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방혜자 ‘하늘의 땅’…179㎝ 원 안에서 퍼져나간 빛, 하늘과 땅을 하나로 잇다

밝은 중심을 감싸는 주황·적색과 청록의 색띠…사방으로 뻗는 가는 선이 만든 2011년의 우주 사각의 틀에서 원형 지지체로 확장된 회화…빛·생명·순환이 하나의 구조 안에서 만난 후기 대표작

2026-10-21     박준식 기자

[KtN 박준식기자]방혜자의 2011년작 ‘하늘의 땅’은 지름 179㎝의 거대한 원으로 시작한다. 작품 한가운데에는 흰빛에 가까운 밝은 중심이 열려 있고, 그 주변을 주황과 붉은색, 자주색과 청록 계열의 색띠가 여러 겹 감싼다. 중심에서 시작한 가느다란 선들은 한 방향으로 모이기보다 사방으로 퍼지며 원의 가장자리까지 이어진다. 색과 선, 지지체의 형태가 모두 하나의 중심을 공유하면서 작품 전체가 빛을 품은 거대한 원으로 작동한다.

방혜자, ‘하늘의 땅’, 2011, 패널, 종이에 천연안료, 지름 179㎝,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밝은 중심을 둘러싸고 붉은색과 청록 계열의 색띠가 겹치며 가느다란 선이 사방으로 뻗는다. 원형 지지체와 색의 확산이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방혜자의 후기 대표작이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작품의 첫 인상은 중심의 밝음과 바깥으로 번져나가는 색의 운동에서 만들어진다. 중앙에는 가장 밝은 색이 응축돼 있고, 그 주위를 따뜻한 주황과 붉은색이 감싼다. 조금 더 바깥으로 이동하면 청록과 푸른색이 넓어지면서 온도가 달라진다. 중심 가까이에 모인 따뜻한 색과 외곽으로 퍼지는 차가운 색이 여러 층에서 교차하며 하나의 원 안에 깊이를 만든다.

색띠 사이로 수없이 이어지는 가는 선은 작품에 또 다른 움직임을 더한다. 선들은 중심에서 외곽으로 길게 뻗으면서도 간격과 굵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서로 겹치거나 갈라지며 미세한 떨림을 만든다. 빛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는 강한 폭발보다 안쪽에서 축적된 에너지가 천천히 사방으로 퍼지는 감각에 가깝다.

179㎝에 이르는 원형 지지체도 작품의 의미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방혜자는 이전부터 원을 반복적으로 사용했지만 ‘하늘의 땅’에서는 원을 작품 내부에 그려 넣는 차원을 넘어 지지체 전체의 형태로 확장했다. 원을 둘러싼 사각의 외곽이 사라지면서 작품은 중심과 둘레만으로 구성된다. 시선 역시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보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따라 움직인다.

방혜자의 1980년대 작품에서는 하늘과 땅을 떠올리게 하는 영역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만나거나 스며드는 구성이 이어졌다. 1988년 ‘하늘과 땅과 손을 잡고’에서는 두 세계가 하나의 작품 안에서 관계를 이루었다. ‘하늘의 땅’에 이르면 두 영역은 원 안에서 더욱 밀접하게 결합한다. 위쪽의 하늘과 아래쪽의 땅이라는 익숙한 방향 대신 중심과 둘레, 안쪽과 바깥쪽의 관계가 작품의 공간을 조직한다.

제목 ‘하늘의 땅’도 이 구조와 맞물린다. 하늘과 땅이라는 두 개의 공간은 하나의 제목 안에서 이어지고, 작품에서도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 밝음과 짙음, 중심과 주변이 하나의 원을 공유한다. 서로 다른 영역이 대립하는 구성보다 하나의 순환 안에서 호응하는 구조가 강하다.

방혜자가 1980년대 이후 자연의 음양과 계절, 오행, 동양철학에 대한 성찰 속에서 원형 모티프를 발전시킨 흐름도 ‘하늘의 땅’에 깊게 들어와 있다. 원은 시작과 끝이 분리되지 않고 선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형태다. 방혜자의 후기 작업에서 원은 우주와 생명, 순환과 빛을 함께 담아내는 조형언어로 확장됐다.

1993년 ‘정관묘오’와 비교하면 원의 변화가 더욱 또렷해진다. ‘정관묘오’에서는 40×40㎝ 종이 안에 적갈색 원과 서체가 자리하며 내면의 집중을 만들었다. 작은 원 안으로 시선을 모으고 고요한 성찰의 시간을 응축한 작업이었다. 약 18년 뒤 ‘하늘의 땅’에서는 원 자체가 지름 179㎝의 작품이 된다. 내면을 향해 밀도를 모으던 원이 관람자의 신체를 마주할 만큼 커지고, 중심의 빛은 원 전체를 향해 퍼져나간다.

재료의 변화도 긴 시간 축적돼 있다. 방혜자는 1970년대부터 한지의 물성을 탐구했고, 1990년대에는 천연안료를 본격적으로 작업에 끌어들였다. 1996년 이후에는 프랑스 남부 루시용의 흙을 사용했고, 이후 부직포까지 재료의 범위를 넓혔다. ‘하늘의 땅’에서는 종이와 천연안료가 다시 중심에 놓인다. 오랫동안 축적한 재료의 경험이 원형 구조 안에서 밝음과 색의 깊이를 만드는 방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천연안료의 색은 균일한 표면보다 미세한 농담을 만든다. 붉은색 안에서도 주황과 적갈색, 자주색이 이어지고, 청록 역시 밝은 부분과 깊은 부분이 여러 층으로 나뉜다. 가느다란 선 사이로 종이의 밝음이 드러나는 부분에서는 빛이 안쪽에서 올라오는 듯한 효과가 생긴다.

2007년 ‘물성과 빛’에서 방혜자는 청록과 황토·적갈색이 서로 스며드는 경계에서 밝음을 만들었다. 닥지와 천연안료, 루시용 황토의 입자가 색의 깊이를 형성했고, 물질이 곧 빛의 근원으로 작동했다. ‘하늘의 땅’에서는 그 경험이 훨씬 큰 원 안에서 확장된다. 빛은 특정한 경계에 머무르기보다 중심에서 시작해 여러 색층과 선을 지나 작품 전체로 퍼진다.

중심의 밝은 부분은 작은 태양이나 별, 생명의 씨앗처럼 읽힐 여지를 품는다. 그 주변을 감싼 주황과 붉은색은 열과 생명의 온도를 만들고, 외곽으로 넓어지는 청록은 공간의 깊이를 끌어낸다. 원 안에서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이 반복적으로 만나면서 중심의 빛은 단일한 색보다 여러 층의 관계 속에서 살아난다.

가느다란 선들은 빛의 확산을 한층 구체적으로 만든다. 직선처럼 빠르게 뻗는 부분과 미세하게 흔들리는 부분이 함께 나타나고, 선의 밀도가 높은 곳과 성긴 곳이 번갈아 이어진다.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기계적인 패턴보다 손의 리듬이 남은 방사형 구조에 가깝다. 그 미세한 차이가 원 전체에 호흡과 생동감을 더한다.

방혜자의 후기 작업에서 원과 사선, 불꽃과 날개를 연상시키는 형태가 반복된 것도 빛과 생명의 에너지를 다양한 구조로 풀어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하늘의 땅’에서는 원과 방사형 선이 가장 밀접하게 결합한다. 원이 에너지를 품는 공간이라면 가는 선은 그 에너지가 바깥으로 이동하는 경로가 된다.

중앙과 외곽의 관계도 단순한 대비보다 점진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중심의 흰빛에서 주황과 적색, 자주색을 지나 청록과 푸른색으로 이동하면서 색의 온도와 밀도가 계속 바뀐다. 밝음이 한곳에 응축돼 있으면서도 주변 색들이 그 빛을 받아 각기 다른 농도로 확장한다.

이 때문에 작품은 한 지점만 오래 바라보게 하기보다 중심에서 둘레로, 다시 둘레에서 중심으로 시선을 반복해서 이동시킨다. 원의 외곽에 도달한 시선은 자연스럽게 다시 안쪽의 밝은 핵으로 돌아온다. 작품을 보는 움직임 자체가 순환을 만든다.

원형 지지체의 의미도 여기서 더욱 선명해진다. 사각형 작품에서는 네 모서리와 위아래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기준이 되지만, ‘하늘의 땅’에서는 모든 방향이 중심을 기준으로 다시 조직된다. 어느 지점에서도 원의 둘레는 같은 중심과 연결된다. 하늘과 땅, 안과 밖, 시작과 끝을 하나의 순환 안에서 바라보는 방혜자의 사유가 작품의 물리적인 형태에까지 들어온 셈이다.

방혜자, ‘하늘의 땅’, 2011, 패널, 종이에 천연안료, 지름 179㎝,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밝은 중심을 둘러싸고 주황·적색과 청록 계열의 색띠가 여러 겹 이어지며 가느다란 선이 사방으로 퍼진다. 원형 지지체와 색의 확산이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방혜자의 후기 대표작이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하늘의 땅’은 방혜자의 빛이 회화의 일부에서 작품 전체의 질서를 만드는 단계로 확장된 작업이기도 하다. 1961년 ‘지심’에서는 짙고 거친 유화의 물성 사이에서 밝은 부분이 모습을 드러냈고, 1970년대 이후 한지를 만나면서 빛은 종이의 섬유 안으로 스며들었다. 1990년대 천연안료와 흙은 색의 깊이를 넓혔고, 2000년대 부직포 작업에서는 빛이 넓은 공간으로 분산됐다.

2011년 ‘하늘의 땅’에서는 빛이 작품 전체의 형태를 결정한다. 원형 지지체, 중앙의 밝음, 여러 겹의 색띠와 가는 선 모두가 빛의 발생과 확산을 중심으로 결합한다. 빛이 작품 안에 놓인 하나의 대상에서 회화 전체를 조직하는 원리로 이동한 것이다.

작품 제목에 들어간 ‘땅’ 역시 물질의 세계와 연결된다. 종이와 천연안료는 손에 잡히는 물질이고, 방혜자는 오랫동안 흙과 섬유의 성질을 작업에 받아들여왔다. 반면 ‘하늘’은 넓이와 빛, 우주적 공간을 연상시킨다. ‘하늘의 땅’에서는 물질과 공간, 대지와 빛이 원 안에서 함께 움직인다.

‘물성과 빛’에서 실제 흙의 입자가 밝음을 만들어냈다면 ‘하늘의 땅’에서는 오랜 재료 탐구가 거대한 원의 에너지로 응축된다. 종이와 안료라는 구체적인 물질이 중심의 빛을 품고, 가는 선과 색띠를 따라 그 밝음을 바깥으로 내보낸다. 물질을 통해 비물질적인 빛의 감각에 도달하려 했던 방혜자의 작업이 한층 넓은 구조를 얻는다.

2020년 ‘빛의 기쁨 I’과 나란히 놓으면 후기 원형의 변화도 흥미롭다. ‘하늘의 땅’에서는 지지체 자체가 원형이고, 밝은 중심에서 색과 선이 둘레로 넓게 퍼진다. ‘빛의 기쁨 I’에서는 다시 사각형 안에 원을 들여오면서 중심의 밝음과 동심원의 밀도를 더욱 응축한다. 방혜자의 원은 하나의 완성된 형식을 반복하기보다 작품마다 중심과 둘레, 밝음과 색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했다.

‘하늘의 땅’에서 원은 형상이면서 작품의 몸 자체다. 중심에서 태어난 빛은 주황과 적색을 지나 청록으로 번지고, 수많은 가는 선은 그 에너지를 사방으로 운반한다. 한쪽 방향으로 끝나는 운동보다 중심과 둘레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순환이 작품 전체를 감싼다.

방혜자는 오랜 시간 하늘과 땅, 마음과 우주, 물질과 빛을 서로 이어지는 관계로 다뤘다. ‘하늘의 땅’에서는 그 관계가 지름 179㎝의 원 하나에 응축된다. 밝은 중심에서 태어난 색과 선이 원의 둘레까지 퍼지고 다시 중심으로 시선을 되돌리면서, 하늘과 땅은 위아래로 나뉜 두 공간에서 하나의 순환하는 세계로 바뀐다. ‘하늘의 땅’은 방혜자의 빛이 회화의 일부를 넘어 작품 전체의 형태와 질서를 이루게 된 후기 작업의 중요한 결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