된다.
‘정관묘오’에서 방혜자는 적갈색 원과 몇 개의 서체, 넓은 여백으로 깊은 사유의 공간을 만들었다. 천연안료는 종이 안으로 스며들며 색의 밀도를 만들고, 원 안의 글씨는 고요한 구조에 생명의 리듬을 더한다.
적갈색 원은 시선을 붙잡고, 서체는 그 안에서 움직이며, 밝은 종이는 두 요소 주변에 긴 호흡을 남긴다. ‘정관묘오’는 방혜자의 원형이 우주의 빛으로 크게 확장되기 전, 고요히 바라보는 행위와 내면의 깨달음을 하나의 작은 원 안에 응축한 작품이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질 원과 빛의 세계는 이처럼 조용하고 밀도 높은 내면의 공간에서도 이미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