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 ‘새와 소녀’, 붉은 새에 담긴 인간과 자연의 교감

소녀의 손에 내려앉은 새, 거친 붓질과 절제된 윤곽으로 완성한 생명의 관계…초기 판화에서 신화적 회화로 이어지는 조형적 변화

2026-10-19     박준식 기자

[KtN 박준식기자]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새와 소녀(Girl with Bird)’에는 붉은 새를 손에 올린 소녀가 등장한다. 검은 부리와 가느다란 다리, 길게 뻗은 꼬리를 가진 새는 작품 중앙에서 선명한 윤곽을 드러낸다. 오른쪽에 자리한 소녀는 붉은 선으로 얼굴과 팔의 형태를 유지하고, 몸통은 황갈색과 녹색의 붓질 속에 어우러진다. 두 존재가 만나는 손 위로 시선이 모이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쉬가예프는 인물의 얼굴과 신체를 간결한 선으로 표현하고 새의 형태에는 붉은색과 검은색의 대비를 집중했다. 주변에는 흙빛을 닮은 갈색과 올리브색, 회녹색이 겹쳐 있다. 거친 붓질과 긁힌 자국,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밝은 색채가 인물과 새를 감싸며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 초기 인물화에서 보여준 세밀한 관찰은 형태를 압축하고 색채의 관계를 넓히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 ‘새와 소녀(Girl with Bird)’, 제작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80×60㎝, 기 드 마우저(Gui de Mauser) 컬렉션, 룩셈부르크.

붉은 새는 작품의 시각적 중심이다. 몸통에는 선명한 적색이 들어갔고 머리와 날개, 꼬리는 검은색으로 정리됐다. 날개의 짧은 붓질과 길게 벌어진 꼬리깃이 몸의 방향을 강조한다. 작은 머리에는 둥근 눈과 뾰족한 부리가 자리하며, 가느다란 다리는 소녀의 손 위에 내려앉아 있다. 몇 가지 색과 선으로 압축된 새의 형상은 주변의 복잡한 붓질과 대비를 이룬다.

소녀의 팔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부드럽게 휘어진다. 붉은 선으로 이어진 팔과 손은 새의 다리와 맞닿으며 작품 중앙에 완만한 곡선을 만든다. 새의 몸은 수평에 가깝게 놓이고 소녀의 팔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서로 다른 방향의 선이 만나는 부분에 시선이 집중된다. 새를 받치는 손의 자세와 안정적으로 앉아 있는 새의 모습에서 두 존재의 친밀한 관계가 전해진다.

소녀의 얼굴은 머리와 이마, 코와 입을 나타내는 간결한 선으로 구성됐다. 붉은 윤곽은 머리에서 목과 어깨로 이어지고, 몸통을 이루는 녹색은 주변의 갈색과 자연스럽게 섞인다. 인물의 형태는 얼굴과 팔에서 뚜렷해지고 몸통으로 내려갈수록 붓질의 흐름에 가까워진다. 인물의 세부보다 새를 향해 내민 팔과 손의 움직임이 강조된 구성이다.

소녀와 새를 연결하는 붉은색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새의 몸통을 채운 적색은 소녀의 얼굴과 팔을 따라 이어지고, 작품 아래쪽의 작은 형상들에서도 반복된다. 새의 붉은 몸과 소녀의 가느다란 윤곽선은 색채의 강도와 사용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면서도 서로 연결된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형태의 접촉뿐 아니라 색의 반복을 통해 표현된다.

캔버스 전체에는 황갈색과 회녹색, 짙은 갈색이 넓게 펼쳐져 있다. 왼쪽 상단의 어두운 색채는 중앙으로 내려오면서 밝은 회녹색과 섞이고, 아래쪽에서는 황토색과 검은색이 겹쳐진다. 여러 방향으로 움직인 붓질과 긁힌 흔적이 남아 있어 표면의 질감이 풍부하다. 배경을 이루는 색채는 인물의 몸과 이어지며 소녀와 새가 놓인 공간을 감싼다.

작품 중앙 아래에는 흰색과 검은색, 노란색의 짧은 붓질이 모여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노란색과 붉은색이 겹친 형상 아래로 짙은 청색의 수직선이 반복된다. 청색의 짧은 선들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문양에 가까운 리듬을 만든다. 유기적인 곡선으로 연결된 소녀와 새, 아래쪽의 직선적인 색채 배열이 서로 다른 조형적 질서를 형성한다.

쉬가예프의 회화에서 이러한 작은 기호와 반복적인 선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연과 인물에서 출발한 형상 주변에 원과 선, 문양을 연상시키는 요소를 배치하면서 작품의 공간을 확장해 왔다. ‘새와 소녀’에서도 인물과 동물의 관계를 중심에 두고 주변에 짧은 선과 색면을 더해 여러 층의 구성을 만들었다.

1986년 색채 리놀륨 판화 ‘비둘기를 든 소녀’와 비교하면 쉬가예프가 같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의 변화가 드러난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소녀와 말, 비둘기가 함께 등장한다. 소녀는 긴 옷을 입고 서 있으며 한 손에는 비둘기를 올리고 다른 손에는 둥근 물체를 들고 있다. 말의 몸통과 머리, 소녀의 얼굴과 옷은 뚜렷한 선과 색면으로 구분된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한 공간에 배치되면서 인물과 동물의 관계가 형성된다.

‘새와 소녀’에서는 소녀와 새의 관계가 더욱 간결하게 정리됐다. 인물의 머리와 팔, 새의 몸통과 다리가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주변은 자유로운 붓질과 색채로 채워졌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 여러 존재의 위치와 방향을 통해 관계를 구성했다면, ‘새와 소녀’에서는 손 위에 내려앉은 새와 소녀의 팔이 두 존재의 연결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두 작품에서 새가 차지하는 위치도 달라졌다.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비둘기가 인물과 말이 함께 등장하는 구성의 일부였다. ‘새와 소녀’에서는 붉은 새가 작품 중앙에서 가장 선명한 형상으로 자리한다. 소녀의 얼굴보다 새의 몸에 강한 색채 대비가 집중되면서 관람자의 시선은 새에서 소녀의 손과 팔로 이동한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다루는 쉬가예프의 관심이 한층 밀도 높은 구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1983년 연필 드로잉 ‘림마’와 1984년 색채 판화 ‘아산바이 아타’에서는 인물의 개별적인 특징을 관찰하는 태도가 두드러졌다. ‘림마’의 여성은 의자에 앉은 자세와 옷의 주름, 주변의 생활공간을 통해 구체적인 일상을 드러낸다. ‘아산바이 아타’에서는 노인의 주름과 수염, 눈매를 세밀하게 새겨 얼굴에 축적된 세월을 표현했다. 사람의 외모와 자세, 생활의 흔적이 인물화의 중요한 요소였다.

‘새와 소녀’에서는 인물의 얼굴과 몸을 이루는 선이 간결해지고 행동의 의미가 앞에 놓인다. 소녀는 새를 손 위에 올린 자세로 표현되고, 새는 몸을 왼쪽으로 향한 채 안정적으로 앉아 있다. 소녀의 머리와 팔, 새의 몸통이 서로 연결되면서 인물의 개별적인 외모보다 두 존재가 맺는 관계가 강조된다.

쉬가예프가 1980년대 후반에 제작한 유화에서도 인간과 동물, 자연의 형상을 새롭게 결합하는 시도가 이어졌다. 1986년 ‘수중 세계’에서는 물고기와 수초, 둥근 기호가 짙푸른 공간에 함께 등장했다. 물고기의 눈과 몸통은 선명하게 남아 있고 주변의 물과 수초는 자유로운 붓질로 표현됐다. 1987년 ‘납치’에서는 붉은 짐승의 몸이 길게 뻗으며 기계와 기호를 연상시키는 형상들과 결합했다. 1989년 ‘호숫가’에서는 자연의 형상이 붉은색과 청록색, 원형과 곡선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구성됐다.

‘새와 소녀’에서도 현실의 생명체를 관찰하는 태도와 형상을 단순화하는 조형적 탐색이 함께 나타난다. 새는 부리와 눈, 몸통과 꼬리를 갖춘 친숙한 생명체로 남아 있지만 색채와 비례는 간결하게 정리됐다. 소녀 역시 머리와 팔의 윤곽을 유지하면서 주변의 색채와 이어진다. 사람과 동물의 구체적인 형태를 출발점으로 삼아 서로 다른 색과 선을 하나의 구성 안에 결합한 것이다.

새의 몸을 이루는 검은색과 붉은색은 주변의 황갈색, 회녹색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붉은색은 작품 중앙에 시각적 무게를 부여하고 검은색은 새의 윤곽을 정리한다. 소녀의 팔에 사용된 붉은 선은 새의 몸과 이어지며 오른쪽에서 중앙으로 시선을 이끈다. 주변의 넓은 갈색과 녹색은 밝은 붉은색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캔버스의 세로형 비례도 두 존재의 관계를 강조한다. 소녀의 머리는 오른쪽 상단에 놓이고 팔은 중앙으로 뻗어 있다. 붉은 새는 상단 중앙에서 왼쪽을 향하며 수평의 움직임을 만든다. 소녀의 얼굴과 팔에서 형성된 곡선은 새의 몸과 만나고, 그 아래에는 여러 색면과 작은 기호가 이어진다. 상단의 인물과 새, 하단의 색채 배열이 세로로 연결되면서 작품 전체에 안정적인 균형을 형성한다.

붓질의 차이도 구성을 풍부하게 만든다. 새의 몸에는 짧고 강한 선이 집중돼 있고 소녀의 윤곽은 가늘고 유연한 붉은 선으로 이어진다. 주변에는 넓게 밀어낸 색과 긁힌 흔적, 짧게 끊어진 붓질이 겹쳐 있다. 한 작품 안에서 세밀한 선과 거친 색면이 함께 사용되면서 형상과 배경 사이에 다양한 질감이 생긴다.

쉬가예프의 후기 회화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신화적 상상력과도 깊이 연결된다. 사람과 동물은 서로 마주하거나 함께 움직이고, 때로는 하나의 형상 안에 결합한다. 전통 문양과 기호는 주변에 놓이며 자연의 생명체와 인간의 기억을 이어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새와 소녀’에서는 이러한 관심이 두 존재의 친밀한 접촉으로 표현된다. 손 위에 앉은 붉은 새는 자연의 생명체이면서 소녀와 관계를 맺는 독립적인 존재로 자리한다.

소녀의 얼굴과 팔을 잇는 붉은 선은 작품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얼굴에서 내려온 선이 몸의 윤곽을 따라 이어지고, 팔의 곡선이 새의 다리와 만난다. 새의 몸통과 소녀의 팔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놓였지만 손 위에서 하나의 연결을 이룬다. 사람과 새를 각각 독립된 대상으로 묘사하면서도 두 존재가 만나는 부분에 조형적 중심을 둔 구성이다.

주변의 색채와 작은 기호들은 이러한 관계를 감싸며 작품의 공간을 넓힌다. 왼쪽의 갈색과 녹색은 넓은 색면으로 펼쳐지고 오른쪽 아래에는 노란색과 붉은색, 청색의 짧은 선들이 모여 있다. 인물과 새의 간결한 형상 주변에 다양한 붓질과 색채가 겹쳐지면서 자연의 생명감과 회화적 움직임이 함께 나타난다.

‘새와 소녀’에는 쉬가예프가 오랫동안 탐색해 온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응축돼 있다. 초기 판화에서 사람과 동물을 구체적인 생활공간에 배치했던 작가는 유화 작업을 통해 형태를 압축하고 색채의 역할을 넓혀갔다. 붉은 새와 소녀의 팔을 중심으로 한 구성에는 현실의 생명체를 관찰하는 태도와 형상을 기호처럼 다루는 감각이 함께 남아 있다.

소녀의 손 위에 앉은 새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선명한 색채와 윤곽을 지닌다. 인물의 몸은 주변의 흙빛과 녹색에 어우러지고, 새의 붉은 몸통은 검은 부리와 꼬리, 가느다란 다리를 통해 또렷한 존재감을 유지한다. 두 존재가 만나는 손 위에서 선과 색채가 연결되며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쉬가예프가 사람과 동물을 통해 탐색해 온 생명의 관계는 ‘새와 소녀’에서 절제된 형상과 거친 붓질, 붉은색의 강한 대비를 통해 밀도 있게 표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