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 ‘후잔트의 기억’, 도시의 흔적을 인물과 색채로 재구성한 회화
2002년 유화에 겹쳐진 얼굴과 건축적 형상, 강렬한 노란색과 붉은색…중앙아시아의 도시를 추상적 조형언어로 풀어낸 기억의 풍경
[KtN 박준식기자]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2002년작 ‘후잔트의 기억(Memory about Hudjant)’에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 얼굴과 길게 늘어난 인체, 건축물의 일부를 연상시키는 형상들이 좁은 캔버스에 겹쳐 있다. 왼쪽 상단에는 붉은 얼굴이, 오른쪽에는 흰색과 보라색으로 이루어진 길쭉한 형상이 자리한다. 중앙을 가로지르는 인체의 윤곽 주변으로 청록색과 자주색, 붉은색이 뒤엉키고, 오른쪽 아래에는 노란색이 강하게 드러난다. 여러 형상이 밀집한 구성 속에서 인물의 모습은 주변의 색채와 뒤섞이며 복합적인 공간을 형성한다.
‘후잔트의 기억’은 중앙아시아의 도시 후잔트(Khujand)를 제목으로 삼은 작품이다. 오늘날 타지키스탄 북부에 위치한 후잔트는 오랜 도시 역사를 지닌 곳으로, 쉬가예프는 도시의 모습을 건축적인 형태와 인물의 흔적, 강렬한 색채의 결합으로 표현했다. 작품에는 거리의 원근법적 풍경보다 여러 형상이 중첩된 공간이 펼쳐져 있다. 도시에서 경험한 인상과 기억을 하나의 회화적 구조로 압축한 구성이다.
좁고 긴 캔버스의 상단에는 여러 얼굴과 형상이 겹쳐 있다. 왼쪽 위에는 붉은색의 얼굴이 부분적으로 드러나며 검은색의 가는 선으로 눈이 표현돼 있다. 얼굴 아래에는 회색과 청록색의 넓은 면이 이어지고, 그 아래에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겹친 작은 영역이 자리한다. 얼굴의 윤곽은 주변의 어두운 색채와 연결되며 독립적인 초상보다 여러 형상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붉은 얼굴의 오른쪽에는 검은색과 청록색, 갈색의 거친 붓질이 밀집해 있다. 물감이 두껍게 쌓인 표면에는 짧은 선과 긁힌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일부는 아래쪽으로 길게 흘러내린다. 청록색의 곡선은 중앙을 향해 내려오고 그 주변에는 붉은색과 노란색의 작은 흔적들이 겹쳐 있다. 여러 방향의 붓질이 교차하면서 작품 상단에 복잡한 움직임을 만든다.
오른쪽 위에는 흰색과 보라색, 검은색이 결합한 길쭉한 형상이 자리한다. 얼굴이나 인체의 일부를 연상시키는 윤곽이 세로로 이어지고, 내부에는 검은색의 짧은 선과 보라색의 굵은 붓질이 반복된다. 흰색의 밝은 면은 주변의 황갈색 바탕과 강한 대비를 이루며, 길게 내려오는 형태는 캔버스의 세로 방향을 강조한다.
오른쪽 형상의 아래쪽에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겹친 작은 영역이 놓여 있다. 그 아래로는 노란색과 붉은색의 긴 색면이 이어지며 작품 하단까지 내려온다. 노란색은 작품에서 가장 밝고 강렬한 색채 가운데 하나로, 어두운 갈색과 검은색의 영역 사이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노란색의 가장자리에는 붉은색과 자주색이 겹쳐 있어 색채의 대비가 더욱 강해진다.
캔버스 중앙에는 밝은 갈색과 분홍색의 넓은 형태가 길게 이어진다. 위쪽에서는 여러 색채와 겹쳐 복잡한 윤곽을 이루고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가늘고 긴 수직면으로 정리된다. 사람의 몸이나 팔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주변의 인물과 건축적인 형상 사이를 가로지르며 작품의 중심축을 만든다.
중앙의 긴 형태는 주변의 색채와 다른 질감을 지닌다. 밝은 갈색과 분홍색이 비교적 넓게 펼쳐져 있으며 표면에는 작은 긁힘과 붓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왼쪽의 거친 자주색과 청록색, 오른쪽의 짙은 갈색과 노란색 사이에서 밝은 수직면이 드러나면서 서로 다른 영역을 구분한다.
왼쪽 중간에는 흰색과 보라색, 검은색의 굵은 선들이 교차한다. 여러 방향으로 뻗은 선들은 천이나 옷의 주름을 연상시키며, 일부는 아래쪽의 붉은색과 녹색의 영역으로 이어진다. 굵은 선과 짧은 붓질이 반복되면서 왼쪽의 색채는 복잡한 구조를 형성한다. 인물의 신체와 주변 사물의 경계가 겹쳐지는 부분이다.
왼쪽 아래에는 녹색과 검은색, 붉은색의 작은 형상들이 나타난다. 일부는 직사각형으로 구분되고 다른 부분은 불규칙한 윤곽을 지닌다. 검은색의 넓은 영역 사이로 밝은 녹색과 흰색이 드러나며, 붉은색의 작은 흔적들이 그 사이에 놓여 있다. 여러 색채가 겹친 구성은 작품 하단에 밀도 높은 공간을 만든다.
오른쪽 아래의 노란색은 작품 전체의 색채 균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밝은 노란색의 넓은 면은 아래로 길게 이어지고, 양옆에는 검은색과 붉은색, 자주색의 선들이 겹쳐 있다. 노란색의 표면에는 짧은 검은 선과 붉은 흔적이 남아 있으며, 아래쪽에는 갈색의 가로선들이 반복된다. 밝은 색채와 어두운 선의 대비가 작품 하단에 강한 시각적 무게를 만든다.
‘후잔트의 기억’에서 색채는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를 설명하는 역할과 독립적인 조형 요소의 역할을 함께 맡는다. 붉은색은 얼굴과 작은 기호, 아래쪽의 긴 색면에 반복되고, 청록색과 보라색은 인물의 몸과 주변의 복잡한 영역을 연결한다. 노란색은 오른쪽 아래에서 강하게 드러나며 작품 전체의 색채 흐름을 마무리한다.
작품의 세로형 비례는 이러한 색채와 형상의 중첩을 강조한다. 캔버스의 폭은 좁고 높이는 길어 여러 형상들이 위아래로 밀집한다. 왼쪽 상단의 붉은 얼굴에서 시작한 시선은 중앙의 밝은 갈색 형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고, 오른쪽의 흰색과 보라색 형상은 노란색의 긴 색면으로 이어진다. 수직적인 구성 안에서 서로 다른 형상들이 겹치면서 작품 전체에 복잡한 움직임이 형성된다.
쉬가예프는 1980년대 초부터 중앙아시아의 자연과 인간의 생활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다뤘다. 초기 색채 판화에서는 산과 집, 말과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을 관찰해 표현했고, 1980년대 후반에는 자연과 인물의 형상을 단순화하면서 다양한 기호와 결합하는 회화를 발전시켰다. 1990년대에는 인간과 동물, 신화적 존재가 하나의 공간에서 관계를 맺는 구성이 두드러졌다.
1986년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소녀와 말, 비둘기가 분명한 윤곽을 지니고 있었고, 1990년 ‘여행자들’에서는 두 인물과 기마상, 산과 작은 기호들이 넓은 대지에 배치됐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구체적인 모습으로 표현하던 방식에서 상징적인 형태와 기호를 결합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2002년의 ‘후잔트의 기억’에서는 이러한 조형적 변화가 도시의 기억과 결합한다. 붉은 얼굴과 길게 늘어난 인체, 건축적인 형태를 연상시키는 색면들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겹친다. 자연의 풍경을 중심으로 구성했던 초기 작품과 달리 인물과 사물의 경계가 흐려지고, 여러 형상이 하나의 복합적인 공간을 이룬다.
같은 해의 ‘가을’에서는 노란색의 넓은 바탕에 흰 모자를 쓴 인물과 초승달, 기호로 변형된 사물들이 배치됐다. 인물의 몸은 길고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됐고, 아래쪽에는 작은 사각형들이 밀집했다. ‘후잔트의 기억’에서도 길게 늘어난 인체와 기하학적인 색면들이 등장하지만, 여러 형상이 서로 겹쳐 더욱 복잡한 구성을 이룬다.
2002년 ‘나의 딸 알림칸’에서는 붉은 원뿔형 모자를 쓴 소녀와 말, 집을 닮은 몸의 구조가 결합했다. 소녀의 얼굴은 간결한 선으로 표현됐고, 몸에는 붉은색과 보라색, 흰색의 직사각형들이 이어졌다. 인간과 동물, 건축적인 형태가 하나의 인물 안에 결합한 작품이었다. ‘후잔트의 기억’에서는 이러한 형상의 결합이 더욱 자유로운 붓질과 색채의 중첩으로 나타난다.
‘후잔트의 기억’은 도시의 모습을 구체적인 건물이나 거리로 재현하기보다 인물과 색채, 건축적인 형상의 흔적으로 구성했다. 왼쪽 상단의 붉은 얼굴과 오른쪽의 흰색 형상, 중앙의 긴 인체와 아래쪽의 노란색은 서로 다른 공간을 이루면서도 하나의 캔버스에 밀집해 있다. 도시에서 경험한 사람과 장소의 기억이 여러 형상의 중첩으로 표현된 것이다.
작품의 표면에는 거친 붓질과 긁힌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일부 영역에서는 물감이 두껍게 쌓여 있고, 다른 부분에서는 아래에 칠한 색채가 드러난다. 붉은색과 청록색, 보라색과 노란색이 여러 층으로 겹치면서 작품의 표면은 복잡한 질감을 지닌다. 이러한 물감의 흔적은 서로 다른 시간의 인상들이 하나의 공간에 쌓인 듯한 분위기를 만든다.
후잔트는 중앙아시아의 여러 문화와 교류가 이어져 온 도시다. 쉬가예프는 도시의 이름을 작품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그 공간을 인물과 색채의 관계로 표현했다. 붉은 얼굴과 흰색의 길쭉한 형상, 중앙의 밝은 갈색 인체와 노란색의 긴 색면은 서로 다른 기억의 단편처럼 놓여 있다. 도시의 복잡한 경험이 구체적인 풍경보다 색채와 형상의 중첩으로 나타난다.
‘후잔트의 기억’에서 인물은 여러 형상 가운데 하나로 등장한다. 얼굴과 몸의 일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주변의 색채와 겹치면서 독립적인 초상보다 복합적인 공간의 일부로 자리한다. 쉬가예프는 인간의 모습을 도시의 기억과 결합하고, 건축적인 형태와 색채의 흔적을 함께 배치해 하나의 회화적 구조를 만들었다.
2002년의 ‘후잔트의 기억’은 쉬가예프가 자연과 신화적 형상을 다루던 조형언어를 도시의 기억으로 확장한 작품이다. 좁고 긴 캔버스에 여러 얼굴과 인체, 건축적인 형태가 겹쳐 있고, 붉은색과 청록색, 보라색과 노란색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강하게 대비된다. 물감의 거친 질감과 형상의 중첩은 기억의 복합적인 성격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후잔트의 기억’의 붉은 얼굴은 왼쪽 상단에, 흰색의 길쭉한 형상은 오른쪽에 자리한다. 중앙의 밝은 갈색 인체는 아래로 길게 이어지고, 오른쪽 아래의 노란색은 검은색과 붉은색 사이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쉬가예프는 여러 형상을 좁은 공간에 겹쳐 도시의 기억을 색채와 형태의 관계로 구성했다. 중앙아시아의 자연과 인간, 신화적 상징을 탐색해온 작가의 조형언어가 도시의 경험과 결합하면서 인물과 장소의 흔적을 한 작품에 담아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