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라마 마요 'Level 50', 투명 격자에 담긴 시글라스…수집과 시간의 기록

흰색·녹색·갈색 유리 조각과 반복되는 사각 구조…빛의 투과와 불규칙한 배열이 만든 조형적 대비 해변에서 수집한 유리와 대중문화 수집품의 관계…버려진 물건에 남은 시간과 형태의 변화

2026-10-15     임민정 기자

[KtN 임민정기자]투명한 사각형 칸들이 벽을 가득 채웠다. 흰색과 녹색, 갈색 유리 조각들이 칸마다 다른 수량으로 놓여 있고, 일부는 비어 있다. 아래쪽에는 유리 조각이 촘촘하게 쌓였지만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빈 공간이 넓어진다.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격자와 제각기 다른 유리의 형태가 대비를 이루는 설치 작업이다.

미국 문화 기획자 라마 마요(Rama Mayo)의 첫 개인전 'Level 50'에 소개된 작품이다. 뉴욕주 허드슨의 갤러리 조이(Galerie Zoë)에서 열리는 전시에는 회화와 수집품, 오랜 협업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출품됐다. 투명한 격자에 담긴 유리 조각에서는 수집한 물건의 형태와 표면, 배열 자체가 조형의 중심을 이룬다.

유리는 크기와 두께가 일정하지 않다. 모서리가 둥글게 닳은 조각과 비교적 각진 조각이 섞여 있고, 투명한 표면과 희뿌옇게 마모된 표면도 구별된다. 바닷물과 모래, 자갈에 반복적으로 부딪히며 형태가 달라지는 시글라스(Sea Glass)의 특징이다.

시글라스는 병이나 유리그릇처럼 사람이 사용하던 제품이 파손된 뒤 해변에서 오랜 마모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 날카로운 가장자리는 점차 둥글어지고 표면에는 미세한 흠집이 남는다. 처음에는 같은 용기에서 나온 조각이라도 마모 정도에 따라 색상과 질감, 외형이 달라진다.

뉴욕 갤러리 조이의 'Level 50'에 소개된 유리 조각 설치 작업. 투명한 격자 안에 흰색과 녹색, 갈색 유리 조각을 배치해 규칙적인 사각 구조와 불규칙한 수집품의 형태를 대비시켰다. 사진=Jesse Meeker·Zach Neven, 작가 제공

격자는 수직선과 수평선이 일정한 간격으로 교차하는 구조다. 크기가 비슷한 사각형 칸들이 반복되면서 전체적으로 정돈된 형태를 유지한다. 반면 유리 조각은 색상과 크기, 수량이 다르고 놓인 방향에도 일정한 규칙이 없다. 인공적으로 제작한 구조물 안에 자연적인 마모를 거친 물체가 모여 있는 구성이다.

투명한 칸막이는 각각의 조각을 분리하면서도 빛을 통과시킨다. 흰색 유리는 밝은 배경과 겹쳐 윤곽이 흐릿해지고, 녹색과 갈색이 모인 부분에는 색상이 짙게 나타난다. 두꺼운 유리는 빛을 통과시키는 정도에 차이가 있으며, 마모된 표면은 빛을 흩뜨려 부드러운 질감을 만든다.

격자의 매끄러운 표면과 유리 조각의 닳은 질감도 대비된다. 투명한 칸막이에는 빛이 선명하게 반사되지만, 희뿌연 조각에는 불규칙한 표면이 남아 있다. 같은 유리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가공과 마모의 차이가 작품의 세부적인 인상을 결정한다.

칸마다 다른 수량으로 유리를 배치한 방식은 전체 구성에 변화를 준다. 조각이 밀집한 곳에서는 색상이 겹쳐지고, 한두 개만 놓인 칸에서는 개별 물체의 형태가 드러난다. 빈 칸은 주변의 밝은 배경과 겹치면서 시각적인 여백을 만든다.

유리 조각을 색상별로 엄격하게 나누지 않은 점도 눈에 띈다. 녹색과 갈색, 흰색 조각들이 같은 칸에 섞여 있고, 비슷한 색상이라도 크기와 형태가 다른 물체들이 함께 놓였다. 일정한 규격의 표본 진열장을 닮았지만 배열에서는 색상이나 크기에 따른 분류보다 물체의 밀도와 간격이 강조된다.

자연사박물관의 표본실에서는 수집한 물체를 종류와 크기, 출처에 따라 구분해 보관한다. 작은 대상을 일정한 크기의 칸에 넣으면 개별 물체를 비교하고 관찰하기 쉽다. 'Level 50'의 격자도 수집품을 각각 구획하지만, 비어 있는 공간과 불규칙한 배열을 남겨두면서 표본 진열과 다른 조형적 구성을 만든다.

뉴욕 갤러리 조이의 'Level 50'에 소개된 유리 조각 설치 작업. 투명한 격자 안에 흰색과 녹색, 갈색 유리 조각을 배치해 규칙적인 사각 구조와 불규칙한 수집품의 형태를 대비시켰다. 사진=Jesse Meeker·Zach Neven, 작가 제공

라마 마요는 2024년 5월 팟캐스트 '하이어 오빗(HIGHERORBIT)'에서 시글라스 수집에 관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약 20년간 생활한 뒤 캘리포니아 옥스너드(Oxnard) 인근 해변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매일 해변을 걸으며 유리 조각을 찾는 활동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밝혔다.

마요는 음악과 패션,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동안 장난감과 게임, 스케이트보드 관련 물건들을 수집해 왔다. 'Level 50'에도 호미스(Homies) 피규어와 검비(Gumby) 장난감, 고무공 등을 활용한 아상블라주(assemblage) 작업이 포함됐다. 아상블라주는 이미 제작된 물건들을 선택하고 결합해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방식이다.

게임 카트리지와 장난감에는 제조 당시의 디자인과 상표, 캐릭터가 남아 있다. 물건을 통해 생산 시기와 대중문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시글라스는 다른 성격의 수집품이다. 원래의 용도와 제품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마모된 조각이 많고, 물체의 색상과 표면, 닳은 모서리가 주요한 특징으로 남는다.

해변에서 시글라스를 수집하는 과정도 기존의 장난감이나 게임을 구하는 방식과 다르다. 상업적인 수집품은 시장과 다른 수집가를 통해 거래되지만, 시글라스는 해변에서 직접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색상과 형태의 조각을 발견할지는 장소와 환경, 우연에 영향을 받는다.

투명한 격자에 담긴 유리들은 이러한 수집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장소에 놓인 물체들로 읽힌다. 원래는 서로 다른 제품의 일부였을 조각들이 비슷한 크기의 칸 안에 모였다. 해변에서는 모래와 자갈에 섞여 있던 물체가 전시장에서는 각기 다른 색상과 형태를 가진 독립적인 관찰 대상이 됐다.

뉴욕 갤러리 조이의 'Level 50'에 소개된 유리 조각 설치 작업. 투명한 격자 안에 흰색과 녹색, 갈색 유리 조각을 배치해 규칙적인 사각 구조와 불규칙한 수집품의 형태를 대비시켰다. 사진=Jesse Meeker·Zach Neven, 작가 제공

물건을 수집하고 배열하는 행위는 현대미술에서도 오랫동안 다뤄졌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레디메이드(ready-made) 이후 일상용품과 대량생산품을 미술의 재료로 사용하는 작업이 이어졌고, 여러 물체를 결합한 아상블라주도 발전했다.

이번 설치에서 유리 조각들은 다른 형태로 가공되거나 본래의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둥글게 닳은 모서리와 불규칙한 표면을 그대로 유지한 채 투명한 칸에 배열됐다. 물건을 고르고 분류하는 과정과 그 결과인 배열이 작품의 형식에 관여한다.

시글라스에는 인간의 생산 활동과 자연환경이 함께 남아 있다. 유리는 공장에서 만들어졌지만 파손된 이후에는 바닷물과 모래, 자갈에 의해 형태가 달라졌다. 사람이 제작한 물건이 자연적인 마모를 거쳐 다시 수집품이 된 것이다.

마모의 정도는 조각마다 다르다. 비교적 선명한 색상과 윤곽이 남은 유리도 있고, 원래의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닳은 조각도 있다. 이러한 차이가 한 격자 안에 함께 놓이면서 물체마다 다른 시간을 거쳐 현재의 형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의 조형적 특징은 작은 유리 조각과 그것들을 담은 구조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규칙적인 사각형은 수집품을 구분하고, 유리 조각의 불규칙한 배열은 반복되는 구조에 변화를 만든다. 빛이 통과하는 투명한 칸과 마모된 유리의 질감, 밀집한 부분과 빈 공간이 함께 작용한다.

라마 마요의 'Level 50'은 50번째 생일을 맞아 개최한 첫 개인전으로, 회화와 수집품, 협업 작가들의 작품을 뉴욕주 허드슨의 갤러리 조이에서 11월 1일까지 소개한다. 오래된 장난감과 게임, 대중문화의 인쇄물을 활용한 작품들과 함께 유리 조각 설치도 전시에 포함됐다.

투명한 격자에는 흰색과 녹색, 갈색의 작은 유리들이 서로 다른 수량으로 놓여 있다. 수집한 물체의 원래 형태를 유지하면서 규칙적인 구조와 불규칙한 배열을 결합했다. 닳은 유리의 표면과 색상, 비어 있는 칸들이 수집과 보관의 행위를 조형적인 작업으로 연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