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공간②] 구띠갤러리, 추상회화·조각·채색화로 읽는 현대미술의 변화

2026년 엔리코 엠브롤리전과 제41회 이화조각전, 구승희의 채색화…물감의 질감과 신체의 행위, 반복되는 인물과 색채로 살펴본 서로 다른 조형 언어

2026-10-19     박준식 기자
엔리코 엠브롤리, 표면과 물성의 회화/구띠 갤러리 전시로 읽는 혼합매체 회화, 마티에르, 탈평면성, 해외 작가 전시의 검증 구조. 사진=enricoembrolistudios,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미국 작가 엔리코 엠브롤리(Enrico Embroli)의 회화에는 물감이 두껍게 쌓인 부분과 긁혀 나간 흔적이 공존한다. 안료가 겹친 자리에는 높낮이가 생기고, 갈라진 부분에서는 아래쪽 재료가 드러난다. 색을 입히는 행위와 물질을 쌓아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 하나의 캔버스에서 이루어진다. 2026년 5월 11일 서울 서초구 구띠갤러리에서 시작된 엠브롤리 전시는 회화의 평면을 넘어 물감과 재료가 만드는 질감, 형태와 깊이에 주목했다.

구띠갤러리에서는 같은 해 3월 53명의 조각가가 참여한 제41회 이화조각전 '겹쳐진 시간들, 지금 여기'가 열렸다. 8월에는 구승희 작가의 채색화와 혼합매체 작업이 소개됐다. 엠브롤리의 회화가 물질의 두께와 제작 흔적을 드러낸다면, 이화조각전에서는 조각의 재료와 제작 행위, 사진과 영상으로 남는 시간이 중요한 표현 요소로 등장했다. 구승희의 작업은 노란 곱슬머리 인물과 꽃, 새, 가족 등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을 통해 일상적인 감정을 다뤘다.

세 전시는 추상회화와 조각, 구상회화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 놓여 있다. 작품을 이해하는 출발점도 다르다. 엠브롤리의 작업에서는 색채와 물감의 물리적 상태를 살펴야 하고, 조각에서는 재료의 구조와 제작 과정, 공간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구승희의 채색화에서는 인물과 주변 사물의 배치를 따라가며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서로 다른 작품들이 구띠갤러리에서 소개되면서 현대미술의 폭넓은 표현 방식도 함께 드러났다.

엠브롤리는 1945년 미국 뉴욕주 바타비아에서 태어났다. 뉴욕주립대 버펄로에서 미술교육을 공부하고 약 12년간 교육자로 활동한 뒤 본격적인 창작에 나섰다. 회화와 조각, 판화를 넘나들며 작업해 온 작가로, 색채와 재료를 결합한 입체적인 회화 표면이 특징이다. 제작 방식에서 평면과 입체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왔다.

2026년 구띠갤러리 전시에는 엠브롤리의 혼합매체 회화가 소개됐다. 두껍게 쌓인 물감과 불규칙하게 갈라진 표면, 선과 색면의 결합은 일반적인 평면회화와 다른 공간감을 만든다. 안료가 캔버스에 부착된 높이가 달라지면서 빛을 받는 부분과 그림자가 생기는 부분도 나뉜다. 멀리서 하나의 색면으로 인식되던 부분이 가까이에서는 여러 재료가 겹쳐진 구조로 드러난다.

미술에서 마티에르(matière)는 작품의 재료가 만들어내는 물질적인 질감을 가리킨다. 물감을 매끄럽게 펴 바른 회화와 여러 차례 덧칠하거나 긁어낸 회화는 같은 색을 사용하더라도 서로 다른 표면을 갖는다. 엠브롤리의 작업에서는 물감이 쌓인 두께와 제작 과정에 남은 흔적이 색채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세기 추상표현주의는 그림을 그리는 신체의 움직임과 붓질, 안료가 남긴 흔적을 회화의 표현 요소로 확장했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드리핑 회화에서는 물감을 뿌리고 흘리는 행위가 선과 색의 관계를 만들었고, 윌럼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의 작품에서는 겹쳐진 붓질과 긁힌 흔적이 형태를 구성했다. 물감은 대상을 묘사하는 재료인 동시에 제작 행위가 남긴 기록이 됐다.

엠브롤리의 작업은 이러한 미술사적 흐름과 연결되면서도 물감의 두께와 구조적인 형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불규칙한 질감 사이에 비교적 명확한 선과 기하학적 구성이 놓이고, 돌출된 부분은 실제 그림자를 만든다. 즉흥적인 붓질의 흔적과 형태를 조직하는 구조가 함께 존재한다.

작품의 깊이도 두 가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색채와 형태의 배치가 시각적인 공간감을 형성하는 동시에 캔버스 위에 쌓인 재료가 실제 부피를 갖는다. 회화에서 흔히 사용하는 원근법과 달리 엠브롤리의 입체감은 물감과 혼합재료가 물리적으로 차지하는 높이에서도 비롯된다. 평면 위에 만들어진 구조가 주변의 빛과 만나면서 작품의 형태가 한층 복합적으로 인식된다.

회화와 조각의 관계도 재료를 다루는 방식에서 가까워진다. 전통적인 회화가 평면 위에 색과 형태를 구성하고 조각이 실제 공간을 차지하는 입체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면, 엠브롤리의 작업에는 두 영역의 특성이 함께 나타난다. 캔버스라는 회화의 기본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재료의 축적과 굴곡을 통해 입체적인 형태를 만들어낸다.

물질적인 표현이 강한 작품일수록 색과 형태의 균형도 중요해진다. 두꺼운 안료와 거친 질감만으로 조형적인 완성도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굴곡이 큰 부분과 평평한 부분, 밝은 색과 어두운 색, 기하학적인 선과 불규칙한 형태가 어떤 관계로 놓였는지가 작품의 구성을 좌우한다. 엠브롤리의 회화에서는 재료의 물리적 특징과 색채의 조직이 함께 작용한다.

엔리코 엠브롤리, 표면과 물성의 회화/구띠 갤러리 전시로 읽는 혼합매체 회화, 마티에르, 탈평면성, 해외 작가 전시의 검증 구조.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엠브롤리는 'I MAKE THINGS'라는 표현으로 제작 행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회화와 조각, 판화 등 여러 매체를 다루는 작업에서 재료를 선택하고 가공하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의미로 읽힌다. 작품은 작가가 재료를 다루는 과정에서 만들어지지만, 완성된 뒤에는 색과 형태, 표면의 관계를 통해 독립적인 조형성을 갖는다.

구띠갤러리의 2026년 전시는 물감과 재료의 물성을 중심으로 엠브롤리의 작업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였다. 특히 회화의 표면을 단순한 바탕으로 취급하지 않고 색과 구조가 만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제작 방식이 드러났다. 긁히고 쌓인 안료의 흔적은 제작 과정과 완성된 형태를 함께 이해하도록 한다.

엠브롤리가 캔버스 위에 남긴 재료의 흔적은 3월 구띠갤러리에서 열린 이화조각전의 조형 작업과도 비교할 만하다. 제41회 이화조각전 '겹쳐진 시간들, 지금 여기'는 3월 21일부터 28일까지 열렸으며, 서로 다른 세대와 작업 경험을 지닌 53명의 조각가가 참여했다.

이화조각회는 1978년 예림조각회와 1979년 이상조각회의 계보를 바탕으로 1980년 출범했다. 정기전과 다양한 전시 활동을 통해 조각 작업을 이어온 단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마다 다른 재료와 조형 방식을 선보였으며, 전통적인 입체조각부터 사진과 영상 등 다른 매체를 활용한 작업까지 조각의 표현 범위를 살펴볼 수 있었다.

조각에서는 작품이 차지하는 공간과 재료의 특성이 중요하다. 돌과 금속, 나무처럼 물리적인 무게와 부피를 가진 재료는 표면의 질감뿐 아니라 구조와 균형을 결정한다. 작품을 정면에서 바라볼 때와 옆으로 이동해 살펴볼 때 드러나는 형태도 다르다. 재료의 크기와 주변 공간의 관계에 따라 감상 거리와 시선의 방향이 달라진다.

현대조각은 재료를 직접 깎고 붙여 완성하는 방식에서 더 나아가 사물을 배치하거나 자연환경에서 특정한 행위를 수행하는 작업까지 폭넓게 발전해 왔다. 제작 과정과 시간, 장소가 작품의 구성 요소가 되면서 사진과 영상은 조각의 일부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매체로 활용됐다.

김순임의 '보리얼숲에 뜬 달(Moon on the Boreal Forest)'은 조각의 이러한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2026년 제작된 작품으로, 117×66cm 크기의 피그먼트 프린트와 11분 9초 길이의 단채널영상으로 구성됐다.

김순임은 보리얼숲의 빈 땅에 앉아 손으로 흙을 어루만져 달의 형상을 만들었다. 자연에 놓인 흙과 작가의 신체, 손을 움직인 시간이 작품을 이루는 요소가 됐다. 완성된 형태는 땅 위에 남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 사진과 영상은 해당 작업이 이루어진 순간과 과정을 기록한다.

달의 형상은 별도의 조각 재료를 가져와 고정한 구조물과 다르다. 이미 자연에 존재하던 흙을 손으로 만져 형태를 만들었고, 제작 행위가 끝난 뒤에도 주변 환경의 변화는 계속된다. 작가가 재료에 가한 움직임과 자연이 형상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서로 다른 시간에 놓이게 된다.

사진과 영상은 자연에서 이루어진 작업을 전시장으로 옮기는 역할을 맡는다. 사진은 특정한 순간의 형태를 남기고, 영상은 작가의 손이 움직이는 과정과 시간의 흐름을 전달한다. 관람객은 실제 보리얼숲의 땅을 마주하는 대신 기록된 이미지와 영상을 통해 작업을 접한다. 작품의 물리적인 장소와 감상하는 장소가 분리되는 것이다.

자연환경에서 제작한 작품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기는 방식은 대지미술(land art)과 행위 중심의 미술에서도 발전해 왔다. 자연의 재료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거나 사라질 수 있으며, 기록 매체는 제작 당시의 모습을 다른 장소와 시기에 전달한다. 김순임의 작업에서도 땅에 남긴 형태와 사진·영상으로 보존된 이미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엔리코 엠브롤리, TRANSCENDENT ECHO 3656206 MM/OIL 64” X 34” X 2”.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엠브롤리와 김순임은 모두 재료를 직접 다루지만 완성된 작품에 남는 시간의 성격은 다르다. 엠브롤리의 캔버스에는 안료를 쌓고 긁어낸 결과가 물질로 남는다. 김순임은 자연의 흙을 다루는 행위와 변화할 수 있는 형상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했다. 한쪽에서는 제작 행위가 물리적인 표면에 남고, 다른 쪽에서는 행위가 이루어진 시간이 기록 매체에 보존된다.

이화조각전에 참여한 53명의 작업은 조각이라는 공통된 분야 안에서도 서로 다른 제작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입체작품은 여러 방향에서 구조를 살펴볼 수 있고, 영상은 일정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내용을 따라가야 한다. 작품의 크기와 재료, 사용한 매체에 따라 관람객이 작품 앞에서 머무는 방식도 달라진다.

여러 작가가 참여한 단체전에서는 개별 작품의 표현과 전시 구성이 함께 중요하다. 규모가 큰 입체작품과 작은 조형물, 사진과 영상이 같은 공간에 놓이면 작품마다 적합한 감상 거리와 체류 시간이 다르다. 서로 다른 작품을 비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만큼 개별 작업의 특성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배치와 관람 동선도 필요하다.

구띠갤러리에서 소개된 구승희의 채색화는 추상회화와 조각에서 다뤄진 재료와 행위의 문제를 인물과 사물의 관계로 옮겨 생각하게 한다. 구승희의 작품에는 노란 곱슬머리를 한 인물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둥근 얼굴과 커다란 눈, 단순화된 신체를 가진 인물 주변에 꽃과 새, 가족과 나무가 배치된다. 형태를 세밀하게 묘사하기보다 알아보기 쉬운 이미지와 선명한 색채로 그림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구승희는 장지채색을 중심으로 작업하면서 혼합매체 회화도 제작해 왔다. 장지는 한국 채색화에서 사용되는 종이 바탕으로, 여러 겹의 한지를 붙여 두께와 내구성을 높인 재료다. 종이에 색을 입히는 방식은 캔버스 위에 재료를 두껍게 쌓는 혼합매체 작업과 질감과 표현의 조건이 다르다.

구승희, 햇살 가득 장지채색 47×35cm 2026. 사진=구띠갤러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2026년 제작된 '햇살 가득'은 장지에 채색한 47×35cm 작품이다. 분홍색 옷을 입은 노란 머리의 인물이 정면을 바라보고, 주변에는 노란색과 주황색을 중심으로 한 꽃들이 반복적으로 배치돼 있다. 인물의 머리카락과 꽃의 형태가 비슷한 곡선을 이루고, 밝은 색채가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꽃들은 실제 자연의 비례보다 장식적인 구성을 이루도록 배치됐다. 일정한 형태가 반복되면서 인물 주변에 둥근 구조가 만들어지고, 인물의 머리카락과 꽃의 색이 서로 연결된다. 인물의 표정은 간결하지만 꽃의 크기와 색, 반복적인 배열이 그림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2024년 작품 '행복은 우리곁에'에서는 인물과 새가 함께 등장한다. 53×46cm 장지채색으로, 청록색 계열의 배경과 노란 머리의 인물이 대비된다. 인물 가까이에 배치된 새와 작은 생명체들은 실제 크기보다 인물과의 관계가 드러나도록 표현됐다.

구승희의 작품에서 새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다. 파랑새는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의 희곡 '파랑새'를 비롯한 문학과 대중문화에서 행복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돼 왔다. 구승희의 그림에서도 인물 가까이에 놓인 새는 행복을 다룬 작품 제목과 연결해 읽을 수 있다. 다만 새의 위치와 색채, 주변 사물의 구성이 작품마다 다른 만큼 모든 새를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해석하기보다 개별 작품 안에서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행복이 머무는 곳'은 2026년 제작된 53×45.5cm 장지채색 작품이다. 녹색 나무와 풀밭이 넓게 펼쳐진 공간에 노란 머리의 인물이 서 있고, 가까운 곳에 작은 흰 동물이 등장한다. 인물의 크기는 주변 자연에 비해 작게 표현됐다. 녹색의 반복과 나무의 형태가 작품의 공간을 구성하면서 인물은 자연 속에 놓인다.

'햇살 가득'에서는 꽃들이 인물을 둘러싸고, '행복이 머무는 곳'에서는 인물이 나무와 풀밭 사이에 자리한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기본적인 특징은 같지만 주변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다르다. 같은 인물을 사용하면서도 꽃과 자연, 동물의 관계를 바꿔 서로 다른 그림을 만든다.

구승희, 우리 장지 채색 140×110cm 2023. 사진=구띠갤러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2023년 작품 '우리'는 140×110cm 장지채색으로 여러 인물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을 담았다. 인물의 얼굴과 머리카락은 단순화돼 있지만 서로 가까이 있는 자세와 손의 위치, 주변 사물의 배치를 통해 관계를 읽을 수 있다. 한 사람을 중심으로 구성했던 그림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구성으로 넓어진 것이다.

구승희의 작품에서는 반복되는 인물이 여러 그림을 연결한다. 노란 곱슬머리와 커다란 눈은 작품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는 특징이지만, 비슷한 얼굴이 반복되면 개별 작품의 차이가 약해질 수도 있다. 배경과 주변 인물, 색채와 공간을 어떻게 달리 구성하는지가 각각의 그림을 구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재료와 크기를 바꾼 작업에서도 표현의 변화가 나타난다. '행복으로'는 2026년 제작된 163×130cm 혼합매체 작품이다. 짙은 배경 속에 노란 머리의 인물이 놓이고, 밝은 색의 곡선과 주변 형태가 인물을 둘러싼다. 작은 장지채색 작품과 비교하면 인물의 위치와 배경이 차지하는 비중, 색채의 대비가 달라진다.

'행복으로'에서는 어두운 바탕과 노란색, 붉은색의 관계가 두드러진다. 인물이 놓인 중심부와 주변의 형태가 강한 대비를 이루면서 색채의 배치가 작품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존의 방식에 혼합매체가 만들어내는 질감과 큰 캔버스의 공간감이 더해졌다.

엠브롤리와 구승희는 모두 색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만 색이 맡는 역할은 다르다. 엠브롤리의 작업에서 색은 두껍게 쌓인 안료와 결합해 실제 표면의 굴곡과 형태를 만든다. 구승희의 채색화에서는 인물과 주변 사물을 구별하고 감정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역할이 크다. 재료의 물리적인 상태를 전면에 드러내는 회화와 형상과 색채를 통해 이야기를 구성하는 회화의 차이다.

김순임의 작업은 제작 행위와 기록이라는 또 다른 요소를 더한다. 엠브롤리의 회화에서 물질은 캔버스 위에 남고, 구승희의 채색화에서 인물과 사물은 그림 안에서 관계를 이룬다. 김순임의 '보리얼숲에 뜬 달'에서는 작가가 자연의 흙을 만진 행위와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형상이 사진과 영상으로 전해진다. 작품을 이루는 재료와 제작 방식,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까지 서로 다른 것이다.

현대미술에서는 같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작가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물감을 평평하게 바르는 대신 두껍게 쌓을 수도 있고, 자연의 흙을 입체작품으로 고정하는 대신 잠시 만들어진 형상을 기록할 수도 있다. 익숙한 인물을 반복해 그리면서도 배경과 색채, 주변 사물의 관계를 바꾸는 방식도 가능하다.

미술을 접하는 관람객에게 이러한 차이는 작품을 읽는 방식의 차이로 이어진다. 추상회화에서는 안료의 질감과 색채의 관계를 살피고, 조각에서는 재료의 부피와 공간, 제작 과정을 따라간다. 구상회화에서는 인물과 사물의 형태를 알아보는 경험이 감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한 작품을 오래 바라보는 일과 사진·영상의 진행을 따라가는 일에도 서로 다른 시간이 필요하다.

구띠갤러리에서 열린 엔리코 엠브롤리 전시와 제41회 이화조각전, 구승희의 채색화 전시는 각각 다른 미술적 전통과 제작 방식을 바탕으로 한다. 회화와 조각, 사진과 영상, 전통 종이를 이용한 채색화와 혼합매체 작업이 같은 전시 공간에서 시기를 달리하며 소개됐다. 세 전시의 성격은 분명히 다르지만 재료와 형상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작품의 표현이 달라진다는 점에서는 서로 비교할 수 있다.

2026년 3월 이화조각전에서는 김순임의 '보리얼숲에 뜬 달'처럼 행위와 기록을 결합한 작품이 소개됐고, 5월 시작된 엠브롤리 전시에서는 캔버스 위에 물감과 재료를 쌓아 만든 회화가 주목받았다. 8월 구승희의 전시에서는 노란 머리의 인물과 새, 꽃, 가족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채색화와 혼합매체 작업이 소개됐다.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재료와 형태를 살피는 일이 함께 필요하다. 엠브롤리의 회화에는 물질을 다룬 흔적이, 김순임의 작업에는 자연에서 이루어진 행위와 시간이, 구승희의 그림에는 반복되는 인물과 주변 사물의 관계가 남아 있다. 구띠갤러리에서 시기를 달리해 소개된 세 전시는 현대미술이 재료의 물성과 신체의 움직임, 색채와 형상을 통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전해 왔음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