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 ‘산책’, 보랏빛 대지에서 마주한 인간과 신화적 존재
길게 뻗은 팔과 검은 동물 형상, 자주색과 진홍색의 대비…1990년 유화에 담긴 인간과 자연의 공존, 신체와 기호의 새로운 결합
[KtN 박준식기자]보랏빛 공간에 한 여성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왼팔은 캔버스 가장자리까지 길게 뻗어 있고, 오른팔은 검은 동물 형상을 향한다. 뒤로 길게 흩날리는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과 하늘을 향해 치켜든 얼굴, 가늘게 늘어난 다리가 인물의 움직임을 강조한다. 오른쪽에는 뿔처럼 갈라진 머리와 길쭉한 몸통, 가느다란 팔다리를 가진 검은 형상이 서 있다. 두 존재 사이에는 짧은 거리가 남아 있으며, 여성의 손끝은 검은 형상의 몸에 닿기 직전까지 뻗어 있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1990년작 ‘산책(Walk)’은 인간과 동물의 형상을 결합해온 작가의 관심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여성의 신체는 밝은 살색으로 표현됐고 검은 존재는 거친 질감과 단순한 윤곽으로 구성됐다. 두 형상은 보라색 바탕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색채와 형태를 유지한다. 오른쪽의 진홍색 영역은 검은 형상의 뒤편에 자리하며 작품에 강한 색채 대비를 더한다.
여성의 몸은 세로로 길게 늘어난 비례를 지닌다. 좁은 어깨와 가는 팔, 길게 이어지는 다리가 신체의 수직적인 움직임을 강조한다. 얼굴은 오른쪽 위를 향하고 있으며 작은 눈과 코, 입은 간결한 선으로 표현됐다. 밝은 피부색에는 회색과 갈색의 흔적이 겹쳐 있고, 복부와 다리에는 물감의 질감이 남아 있다. 인물의 신체는 실제 인체의 비례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팔과 다리를 길게 늘여 조형적인 긴장감을 만든다.
여성의 머리카락은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머리 뒤에서 왼쪽으로 길게 뻗은 짙은 갈색의 덩어리는 캔버스 가장자리까지 이어진다. 머리카락에는 갈색과 검은색, 붉은색의 짧은 선들이 겹쳐 있어 바람에 날리는 듯한 움직임을 만든다. 몸은 정면에 가깝게 서 있지만 머리카락은 강하게 왼쪽으로 뻗어 있어 정적인 자세와 동적인 흐름이 함께 나타난다.
머리카락의 긴 수평선은 여성의 팔과 연결된다. 왼팔은 머리카락 아래에서 캔버스 가장자리로 뻗고, 오른팔은 검은 형상을 향해 길게 이어진다. 두 팔이 만들어내는 수평적인 구조와 길게 늘어난 다리의 수직적인 구조가 교차하면서 인물의 몸은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중심축을 형성한다.
오른쪽의 검은 형상은 여성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됐다. 머리에서는 두 개의 뿔을 연상시키는 굵은 선이 위쪽으로 갈라지고, 몸통은 좁고 길게 이어진다. 가운데에는 굵은 검은색의 면이 놓여 있으며 짧은 팔과 길게 뻗은 다리가 연결된다. 몸의 표면에는 갈색과 회색의 작은 흔적이 남아 있어 단순한 검은 실루엣보다 거친 질감을 드러낸다.
검은 형상의 머리는 나뭇가지와 동물의 뿔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왼쪽으로 길게 뻗은 선은 여성의 손이 향하는 방향과 연결되고, 오른쪽의 굵은 선은 캔버스 상단으로 뻗는다. 몸통은 길고 좁으며 다리는 아래로 벌어져 있다. 인간의 직립 자세와 동물의 뿔, 나무의 가지를 연상시키는 요소들이 하나의 형상에 결합됐다.
여성과 검은 형상은 서로 다른 신체를 지니지만 자세에서는 공통점이 나타난다. 두 존재 모두 길게 늘어난 다리로 서 있고, 팔은 옆으로 뻗어 있다. 여성의 몸은 밝은 피부색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졌고 검은 형상은 어두운 색과 거친 직선으로 구성됐다. 서로 다른 형태가 비슷한 자세를 취하면서 두 존재 사이에 시각적인 대응 관계가 형성된다.
여성의 오른손은 검은 형상의 왼쪽으로 뻗은 부분을 향한다. 가늘고 긴 팔 끝에는 손가락을 나타내는 짧은 선들이 펼쳐져 있다. 검은 형상의 팔은 여성의 손보다 높은 위치에서 왼쪽으로 뻗어 있다. 두 선은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향하지만 직접 겹치지 않는다. 작은 간격이 두 존재 사이의 긴장감을 만들고, 관람자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손끝으로 모은다.
작품 제목인 ‘산책’은 두 존재의 관계를 살펴보게 한다. 여성과 검은 형상은 같은 공간에 서 있으며 서로를 향해 팔을 뻗고 있다. 여성의 긴 머리카락과 벌어진 팔, 검은 형상의 뿔과 다리는 각각 다른 움직임을 나타내지만 전체적으로 나란히 선 구성을 이룬다. 쉬가예프는 두 존재를 마주 보게 배치하면서 인간과 신화적 존재가 함께 있는 상황을 회화적으로 표현했다.
캔버스의 넓은 보라색은 두 형상을 연결하는 바탕이다. 왼쪽의 보라색은 짙고 어두운 색조를 띠며 여성의 밝은 신체를 강조한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보라색은 진홍색과 맞닿고, 검은 형상은 두 색채의 경계에 서 있다. 색채의 경계와 인물의 위치가 맞물리면서 작품 전체에 분명한 구획이 형성된다.
오른쪽의 진홍색은 검은 형상의 뒤편을 크게 채운다. 보라색과 진홍색의 경계는 곡선으로 이어지며 검은 형상의 몸통과 겹친다. 붉은색은 위쪽에서 넓게 펼쳐지고 아래쪽에서는 검은 다리 사이로 드러난다. 강한 붉은색과 검은색의 대비는 신화적 형상의 존재감을 강조하고, 왼쪽의 밝은 인체와 다른 색채의 영역을 만든다.
보라색과 진홍색은 모두 강한 채도를 지닌 색이다. 쉬가예프는 두 색을 넓게 펼쳐 인물과 검은 형상이 놓일 공간을 만들었다. 색채는 인물의 피부색과 검은 형상의 윤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며 작품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보라색의 차가운 느낌과 진홍색의 따뜻한 느낌이 맞물리면서 두 존재 사이에 감각적인 대비가 생긴다.
캔버스 표면에는 붓질과 긁힌 흔적이 넓게 남아 있다. 보라색의 바탕에는 여러 방향으로 움직인 선과 물감의 두께 차이가 드러나고, 진홍색의 영역에도 짧은 붓질이 겹쳐 있다. 여성의 피부에는 회색과 갈색의 작은 흔적들이 흩어져 있으며 검은 형상의 몸통에는 거친 질감이 집중돼 있다. 서로 다른 표면의 질감이 형상과 색채의 차이를 더욱 강조한다.
여성의 밝은 신체는 보라색 바탕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가늘게 늘어난 팔과 다리는 넓은 보라색의 공간에서 또렷하게 드러나고, 머리카락의 짙은 갈색은 수평으로 긴 움직임을 만든다. 검은 형상은 진홍색과 보라색의 경계에서 굵은 윤곽을 유지한다. 밝은 인체와 어두운 형상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배경과 관계를 맺는다.
쉬가예프가 1980년대 제작한 작품들과 비교하면 ‘산책’에서 인물과 동물의 관계가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1986년 색채 판화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소녀와 말, 비둘기가 함께 등장했다. 소녀는 긴 옷을 입고 서 있었고 말은 그 앞에 자리했다. 인간과 동물은 각각 분명한 윤곽을 지니며 현실의 공간에서 관계를 맺었다.
‘산책’에서는 인간의 형상이 남아 있는 가운데 동물의 모습이 신화적 존재에 가까운 형태로 바뀌었다. 검은 형상은 뿔과 나뭇가지, 인간의 팔다리를 연상시키는 요소를 함께 지닌다. 여성과 검은 형상은 비슷한 자세로 서 있으며 팔을 뻗어 서로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간다. 현실의 동물과 인간을 함께 배치하던 방식이 인간과 상징적 존재의 관계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확장된 것이다.
1987년 ‘납치’에서는 붉은 짐승의 몸이 길게 늘어나며 바퀴와 기호를 연상시키는 형상과 결합했다. 동물의 신체와 추상적인 기호가 서로 얽히면서 현실의 생명체와 상징적 형태의 경계가 흐려졌다. ‘산책’의 검은 형상 역시 여러 생명체와 사물의 특징을 하나의 몸에 결합했다. 다만 ‘납치’의 형상이 가로로 길게 뻗으며 강한 이동감을 만들었다면 ‘산책’에서는 직립한 자세로 여성과 마주한다.
1990년 ‘매의 위엄’에서도 동물의 구체적인 모습과 상징적인 형상들이 함께 등장했다. 높은 언덕에 앉은 매는 굽은 부리와 노란 눈, 붉은 가슴을 지닌 채 뚜렷한 모습을 유지했다. 주변에는 빛의 기둥과 거대한 원형, 뿔을 닮은 곡선과 반복적인 문양이 펼쳐졌다. ‘산책’에서는 이러한 상징적 요소들이 검은 형상의 몸 자체에 결합하면서 두 존재의 관계가 더욱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쉬가예프의 회화에서 동물과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 신화적 상상력을 구성하는 중요한 존재들이다. 사람과 동물이 서로 마주하거나 함께 움직이고, 때로는 하나의 신체 안에 결합하는 방식이 반복된다. ‘산책’에서는 여성의 인체와 검은 존재가 각각 독립적인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팔과 자세의 대응을 통해 관계를 맺는다. 두 존재가 공유하는 보라색의 공간은 인간과 신화적 존재가 함께 놓이는 회화적 세계를 형성한다.
여성의 신체 비례는 작품의 조형적 성격을 더욱 강조한다. 길게 늘어난 다리와 좁은 허리, 가느다란 팔은 실제 인체의 비례를 변형해 세로형 캔버스에 맞춰 구성됐다. 얼굴은 작은 눈과 간결한 윤곽으로 정리되고, 머리카락은 수평으로 길게 뻗어 있다. 신체의 수직적인 길이와 머리카락의 수평적인 움직임이 결합하면서 여성의 자세에 강한 리듬이 생긴다.
검은 형상도 길고 좁은 몸통과 벌어진 다리로 수직적인 구조를 만든다. 머리에서 뻗은 두 개의 굵은 선은 위쪽으로 갈라지고, 몸통은 아래로 곧게 이어진다. 여성의 가는 다리와 검은 형상의 굵은 다리가 서로 대응하며 작품 하단에 안정적인 균형을 만든다. 두 존재의 자세가 닮아 있기 때문에 형태와 색채의 차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두 형상 사이의 공간은 보라색으로 채워져 있다. 여성의 손끝과 검은 형상의 팔 사이에는 작은 간격이 남아 있고, 아래쪽에서는 두 존재의 다리가 서로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두 형상은 가까이 있지만 각각의 신체를 유지한다. 쉬가예프는 인물과 신화적 존재를 나란히 세워 서로 다른 존재가 공존하는 관계를 표현했다.
작품 하단의 어두운 녹색 띠는 두 존재가 서 있는 바닥을 이룬다. 여성의 발과 검은 형상의 다리는 같은 수평선에 닿아 있으며, 세로로 길게 늘어난 신체가 아래쪽에서 하나의 기준을 얻는다. 바닥의 좁은 녹색은 넓은 보라색과 진홍색을 받치면서 작품 전체의 구도를 안정시킨다.
쉬가예프의 초기 인물화에서는 얼굴과 자세, 주변의 생활공간을 통해 인물의 개별적인 특징을 드러냈다. 1983년 연필 드로잉 ‘림마’에서는 의자에 앉은 여성의 자세와 옷의 주름, 실내의 사물들이 세밀하게 표현됐다. 1984년 ‘아산바이 아타’에서는 노인의 눈매와 주름, 수염이 촘촘한 선으로 묘사됐다. 인물의 외모와 생활의 흔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책’에서는 여성의 신체가 길게 변형되고 얼굴의 세부는 간결해졌다. 인물의 개별적인 특징보다 두 팔을 벌린 자세와 검은 형상을 향한 손끝이 강조된다. 신체의 비례와 움직임을 통해 인물의 존재를 구성하고, 그 옆에 신화적 형상을 배치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확장한 것이다.
쉬가예프는 작품 전체를 보라색과 진홍색, 밝은 피부색과 검은색의 대비로 조직했다. 여성의 몸은 밝은 색채로, 검은 형상은 어두운 색채로 표현됐고 두 존재는 보라색을 공유한다. 오른쪽의 진홍색은 검은 형상의 뒤편에 놓이며 작품에 강한 색채의 중심을 더한다. 색채의 구분이 두 존재의 차이를 드러내고, 비슷한 자세와 뻗은 팔이 두 형상의 관계를 연결한다.
‘산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여성의 오른손과 검은 형상의 팔이 가까워지는 지점이다. 여성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오른쪽으로 펼쳐져 있고 검은 형상의 굵은 선은 왼쪽을 향한다. 서로 다른 두 선이 좁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면서 작품의 긴장감이 형성된다. 쉬가예프는 두 존재의 관계를 복잡한 동작이나 서사보다 손끝의 거리와 자세의 대응을 통해 표현했다.
1990년 ‘산책’은 쉬가예프가 현실의 인간과 동물을 관찰하던 초기 작업에서 신화적 형상을 결합하는 회화로 발전한 흐름을 잘 드러낸다. 여성은 밝은 피부색과 길게 늘어난 신체로 표현되고, 검은 존재는 뿔과 나뭇가지, 인간의 팔다리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구성됐다. 두 형상은 보라색과 진홍색의 공간에서 나란히 서 있으며 서로를 향해 팔을 뻗는다.
여성의 긴 머리카락은 왼쪽으로 흩날리고 검은 형상의 뿔은 위쪽으로 갈라진다. 밝은 인체와 거친 검은 형상은 서로 다른 질감을 유지하지만 비슷한 자세와 팔의 방향을 통해 연결된다. 쉬가예프는 인간과 신화적 존재를 하나의 공간에 배치하면서 자연의 생명체와 상징적 형상이 공존하는 세계를 구축했다. ‘산책’에서 두 존재 사이에 남은 짧은 거리는 인간과 자연, 현실과 신화가 만나는 관계를 응축한 조형적 중심으로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