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선, 보이지 않는 존재들②] 전경선의 유년, 새와 나뭇잎에 남겨진 소외의 기억

가족 안에서 찾기 어려웠던 자신의 자리, 자연과 동물로 향한 시선… '공존'에서 '차가운 거리'까지, 인간과 관계를 다룬 초기 조각의 변화

2026-10-21     박준식 기자

[KtN 박준식기자]2000년 제작된 전경선의 '공존(Coexistence)'에는 작은 인물과 거대한 동물형 조각이 나란히 서 있다. 사람보다 훨씬 크게 제작된 동물은 짙은 색의 몸체와 굵은 다리로 공간을 차지하고, 곁에 놓인 인물은 상대적으로 작고 가늘다. 동물의 몸에는 사람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구조가 결합돼 있으며, 목 부근에서는 쇠사슬이 아래로 늘어져 있다. 일반적인 인물 조각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인간이 오히려 작은 존재로 놓인 구성이다.

FRP에 아크릴 채색을 더한 작품의 크기는 300×200×250cm다. 사람과 동물을 하나의 공간에 배치하면서도 두 존재의 신체적 비례를 크게 달리했다. 거대한 동물의 몸체와 작은 인간 사이에는 뚜렷한 거리감이 형성된다. 각각의 형상은 독립적으로 서 있지만 같은 공간에 놓이면서 서로의 크기와 위치를 통해 관계를 맺는다.

전경선, '공존'(Coexistence), FRP에 아크릴 채색, 300×200×250cm, 2000. 거대한 동물형 조각과 작은 인체를 함께 배치한 초기 작품. 사진=전경선 작가 자료

전경선의 초기 조각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기울였던 존재들과 연결된다. 가족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발견하기 어려웠던 시기, 전경선은 주변의 자연과 동물을 오래 바라보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새의 움직임과 나뭇잎의 흔들림, 작은 생명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작가에게는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출발점이 됐다.

전경선은 최근 작가노트 '쉽게 부서지고 사라지는 세계'에서 어린 시절 자연이 마음을 품어주는 안식처였다고 밝혔다. 현실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어려울 때마다 자연과 동물에 시선이 머물렀고, 관찰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새와 나뭇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작업 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가 됐다.

가족 안에서 경험한 소외의 감각은 인간의 시선에서 쉽게 밀려나는 존재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인간에게 외면받는 동물과 쓰임을 다한 사물, 관계 안에서 충분히 표현되지 못한 감정이 작품의 소재로 확장됐다. 자연은 단순한 풍경이나 장식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존재하면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생명과 관계를 생각하는 대상이었다.

2000년 '공존'에서 인간과 동물의 크기가 뒤바뀐 듯한 구성은 이러한 관심과 연결해 살펴볼 만하다. 동물은 사람보다 훨씬 큰 신체를 지녔고, 인간은 동물의 곁에 작은 형상으로 놓여 있다. 사람이 동물을 바라보고 분류하는 일반적인 관계와 달리, 관람자는 거대한 동물의 존재감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

동물의 몸에 나타나는 인체를 닮은 구조도 두 존재를 단순히 구별하기 어렵게 만든다. 네 발 달린 동물의 외형 안에 사람의 형상이 결합하면서 각각의 신체적 특징이 한 조각 안에 겹친다. 작은 인간과 거대한 동물을 나란히 놓은 공간 구성에 더해 동물의 몸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존재의 관계가 형성된다.

동물의 목 부근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쇠사슬은 작품에 또 다른 관계를 만든다. 사람의 관리와 통제를 받는 동물을 연상시키는 요소이지만, 거대한 동물과 작은 인물의 비례는 현실에서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관계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두 존재의 크기와 거리, 몸체에 결합한 형상, 사슬의 위치가 함께 작용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여러 방향으로 읽을 수 있게 한다.

전경선은 초기 작업에서 인간과 동물을 각각 고립된 대상으로 다루기보다 서로의 존재에 영향을 받는 관계로 구성했다. 한쪽의 의미가 다른 쪽의 크기와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조각이다. 2000년 '공존'에서 인간의 신체적 비중을 줄이고 동물의 크기를 확대한 선택은 작품 전체의 시각적 중심을 바꾸는 방식이기도 했다.

2009년 '공존–기억의 형상(Coexistence–The Form of Memory)'에서는 인체와 자연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진다. 서로 떨어져 서 있던 형태들이 가늘고 길게 연결되면서 한 존재의 신체 안에 다른 형상이 겹쳐지는 구성이 두드러진다.

전경선, '공존–기억의 형상'(Coexistence–The Form of Memory), 나무, 350×120×100cm, 2009. 인체와 유기적인 나무 형상이 수직으로 이어진 목조 작품. 사진=전경선 작가 자료

'공존–기억의 형상'은 나무로 제작한 높이 350cm의 조각이다. 아래쪽에는 몸을 굽힌 인체를 연상시키는 형태가 놓여 있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나무줄기처럼 가늘고 길게 뻗은 구조가 이어진다. 옆에는 또 다른 인체형 구조가 서 있으며, 윗부분에서는 가지와 생명체를 닮은 형태들이 불규칙하게 결합한다.

사람의 몸을 이루던 부분은 위로 올라가면서 굽은 줄기와 가지형 구조로 변한다. 독립된 인체의 외형을 유지하기보다 몸의 일부가 다른 형상과 연결되면서 전체적인 윤곽이 길게 확장된다. 작은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형태들도 나무의 구조 안에 결합해 있어 각각의 형상을 분리해서 바라보기 어렵다.

2000년 '공존'에서는 크기가 크게 다른 인간과 동물을 나란히 배치했다면, 2009년 작품에서는 서로 다른 형상이 하나의 수직적인 구조 안에 얽힌다.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가 작품의 배치뿐 아니라 신체의 변형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인물의 팔다리와 몸통은 부분적으로 남아 있지만 전체적인 신체 비례는 크게 달라져 있다. 위로 뻗은 나무 형상은 인체의 길이를 넘어 확장되고, 굵은 부분과 가는 부분이 반복되면서 전체 구조에 불규칙한 리듬을 만든다. 목재를 조각한 부분과 그 사이로 비어 있는 공간이 교차해 사람의 몸과 자연의 형상이 서로 연결된 듯한 구성을 이룬다.

같은 '공존'이라는 제목 아래 놓인 2000년과 2009년의 작품은 형식에서도 차이가 있다. FRP를 사용한 2000년 작품은 짙은 색의 거대한 동물형 신체와 작은 인물의 대비가 강하다. 2009년 작품은 나무의 자연스러운 색조를 유지하면서 여러 인체형 구조를 가늘게 이어 붙인 구성을 지닌다.

두 작품 모두 인간과 다른 존재를 함께 다루지만 전경선의 관심은 점차 개별 형상의 크기와 배치를 넘어 서로 다른 존재가 하나의 신체 안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확장됐다. 사람과 동물이 같은 공간에 머무는 관계에서 인체와 자연물이 서로의 일부를 이루는 관계로 조형 언어가 달라졌다.

전경선이 어린 시절 자연을 바라보며 만들어낸 이야기에는 새와 나뭇잎, 작은 생명들이 서로 연결되는 상상이 자리했다. 자연 속에서 관찰한 각각의 존재가 독립적인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관계를 맺었던 경험은 이후 조각에서 서로 다른 형상을 결합하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작가의 관심은 동물과 자연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로도 이어졌다. 외형적으로 가까이 있거나 같은 공간에 머물더라도 각자의 기억과 감정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인식이 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물의 형태를 분리하거나 서로 다른 위치에 배치하는 방식은 그러한 관계의 차이를 표현하는 조형 요소로 사용됐다.

2010년 '우산 속 기억(A Memory Under Umbrella)'에는 커다란 붉은 우산과 여러 인체형 조각이 등장한다. 나무에 아크릴 채색을 더한 작품으로, 우산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자세의 인물들이 배치돼 있다.

전경선, '우산 속 기억'(A Memory Under Umbrella), 나무 및 나무에 아크릴 채색, 230×190×200cm, 2010. 붉은 우산과 여러 인체형 조각을 결합한 작품. 사진=전경선 작가 자료

'우산 속 기억'에서 붉은 우산은 가장 강한 색채를 지닌 부분이다. 우산 안쪽에는 꽃을 연상시키는 밝은 색상의 형태들이 이어지고, 아래쪽에는 분홍빛이 더해진 인체형 조각이 길게 내려온다. 우산 주변에는 나무의 자연스러운 색을 지닌 인물들이 각각 다른 자세로 놓여 있다.

왼쪽 인물은 바닥에 발을 딛고 서 있지만 오른쪽 인물은 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자세로 배치됐다. 우산 아래쪽의 인물 역시 주변의 다른 형상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색채와 자세를 지닌다. 여러 인물이 하나의 우산 주변에 모여 있으면서도 서로 직접 맞닿지는 않는 구성이다.

우산은 일상에서 비나 햇빛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물이다. 전경선은 우산의 구체적인 형태를 유지하면서 인물들의 신체를 비례에 맞지 않게 늘이거나 변형했다. 일상적인 사물과 비현실적인 인체가 한 작품에 놓이면서 우산의 익숙한 기능과 주변 인물들의 낯선 모습이 대비된다.

붉은 우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은 여러 인물이 함께 머무는 영역이지만 각각의 인물은 독립된 자세를 취한다. 같은 사물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의 관계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인물마다 다른 위치와 방향을 부여한 구성은 공동의 공간 안에서도 개별적인 존재가 유지되는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작품에서 우산은 단순한 배경 소품보다 인물들의 위치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우산의 크기와 색채가 주변의 인체를 하나의 구성 안에 묶고, 각 인물 사이의 거리와 높이 차이가 작품의 전체적인 균형을 이룬다. 인물을 완전히 하나로 결합하기보다 같은 사물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형상이 관계를 맺도록 구성한 것이다.

2000년 '공존'에서 인물과 동물의 크기를 달리했던 방식은 '우산 속 기억'에서 인물 사이의 위치와 간격, 색채의 차이로 바뀐다. 서로 다른 존재가 하나의 공간에 함께 놓여 있지만 각자의 형태를 유지한다는 관심은 이어진다.

전경선이 반복적으로 다루는 기억도 이 시기 작품에서 구체적인 사물과 연결된다. 우산은 일상적인 경험을 떠올릴 수 있는 사물이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은 현실적인 인체의 비례를 따르지 않는다. 친숙한 사물과 낯선 신체가 결합하면서 하나의 특정한 경험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구성이 만들어진다.

작가가 어린 시절 자연과 동물을 관찰하며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었던 경험은 현실에서 익숙한 대상들을 다른 관계로 연결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우산 속 기억'에서도 우산과 사람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사용하면서 인물의 크기와 자세, 공간적 관계를 변형했다.

2012년 '차가운 거리(Cold City)'에서는 사람 사이의 간격과 분리된 신체가 더욱 두드러진다. 나무로 제작된 여러 인체형 조각이 넓은 공간에 흩어져 있으며, 얼굴과 몸통이 서로 떨어진 채 놓인 부분도 나타난다.

전경선, '차가운 거리'(Cold City), 나무, 360×300×200cm, 2012. 분리된 얼굴과 길게 늘어진 인체, 작은 동물형 조각을 공간에 배치한 작품. 사진=전경선 작가 자료

'차가운 거리'의 중심에는 길게 늘어진 인체형 조각이 놓여 있다. 몸통은 가늘고 길게 아래로 이어지지만 얼굴은 신체에서 떨어진 위치에 있다. 머리 위쪽에는 나뭇가지와 잎을 연상시키는 형상이 결합돼 있으며, 얼굴의 윤곽에는 눈과 코, 입의 특징이 남아 있다.

주변에는 크기가 다른 인체형 조각들이 각각 떨어져 배치돼 있다. 일부는 가늘고 긴 몸체를 지니고 있고, 다른 형상은 일부 신체가 생략된 모습이다. 한쪽에는 작은 동물형 조각도 놓여 있다. 서로 다른 크기의 인물과 동물이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지만 각 형상 사이에는 상당한 간격이 유지된다.

가장 큰 인체의 얼굴과 몸통이 분리된 구성은 사람을 하나의 완결된 신체로 바라보는 방식에서 벗어난다. 얼굴은 상부에 따로 놓이고 몸통은 아래로 길게 이어지며 두 형상 사이에 빈 공간이 남는다. 주변의 인물들도 각각 독립된 위치에 있어 하나의 인체를 중심으로 모든 형상이 결합하지는 않는다.

얼굴과 몸을 분리하고 인물 사이의 간격을 넓힌 방식은 작품의 제목인 '차가운 거리'와 함께 읽을 수 있다. 한 공간에 존재하지만 서로 떨어져 있는 인물들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거리감을 연상시킨다. 신체의 일부가 분리된 구성 역시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내면의 감정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작가의 관심과 연결된다.

분리된 얼굴이나 길게 늘어진 신체를 특정한 감정 하나로 대응시키기보다 각 형상의 위치와 공간 구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차가운 거리'에는 다양한 크기의 인체와 동물이 배치돼 있고, 얼굴과 몸의 분리뿐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 사이의 간격도 작품의 중요한 요소다. 신체 내부의 분리와 개별 존재 사이의 거리가 함께 나타나는 구성이다.

2000년 '공존'에서는 사람과 동물이 서로 다른 크기로 나란히 놓였고, 2009년 '공존–기억의 형상'에서는 인체와 자연물이 하나의 구조로 연결됐다. 2010년 '우산 속 기억'은 공통의 사물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을 배치했고, 2012년 '차가운 거리'에서는 신체의 일부를 분리하거나 각 형상을 넓게 흩어놓았다.

인간과 동물, 자연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한 조각은 점차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까지 다루게 됐다. 나무의 표면과 인체의 비례, 형상 사이에 형성된 빈 공간은 각기 다른 관계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전경선은 어린 시절 가족 안에서 경험한 소외를 바탕으로 인간의 시선에서 밀려나는 존재들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설명한다. 자연과 동물을 바라보며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는 이후 인간과 동물의 관계, 사람 사이에 남겨진 기억과 감정으로 확장됐다.

작품에 등장하는 새와 나뭇잎은 어린 시절의 자연 관찰에서 비롯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체를 변형하고 기억을 표현하는 조형 요소로 사용됐다. 동물과 사물 역시 인간에게 종속된 배경보다 인간과 관계를 맺는 독립적인 존재로 다뤄졌다.

'공존'에서 거대한 동물 곁에 서 있던 작은 인간은 '우산 속 기억'에서 다른 인물들과 공간을 나누고, '차가운 거리'에서는 분리된 얼굴과 몸통, 서로 떨어진 인물들로 이어진다. 전경선은 인체의 크기와 비례를 바꾸고, 일부를 분리하거나 서로 다른 형상을 결합하면서 존재 사이의 관계를 조각으로 구성해 왔다.

2012년 '차가운 거리'의 인물들은 같은 공간에 놓여 있지만 서로 이어지지 않은 부분을 남긴다. 신체의 일부가 분리된 채 공중에 놓이고, 작은 동물형 조각은 다른 인물들과 거리를 두고 서 있다. 어린 시절 자연에서 발견했던 작은 존재들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내면과 관계를 다루는 작업으로 넓어졌으며, 조각 안에서는 서로 다른 존재가 가까이 있거나 멀리 떨어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