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 ‘죽음의 계곡’, 생명의 흔적이 뒤엉킨 불안의 풍경
1990년 대형 유화에 펼쳐진 분홍빛 신체와 검은 선, 뼈를 연상시키는 형상들…구체적 풍경에서 벗어나 생명과 소멸의 경계를 탐색한 쉬가예프의 회화
[KtN 박준식기자]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1990년작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에는 거대한 분홍빛 형상이 캔버스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다. 살갗을 연상시키는 둥근 형태 안에는 짙은 청색과 검은색의 조각들이 박혀 있고, 주변으로 가느다란 선과 관처럼 굽은 형상들이 뻗어 있다. 왼쪽에는 어두운 나뭇가지와 녹색의 흔적이 겹치고, 오른쪽에는 검은색의 굵은 선과 둥근 기호, 붉은 아치형 구조가 자리한다. 황갈색과 녹색, 분홍색과 회색이 뒤섞인 공간에는 생명체의 신체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과 기계적 구조를 닮은 형태가 함께 나타난다.
‘죽음의 계곡’은 쉬가예프가 1980년대 후반부터 발전시켜 온 신화적 회화의 또 다른 방향을 드러낸다. 동물과 인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남겨두면서 주변에 상징적인 기호를 배치했던 작업에서 나아가, 신체와 자연, 사물의 형태를 더욱 복잡하게 결합했다. 캔버스 전체를 채운 유기적인 곡선과 거친 붓질은 하나의 풍경을 구성하면서도 여러 생명체의 흔적이 뒤섞인 듯한 인상을 만든다.
캔버스 중앙의 분홍빛 형상은 작품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왼쪽의 황갈색과 녹색 사이에서 시작해 오른쪽 아래로 길게 이어지며, 중간에는 둥글게 부풀어 오른 형태가 나타난다. 표면에는 회색과 자주색, 갈색이 겹쳐 있어 피부나 근육을 연상시키는 질감을 만든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붉은색이 짙어지고, 오른쪽의 아치형 구조와 맞닿으며 하나의 거대한 유기적 형태로 이어진다.
분홍빛 형상의 내부에는 짙은 청색과 검은색의 작은 조각들이 길게 배열돼 있다. 일부는 뼈나 치아를 떠올리게 하고, 다른 부분은 금속 조각이나 날카로운 파편처럼 나타난다. 작은 형상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놓이면서도 크기와 방향이 조금씩 달라진다. 밝은 분홍색 바탕 위에 어두운 조각들이 모여 있어 작품 중앙에 강한 시각적 긴장을 만든다.
이러한 구성은 신체의 내부가 드러난 듯한 인상을 준다. 분홍빛의 넓은 면은 살갗을 닮았고, 그 안에 놓인 어두운 조각들은 몸속의 뼈나 이물질을 연상시킨다. 쉬가예프는 생명체의 외형을 완결된 윤곽으로 표현하기보다 신체의 일부를 확대하고 변형해 낯선 구조로 만들었다. 부드러운 곡선과 날카로운 조각이 한 형상 안에 놓이면서 생명의 연약함과 물질적인 긴장감이 함께 드러난다.
작품 왼쪽에는 어두운 나무를 닮은 형상이 세로로 뻗어 있다. 검은 줄기에서 가느다란 가지들이 갈라지고, 그 주변에는 갈색과 녹색, 붉은색의 짧은 선들이 겹친다. 가지는 위쪽으로 솟거나 옆으로 휘어지며 주변의 색채와 섞인다. 나무의 구조를 떠올리게 하는 검은 선은 중앙의 분홍빛 형상과 대비를 이루면서 자연의 흔적을 남긴다.
왼쪽 아래에는 밝은 노란색과 흰색이 길게 이어진다. 거친 붓질과 가느다란 선이 겹쳐진 밝은 부분은 어두운 갈색과 녹색 사이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위쪽의 검은 나뭇가지와 아래쪽의 밝은 곡선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작품 왼쪽에 복잡한 흐름을 만든다. 자연의 줄기나 뿌리, 물길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들이 하나의 공간에 겹쳐 있다.
캔버스 상단에는 청록색의 굽은 형상이 놓여 있다. 짧은 마디들이 이어진 형태는 애벌레나 척추의 일부를 연상시키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어진다. 밝은 청록색과 어두운 윤곽이 반복되면서 주변의 황갈색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그 아래에는 붉은색과 주황색의 가느다란 곡선이 길게 내려오고, 주변에는 검은 선과 작은 기호들이 흩어져 있다.
청록색의 굽은 형상은 중앙의 분홍빛 구조와도 연결된다. 위쪽의 마디처럼 반복되는 형태와 중앙의 뼈를 닮은 조각들이 서로 다른 위치에 놓여 있지만 신체의 일부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쉬가예프는 이러한 형상들을 캔버스 곳곳에 배치해 자연의 생명체와 신체의 내부 구조가 뒤섞인 듯한 공간을 만들었다.
오른쪽 상단에는 분홍색의 넓은 색면이 펼쳐져 있다. 왼쪽의 황갈색과 녹색에 비해 밝고 부드러운 색조를 지니며 중앙의 어두운 선들과 대비를 이룬다. 분홍색의 영역에는 푸른색과 검은색의 가느다란 선이 지나가고, 아래쪽에는 둥근 기호가 자리한다. 넓은 색면과 작은 기호가 함께 놓이면서 작품 오른쪽에도 독립적인 조형적 흐름이 형성된다.
오른쪽 중앙의 둥근 기호는 가느다란 줄기와 연결돼 있다. 연한 청록색의 타원형 안에는 작은 점과 짧은 선들이 남아 있고, 아래로는 길고 가는 선이 이어진다. 식물의 열매나 세포, 기계의 계기판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다. 주변의 검은색 굵은 선과 대비되는 가늘고 밝은 윤곽이 이 부분을 강조한다.
둥근 기호의 왼쪽에는 검은색의 굵은 선이 직각에 가깝게 꺾여 있다. 위쪽에서 시작한 선은 오른쪽으로 뻗다가 아래로 길게 내려오며 주변의 회색과 흰색을 가른다. 유기적인 곡선이 많은 작품에서 이처럼 단단한 직선 구조는 특별한 역할을 한다. 나무와 신체, 생물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곡선들 사이에 기계적인 구조가 놓이면서 서로 다른 성격의 형상들이 충돌한다.
캔버스 오른쪽 아래에는 붉은 아치형 구조가 자리한다. 두 개의 길고 굵은 곡선이 아래에서 위로 솟아 있으며 내부에는 검은색과 녹색, 갈색이 겹쳐 있다. 아치 안쪽에는 짧은 수평선들이 반복돼 있어 문이나 통로를 연상시키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붉은 윤곽은 중앙의 분홍빛 형상과 이어지며 작품 하단에 강한 색채의 중심을 형성한다.
아치형 구조는 작품의 다른 부분과 구별되는 질서를 지닌다. 중앙의 분홍빛 형상이 부드럽고 불규칙한 곡선으로 이루어졌다면 오른쪽 아래의 아치는 비교적 분명한 외곽과 반복적인 내부 선을 갖고 있다. 신체를 연상시키는 형상과 건축적인 구조가 한 공간에서 만나는 구성이다. 쉬가예프는 자연과 신체, 사물의 특징을 서로 다른 위치에 배치하면서 복합적인 공간을 구축했다.
작품의 색채는 황갈색과 녹색을 바탕으로 분홍색과 회색, 청록색과 붉은색이 겹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왼쪽의 어두운 갈색과 녹색은 자연의 흙과 식물을 떠올리게 하고, 중앙의 분홍색은 신체의 감각을 강조한다. 오른쪽의 밝은 분홍색과 붉은 아치는 작품에 따뜻한 색채를 더하며, 검은 선과 청록색의 작은 형상들이 그 사이에서 강한 대비를 만든다.
쉬가예프는 색채의 경계를 명확하게 나누기보다 여러 색을 겹치고 밀어내며 형상을 만들었다. 중앙의 분홍빛 구조에는 회색과 자주색이 스며들고, 왼쪽의 황갈색과 녹색은 서로 뒤섞여 있다. 붓질의 방향과 물감의 두께가 달라지는 부분에서는 작은 형상들이 나타났다가 주변의 색채에 흡수된다. 작품 전체에 남은 긁힌 자국과 가느다란 선은 표면의 질감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1986년 유화 ‘수중 세계’와 비교하면 쉬가예프가 자연의 생명체를 다루는 방식의 변화가 드러난다. ‘수중 세계’에서는 물고기의 눈과 몸통, 지느러미가 분명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짙푸른 물속에는 여러 물고기와 수초, 둥근 기호가 함께 등장했지만 각각의 생명체는 독립적인 모습을 유지했다.
‘죽음의 계곡’에서는 생명체의 형태가 더욱 세분화됐다. 상단의 청록색 마디와 중앙의 뼈를 닮은 조각, 왼쪽의 나뭇가지와 오른쪽의 둥근 기호가 서로 다른 위치에 흩어져 있다. 생명체의 전체 모습보다 몸의 일부와 자연의 흔적이 강조되면서 작품의 공간은 더욱 복잡해졌다. 물속 생물을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배치했던 구성에서 신체와 자연의 부분적인 형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옮겨간 것이다.
1987년 ‘납치’에서도 쉬가예프는 동물의 신체와 기계적인 구조를 결합했다. 길게 뻗은 붉은 몸체에는 바퀴와 원형, 검은 곡선이 이어져 있었다. 동물의 몸을 연상시키는 형태가 기계적인 기호와 결합하면서 강한 이동감을 만들었다. ‘죽음의 계곡’에서는 이러한 결합이 작품 전체로 확장된다. 검은 직선과 둥근 기호, 붉은 아치와 신체를 닮은 형상들이 캔버스 곳곳에 놓여 있다.
1989년 ‘호숫가’에서는 붉은 덩어리와 청록색의 생명체, 원형과 십자형의 기호가 짙푸른 공간에 등장했다. 자연의 형상이 색채와 기호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됐고, 구체적인 풍경은 추상적인 이미지로 바뀌었다. ‘죽음의 계곡’에서는 이러한 조형적 관심이 신체의 질감과 내부 구조를 떠올리게 하는 형태로 이어진다. 색채의 넓은 면과 작은 기호가 겹치면서 생명과 물질의 경계가 복잡하게 얽힌다.
1990년 ‘매의 위엄’과 ‘산책’에서도 쉬가예프는 자연의 생명체와 신화적 존재를 결합했다. ‘매의 위엄’에서는 높은 언덕에 앉은 매와 빛의 기둥, 거대한 원형과 문양이 함께 등장했고, ‘산책’에서는 여성과 뿔을 닮은 머리를 가진 검은 형상이 보랏빛 공간에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작품에서는 매와 여성, 검은 형상이 비교적 분명한 윤곽을 유지했다.
‘죽음의 계곡’에서는 생명체의 흔적이 작품 전체에 분산돼 있다. 중앙의 분홍빛 형상과 상단의 청록색 마디, 왼쪽의 나뭇가지, 오른쪽의 둥근 기호가 서로 다른 생물과 사물의 특징을 품고 있다. 쉬가예프는 여러 형상을 한 공간에 배치하면서 신체와 자연, 기계적 구조가 뒤섞인 세계를 만들었다. 구체적인 인물이나 동물의 모습보다 생명체를 이루는 부분적인 형태와 그 관계가 중요해진 것이다.
작품 제목인 ‘죽음의 계곡’은 이러한 형상들을 하나의 주제로 묶는다. 신체를 닮은 분홍빛 구조와 뼈를 연상시키는 조각, 어두운 나뭇가지와 마디처럼 이어진 청록색 형상은 생명의 흔적과 소멸의 감각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밝은 색채와 어두운 선이 뒤섞인 공간에는 생명체의 움직임과 해체된 신체의 이미지가 공존한다. 쉬가예프는 죽음을 하나의 사건으로 묘사하기보다 여러 형태가 변형되고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표현했다.
캔버스의 세로형 구성도 이러한 복잡한 관계를 강화한다. 상단의 청록색 마디와 아래로 내려오는 붉은 곡선, 중앙의 분홍빛 형상과 오른쪽의 검은 직선, 하단의 붉은 아치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선과 좌우로 퍼지는 색면이 교차하면서 작품 전체에 강한 흐름이 형성된다.
중앙의 분홍빛 형상은 이러한 움직임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왼쪽의 황갈색과 녹색 사이에서 시작한 곡선은 오른쪽으로 크게 부풀어 오르고, 아래쪽에서는 붉은 아치형 구조와 가까워진다. 주변의 검은 선과 청록색의 작은 형상들이 중앙을 향하거나 그 주변을 지나가면서 작품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처럼 연결된다.
쉬가예프의 회화에서 인간과 자연, 동물과 기호는 오랫동안 중요한 소재였다. 초기 판화에서는 산과 집, 사람과 동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관찰했고, 1980년대 후반의 유화에서는 생명체의 형태를 단순화하거나 다른 기호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조형언어를 발전시켰다. ‘죽음의 계곡’은 이러한 탐색이 신체의 내부와 자연의 흔적, 기계적 구조를 연상시키는 형상으로 확장된 작품이다.
1990년의 ‘죽음의 계곡’에는 쉬가예프가 자연과 생명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가 집약돼 있다. 중앙의 분홍빛 형상에는 뼈를 닮은 어두운 조각들이 남아 있고, 상단에는 마디처럼 이어진 청록색 구조가 놓여 있다. 왼쪽의 나뭇가지와 오른쪽의 둥근 기호, 붉은 아치는 서로 다른 생명과 사물의 흔적을 품고 있다. 쉬가예프는 이러한 형상들을 거친 붓질과 겹쳐진 색채로 연결하며 생명과 소멸이 뒤엉킨 회화적 공간을 완성했다.
‘죽음의 계곡’에서 생명의 흔적은 구체적인 인물이나 동물의 모습보다 신체를 연상시키는 곡선과 마디, 뼈와 파편을 닮은 작은 형상으로 남아 있다. 황갈색과 녹색, 분홍색과 회색이 뒤섞인 캔버스에는 자연의 줄기와 뿌리, 신체의 내부와 기계적 구조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함께 놓여 있다. 쉬가예프는 자연을 관찰하던 초기의 시선에서 출발해 생명체의 형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조형적 탐색을 이어갔다. ‘죽음의 계곡’은 생명의 외형을 넘어 그 내부와 흔적까지 회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작품으로, 쉬가예프가 1990년 전후 발전시킨 신화적 상상력의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