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인사이트②] 더 콰이어 블루, '향수'에서 '메모리'까지 문학과 영화가 만난 음악
정지용의 시와 모차르트 오페라, 영화 '쇼생크 탈출'과 뮤지컬 '캣츠'…서로 다른 작품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노래의 서사
[KtN 박준식기자]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은행가 출신 수감자 앤디 듀프레인은 교도소 방송실의 문을 잠그고 음반 한 장을 재생한다. 교도소 전체에 흘러나온 음악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이중창 '술라리아(Sull'aria)'다. 운동장에 있던 수감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두 여성의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철문과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교도소에 18세기 오페라가 울려 퍼지면서 영화는 잠시 다른 분위기로 바뀐다.
1994년 개봉한 프랭크 다라본트(Frank Darabont) 감독의 영화에서 이 음악은 자유와 희망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에 사용됐다. 모차르트가 작품을 만들었던 1786년의 오페라 무대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을 표현하던 노래다. 같은 곡이 200년 넘는 시간을 건너 영화에 등장하면서 음악을 둘러싼 이야기도 달라졌다.
지난 15일 서울 서초구 구띠갤러리에서 열린 더 콰이어 블루(The Choir Blue)의 제4회 정기연주회에는 영화 속 음악으로도 널리 알려진 '술라리아'가 포함됐다. 정지용의 시에서 출발한 '향수', 뮤지컬 '캣츠'의 '메모리(Memory)'도 함께 편성됐다. 문학과 오페라, 영화와 뮤지컬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았던 음악들이 하나의 공연 프로그램에서 만난 것이다.
김준홍 지휘자와 권혜경 피아니스트가 참여한 이번 연주회는 2020년 6월 창단한 아마추어 합창단 더 콰이어 블루의 네 번째 정기연주회다. 한국의 시를 바탕으로 만든 노래와 유럽 오페라, 현대 뮤지컬 음악을 함께 다뤘다. 작품이 처음 만들어진 시대와 문화적 배경은 달라도, 음악이 다른 예술과 만나면서 새로운 표현을 얻어온 역사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구성이다.
정지용(鄭芝溶)의 시 '향수'는 1927년 3월 문예지 '조선지광'에 발표됐다. 넓은 들판과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 질화로와 늙은 아버지, 어린 누이와 아내까지 고향의 풍경과 가족의 모습을 구체적인 언어로 담았다. 고향을 아름다운 자연으로만 그리지 않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까지 시 안에 들여놓았다.
시 속 고향은 어린 시절의 생활과 가족, 자연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이다. 실개천이 흐르고 황소가 우는 들판 뒤에는 저녁을 맞는 집과 가족의 모습이 이어진다. 정지용은 고향의 풍경을 눈앞에 펼쳐놓듯 묘사하면서도 반복되는 후렴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전했다. 1935년 첫 시집 '정지용 시집'에 수록된 뒤에도 한국 근대시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꾸준히 읽혀 왔다.
'향수'가 노래로 널리 알려진 것은 시가 발표된 지 60여 년이 지난 뒤였다. 1989년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함께 부른 '향수'가 음반에 실렸다. 김희갑이 작곡한 노래는 대중가수와 성악가의 음색을 한 작품 안에 담았다. 한국 가요와 성악의 표현 방식이 만난 곡으로, 발표 이후에도 두 음악 장르를 연결한 작품으로 자주 거론됐다.
정지용의 시가 쓰인 1920년대와 이동원·박인수의 노래가 발표된 1989년 사이에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도 놓여 있다. 정지용의 작품은 분단 이후 오랫동안 자유롭게 접하기 어려웠고, 1988년 월북 문인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가 이뤄지면서 출판과 대중적 수용의 폭이 넓어졌다. '향수'가 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과정에는 문학 작품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된 시대적 변화도 함께 작용했다.
이동원과 박인수의 '향수'는 원작의 시어를 살리면서 음악의 구조를 새롭게 만들었다. 비교적 긴 시에 선율을 붙이는 작업은 짧은 대중가요를 만드는 일과 다르다. 풍경을 차례로 묘사하는 시구와 반복되는 후렴을 하나의 음악으로 연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희갑의 선율은 여러 연으로 이어지는 고향의 풍경을 노래로 엮었고, 이동원의 대중적인 창법과 박인수의 성악적 발성이 서로 다른 음색으로 작품을 전달했다.
정지용의 '향수'가 시에서 노래로 옮겨온 과정은 한국 문학과 대중음악의 접점을 살펴볼 수 있는 이력이다. 시인은 고향의 풍경과 가족을 언어로 남겼고, 작곡가와 가수들은 시의 내용을 음악으로 전했다. 문학 작품을 읽는 사람과 노래를 듣는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시를 만날 수 있게 됐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술라리아'에는 18세기 유럽 사회의 신분 관계와 인간관계가 담겨 있다. 1786년 빈에서 초연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은 프랑스 극작가 피에르 보마르셰(Pierre Beaumarchais)의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가 대본을 썼으며, 귀족과 하인 사이의 갈등과 사랑, 속임수와 화해를 희극적인 사건으로 풀어냈다.
'술라리아'는 오페라 3막에서 백작부인과 하녀 수잔나가 함께 부르는 이중창이다. 두 여성은 백작의 부정을 드러내기 위한 계략을 꾸미며 편지를 작성한다. 백작부인이 내용을 말하면 수잔나가 받아 적는 형식으로 노래가 이어진다. 서로 다른 신분의 두 여성이 같은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는 과정이 두 목소리의 주고받음으로 표현된다.
모차르트는 백작부인과 수잔나의 목소리를 부드러운 선율로 엮었다. 한 사람이 노래를 시작하면 다른 사람이 받아 이어가고, 두 목소리가 함께 어우러진다. 조용한 편지 작성이라는 극적 상황과 달리 음악은 서정적이고 차분하게 흘러간다.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처럼 들릴 수 있지만 오페라 속에서는 백작을 속이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진행하는 대목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은 '술라리아'를 교도소 방송을 통해 울려 퍼지게 했다. 앤디가 음악을 재생하는 동안 죄수들은 높은 담장 안에서 낯선 오페라를 듣는다. 영화 속 레드의 회상은 이탈리아어로 부르는 노래의 내용을 알지 못해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경험에 닿아 있다. 원작 오페라에서 편지를 작성하던 두 여성의 목소리는 영화에서 수감자들이 잠시 자유를 떠올리는 음악으로 사용됐다.
두 작품의 차이는 노래가 놓인 상황에서 비롯된다. 오페라에서는 백작부인과 수잔나가 백작을 속이기 위해 함께 행동하고, 영화에서는 앤디가 교도소의 통제에 맞서 음악을 방송한다. '술라리아'는 오페라 속 인물의 계획을 진행하는 음악이면서 영화에서는 억압적인 공간과 대비되는 아름다움을 전한다. 관객이 노랫말의 이탈리아어를 이해하는지와 관계없이 영화의 상황이 음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메모리'가 처음 불린 무대는 1981년 런던에서 초연된 뮤지컬 '캣츠(Cats)'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가 작곡하고 트레버 넌(Trevor Nunn)이 연출한 작품으로,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 T. S. 엘리엇(T. S. Eliot)의 고양이 시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엘리엇이 1939년 발표한 시집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에는 각기 다른 성격과 습관을 가진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뮤지컬은 시집의 인물들을 무대로 옮기면서 노래와 춤을 결합했다. 고양이들의 개별적인 특성을 소개하던 문학 작품은 공동체의 축제와 선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공연으로 발전했다.
'메모리'를 부르는 그리자벨라(Grizabella)는 과거 화려했던 시절을 보냈지만 현재는 다른 고양이들로부터 외면받는 인물이다. 낡은 옷차림과 쇠약해진 모습으로 등장하는 그리자벨라에게 과거의 아름다움은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뮤지컬은 공동체에서 소외된 인물이 다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이야기를 '메모리'에 담았다.
그리자벨라의 이야기는 엘리엇의 생전에 출간된 고양이 시집에 그대로 실려 있던 내용이 아니다. 엘리엇의 유고에 남아 있던 그리자벨라 관련 시가 뮤지컬 제작 과정에서 활용됐고, '메모리'의 노랫말에는 엘리엇의 다른 시 '바람 부는 밤의 광시곡(Rhapsody on a Windy Night)'과 '전주곡(Preludes)'의 이미지도 반영됐다. 고양이를 소재로 한 시집과 도시의 밤을 노래한 엘리엇의 초기 시들이 하나의 뮤지컬에서 만난 것이다.
'메모리'에는 지나간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새로운 날을 기다리는 마음이 함께 담겨 있다. 그리자벨라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면서도 다른 고양이들이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노래는 공동체에서 소외된 인물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순간에 놓여 있다. 뮤지컬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자벨라가 받아들여지는 과정도 '메모리'의 극적 의미와 연결된다.
초연에서 그리자벨라 역을 맡았던 일레인 페이지(Elaine Paige)의 노래는 이후 널리 알려졌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를 비롯한 여러 가수가 '메모리'를 다시 불렀다. 뮤지컬을 직접 관람하지 않은 사람도 독립적인 노래로 접할 수 있게 됐다. 원래는 극중 인물의 처지와 이야기를 전달하던 음악이 공연과 음반을 거쳐 별도의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향수'와 '술라리아', '메모리'가 만들어진 과정에는 문학 작품을 음악으로 옮기거나 이미 존재하는 음악에 새로운 서사를 부여한 역사가 담겨 있다. 정지용의 시는 김희갑의 작곡을 거쳐 노래가 됐고, 모차르트의 이중창은 '쇼생크 탈출'에서 교도소라는 공간과 만나 새로운 역할을 맡았다. 엘리엇의 시에서 출발한 '메모리'는 뮤지컬 속 그리자벨라의 이야기와 결합한 뒤 여러 가수의 공연으로 전해졌다.
김준홍 지휘자와 권혜경 피아니스트가 참여한 더 콰이어 블루의 이번 연주회도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작품들을 한 무대에 편성했다. 작품의 원래 이야기까지 알고 듣는다면 같은 선율도 한층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술라리아'의 부드러운 이중창에는 백작을 속이려는 두 여성의 계획이 담겨 있고, '메모리'에는 공동체로 돌아가려는 그리자벨라의 절박한 마음이 놓여 있다.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의 '선라이즈 선셋(Sunrise, Sunset)'도 이번 연주회 프로그램에 포함됐다. 1964년 초연된 뮤지컬에서 부모가 딸의 결혼식을 맞아 자녀의 성장과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는 노래다. 제리 보크(Jerry Bock)가 작곡하고 셸던 하닉(Sheldon Harnick)이 가사를 썼다. 작품 속에서는 유대인 가족의 결혼식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에 놓이지만, 공연 밖에서는 결혼식과 가족의 시간을 떠올리는 노래로도 널리 불린다.
오페라와 뮤지컬, 영화에 등장했던 노래가 독립적인 공연 레퍼토리로 자리 잡으면 작품을 접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극 전체를 관람하는 사람은 등장인물의 관계와 사건을 함께 이해하지만, 음악회에서 개별 곡을 듣는 사람은 한 곡의 선율과 가사를 중심으로 작품을 만난다. 오페라의 한 대목이나 뮤지컬의 대표곡이 독립된 음악으로 불리는 과정에서 원작과 공연 사이에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정지용의 '향수'는 1927년 발표된 시에서 1989년의 노래로 이어졌고, 1786년 초연된 '피가로의 결혼'의 이중창은 1994년 영화 '쇼생크 탈출'에 사용됐다. 1981년 뮤지컬 '캣츠'에서 불린 '메모리'는 이후 여러 가수의 목소리로 전해졌다. 각 작품이 만들어진 시간과 원래의 서사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음악이 사용되는 장소와 매체는 계속 달라졌다.
더 콰이어 블루의 제4회 정기연주회 프로그램에 함께 오른 작품들은 오랫동안 음악이 다른 예술과 만나는 과정에서 축적된 레퍼토리다. 정지용의 시와 모차르트의 오페라, 엘리엇의 문학과 현대 뮤지컬은 오늘날에도 성악과 합창 공연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문학 작품이 노래가 되고, 오페라가 영화에 등장하며, 뮤지컬의 음악이 독립적인 공연곡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