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 ‘가을’, 노란 대지에 선 소녀와 달의 침묵

2002년 유화에 담긴 어린 인물과 초승달, 기호로 변형된 사물들…중앙아시아의 기억을 색채와 형상으로 풀어낸 쉬가예프의 상징회화

2026-10-18     박준식 기자

[KtN 박준식기자] Yuristanbek Shygaev의 2002년작 ‘가을(Autumn)’에는 노란색으로 가득 찬 공간에 흰 모자를 쓴 인물이 서 있다. 가늘게 내려뜬 눈과 작은 입, 길게 이어진 붉은 갈색의 몸이 인물의 모습을 이루고, 오른쪽에는 눈을 닮은 기호가 새겨진 뾰족한 형상이 솟아 있다. 머리 위로는 푸른빛 초승달이 떠 있으며, 아래쪽에는 검은색과 파란색, 붉은색의 사각형들이 겹쳐 있다. 인물과 달, 기호로 변형된 사물들이 노란색 바탕에 배치되면서 가을의 풍경은 고요하고 낯선 공간으로 바뀐다.

쉬가예프의 ‘가을’은 계절을 자연의 풍경보다 인물과 색채, 상징적인 형상의 관계로 표현한 작품이다. 산과 집, 말과 사람을 구체적으로 그렸던 초기 판화에서 출발해 1990년대에는 인간과 동물, 신화적 존재를 결합하는 회화를 발전시켰다. 2000년대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형상들이 더욱 간결해지고, 넓은 색면과 작은 기호들이 독립적인 조형 요소로 자리한다. ‘가을’에서는 어린 인물의 얼굴과 초승달, 기하학적으로 변형된 사물들이 하나의 공간에 놓이며 쉬가예프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 ‘가을(Autumn)’, 2002, 캔버스에 유채, 55×40㎝, 랄프 마레시(Ralf Maresh) 소장, 독일.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작품의 중심에는 흰색의 둥근 모자를 쓴 인물이 자리한다. 모자는 머리 위에서 넓은 원통형으로 솟아 있으며, 흰색과 회색의 가로선들이 겹쳐 있다. 윗부분에는 밝은 흰색이 넓게 펼쳐지고 아래쪽에는 회색과 검은색의 짧은 선들이 이어진다. 모자의 단단한 형태는 인물의 작은 얼굴과 대비되며 시선을 집중시킨다.

인물의 얼굴은 연한 황갈색과 회색으로 표현됐다. 길고 가는 눈은 아래쪽을 향하며, 눈썹과 눈꺼풀은 검은색의 짧은 곡선으로 정리됐다. 코는 작은 선으로 표현됐고 입은 가늘고 짧게 그려졌다. 둥근 얼굴의 윤곽은 아래쪽으로 좁아지며 턱으로 이어진다. 눈매와 입술의 간결한 표현은 인물에게 차분하고 내향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얼굴 아래에는 붉은 갈색의 긴 몸이 이어진다. 어깨는 비교적 좁고 몸통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길게 늘어난다. 몸의 표면에는 붉은색과 갈색, 회색과 흰색의 흔적들이 겹쳐 있다. 일부는 직선으로 이어지고 다른 부분은 작은 사각형이나 원형으로 남아 있다. 인물의 몸은 옷을 입은 사람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여러 기호가 새겨진 기둥처럼 나타난다.

몸통의 왼쪽에는 검은색의 가는 선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다. 세로선과 가로선이 교차하면서 작은 격자무늬를 만들고, 어깨 아래에는 둥근 기호와 짧은 선들이 남아 있다. 오른쪽 어깨와 가슴 부근에도 작은 원형과 선이 나타난다. 이러한 기호들은 인물의 옷에 장식적인 성격을 더하면서 신체의 표면을 하나의 조형적 공간으로 만든다.

인물의 몸 아래쪽에는 흰색과 붉은색의 거친 붓질이 겹쳐 있다. 붉은 갈색의 넓은 면 사이로 밝은 흰색이 드러나며, 아래에는 검은색과 회색의 흔적이 이어진다. 몸통은 바닥과 맞닿는 부분에서 주변의 어두운 색채와 섞인다. 인물의 발이나 다리는 구체적인 형태로 구분되지 않고 긴 몸의 윤곽이 아래쪽의 사각형들과 연결된다.

오른쪽에는 뾰족한 탑이나 동물을 연상시키는 형상이 서 있다. 위쪽은 좁고 길게 솟아 있으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폭이 넓어진다. 회색과 보라색이 섞인 표면에는 검은색의 작은 타원형이 들어 있고, 주변에는 가느다란 선들이 이어진다. 아래쪽에는 붉은색과 갈색의 기하학적 면들이 겹쳐 있어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처럼 나타난다.

뾰족한 형상의 상단에는 검은색의 작은 눈을 연상시키는 기호가 자리한다. 그 아래에는 짧은 가로선과 세로선이 겹쳐 있고, 중간에는 붉은색의 좁은 띠가 둘러져 있다. 형태의 일부는 동물의 머리처럼 읽히고 다른 부분은 탑이나 기둥을 떠올리게 한다. 쉬가예프는 구체적인 사물의 특징을 간결한 선과 색면으로 정리하면서 여러 형상이 겹쳐 보이는 조형적 구조를 만들었다.

인물과 오른쪽 형상 사이에는 작은 원형과 곡선들이 이어져 있다. 노란색과 검은색의 가느다란 선들은 두 존재 사이를 연결하며, 일부는 인물의 몸 가까이에서 시작해 오른쪽 형상의 아래쪽으로 이어진다. 서로 다른 형태를 지닌 두 존재가 하나의 공간에서 관계를 맺는 구성이다.

작품 상단 오른쪽에는 푸른빛 초승달이 떠 있다. 초승달은 회색과 청록색, 푸른색이 겹친 넓은 곡선으로 표현됐으며, 아래쪽으로 길게 휘어진 형태를 지닌다. 노란색의 바탕에서 차가운 색채가 선명하게 드러나며 인물과 오른쪽 형상 위에 놓인 독립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초승달의 표면에는 회색과 청록색의 작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밝은 노란색의 공간과 대비되는 차가운 색채는 작품의 상단에 시각적인 균형을 만든다. 인물의 흰 모자가 왼쪽 위에서 밝은 형태를 이루고, 초승달은 오른쪽 위에서 곡선의 움직임을 만든다. 두 형상은 서로 다른 색채와 형태를 지니면서 작품 상단의 균형을 유지한다.

노란색의 바탕은 작품 전체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밝은 황록색과 연노란색이 섞인 색면은 비교적 균일하게 펼쳐져 있지만 곳곳에 작은 붓질과 색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인물의 얼굴과 모자, 초승달과 오른쪽 형상은 노란색의 넓은 공간에서 독립적으로 드러난다. 밝은 바탕은 작품 전체에 따뜻한 색조를 만들면서도 인물의 고요한 표정과 대비된다.

캔버스 아래쪽에는 검은색과 회색, 파란색과 붉은색의 사각형들이 밀집해 있다. 왼쪽에는 짙은 회색의 넓은 영역이 자리하고, 중앙에는 검은색과 붉은색이 겹친 작은 형태들이 이어진다. 오른쪽에는 파란색의 사각형이 놓여 있으며 그 아래에는 노란색과 붉은색의 작은 색면들이 나타난다. 상단의 넓은 노란색 공간과 하단의 복잡한 기하학적 구조가 대비를 이룬다.

오른쪽 아래의 파란색 사각형은 작품에서 중요한 색채 요소다. 짙은 청색과 밝은 파란색이 겹쳐 있고 내부에는 회색과 검은색의 작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주변에는 검은색과 갈색의 형태들이 이어져 있어 파란색의 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상단의 푸른 초승달과 하단의 파란색 사각형은 작품의 서로 다른 위치에서 차가운 색채를 반복한다.

캔버스의 색채는 노란색과 붉은 갈색, 흰색과 푸른색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노란색은 작품 전체의 바탕을 이루고, 붉은 갈색은 인물의 몸과 오른쪽 형상에 집중된다. 흰색은 인물의 모자와 몸 아래쪽에 나타나며, 푸른색은 초승달과 하단의 사각형에 배치됐다. 따뜻한 색채와 차가운 색채가 서로 다른 위치에서 균형을 이루면서 작품 전체에 차분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가을’이라는 제목은 작품의 색채와 연결된다. 노란색의 넓은 바탕과 붉은 갈색의 인물, 회색과 청록색의 초승달은 계절의 변화를 떠올리게 한다. 인물의 고요한 표정과 주변의 간결한 형상들은 가을의 정적인 분위기와 맞물린다. 쉬가예프는 계절의 풍경을 직접 묘사하는 대신 색채와 인물의 관계를 통해 가을의 정서를 표현했다.

쉬가예프의 회화에서 어린 인물과 동물, 신화적 기호는 오랫동안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1986년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소녀가 비둘기를 손에 올려놓고 말과 함께 서 있었다. 소녀의 모습은 비교적 구체적으로 표현됐고, 말과 비둘기 역시 분명한 윤곽을 지녔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현실의 모습으로 구성된 작품이었다.

1990년 ‘여행자들’에서는 두 인물의 몸이 길고 단순한 형태로 변형됐다. 붉은 인물과 검은 인물이 넓은 대지 위에 나란히 서 있었고, 주변에는 기마상과 산, 작은 기호들이 등장했다. 인물의 신체는 기둥처럼 길게 늘어났으며 자연의 지형과 조형적인 관계를 맺었다. ‘가을’에서도 인물의 몸은 길고 단순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얼굴과 모자의 특징이 더욱 강조됐다.

1997년 ‘자밀라’에서는 두 얼굴이 겹쳐지고 분홍빛 새가 날개를 펼치며 인물의 아래쪽을 가로질렀다. 인물의 얼굴과 새의 움직임이 결합하면서 인간의 감정과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이 만들어졌다. ‘가을’에서는 인물의 얼굴과 길게 늘어난 몸, 오른쪽의 상징적 형상이 가까운 거리에 놓인다. 인간과 상징적 존재의 관계가 더욱 간결한 구조로 정리된 것이다.

2000년 ‘술레이만 산’에서는 자연의 산이 거대한 삼각형으로 압축됐다. 삼각형의 주변에는 작은 사각형과 원형, 눈과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기호들이 흩어져 있었다. 자연의 지형과 전통적인 문양이 기하학적 구조로 결합한 작품이었다. ‘가을’에서는 이러한 기하학적 요소가 인물의 몸과 주변 사물에 스며들었다. 몸통의 작은 격자무늬와 원형, 오른쪽 형상의 눈을 닮은 기호, 아래쪽의 사각형들이 작품 전체에 반복된다.

‘가을’의 인물은 어린아이를 연상시키는 얼굴을 지니고 있지만 몸은 길게 늘어난 기하학적 구조로 표현됐다. 둥근 얼굴과 흰 모자는 인물의 개별적인 특징을 드러내고, 붉은 갈색의 몸은 작은 기호들이 새겨진 하나의 형태로 나타난다. 현실의 인물과 상징적인 조형언어가 결합한 구성이다.

오른쪽의 뾰족한 형상도 쉬가예프 회화에서 반복되는 상징적 존재와 연결된다. 1990년 ‘산책’에서는 여성과 뿔을 닮은 머리를 가진 검은 형상이 보랏빛 공간에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존재는 서로를 향해 팔을 뻗으며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가을’에서는 인물과 뾰족한 형상이 나란히 놓이고 그 사이에는 가느다란 선들이 이어진다. 서로 다른 존재가 가까운 공간에서 관계를 맺는 방식이 반복된다.

인물의 얼굴은 작품의 가장 섬세한 부분이다. 가늘게 내려뜬 눈과 작은 입, 둥근 턱은 짧은 선으로 정리돼 있으며, 얼굴의 밝은 색채는 붉은 갈색의 몸과 대비된다. 눈매는 정면을 향하면서도 아래쪽으로 내려가 있어 조용하고 사색적인 인상을 만든다. 인물의 얼굴과 몸 사이의 형태적 차이는 작품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강화한다.

초승달은 작품 상단에서 인물과 상징적 형상을 감싸는 요소로 작용한다. 푸른빛의 곡선은 노란색의 넓은 공간에 놓여 있고, 아래쪽의 인물과 오른쪽 형상은 수직적인 구조를 이룬다. 초승달의 곡선과 인물의 직선적인 몸, 오른쪽 형상의 뾰족한 윤곽이 서로 다른 방향의 움직임을 만든다.

쉬가예프는 ‘가을’에서 구체적인 인물과 상징적 형상, 넓은 색면을 결합했다. 어린 인물의 얼굴과 흰 모자는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오른쪽의 뾰족한 형상과 초승달은 주변의 상징적 공간을 구성한다. 하단의 사각형들은 여러 색채가 겹친 복잡한 구조를 만들며 상단의 넓은 노란색 바탕과 대비된다.

2002년의 ‘가을’은 쉬가예프가 1990년대에 발전시킨 인간과 신화적 존재의 관계를 더욱 간결한 형태로 정리한 작품이다. 인물의 몸은 기하학적으로 변형됐고, 주변에는 눈을 닮은 기호와 초승달, 작은 사각형들이 놓여 있다. 자연의 계절을 떠올리게 하는 노란색과 붉은 갈색은 작품의 주요 색채를 이루며, 푸른색의 초승달과 하단의 사각형은 차가운 색채의 변화를 더한다.

‘가을’의 인물은 노란색의 넓은 공간에 조용히 서 있다. 흰 모자 아래의 가늘고 긴 눈매와 작은 입, 붉은 갈색의 길게 늘어난 몸은 인물의 고요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오른쪽의 뾰족한 형상과 상단의 초승달, 아래쪽의 기하학적 사각형들이 함께 놓이면서 현실의 인물과 상징적인 기호가 하나의 회화를 이룬다. 쉬가예프는 계절의 풍경을 색채와 인물의 관계로 압축하고, 중앙아시아의 신화적 상상력을 간결한 조형언어로 표현했다. ‘가을’은 인간의 모습과 상징적 형상이 넓은 색면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작품으로, 쉬가예프가 2000년대에 발전시킨 서정적 상징회화의 특징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