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방혜자 ‘빛에서 빛으로’…푸른 깊이를 가르는 붉은 빛의 입자
넓은 청색 사이 짙은 수직의 흐름, 그 안에 밀집한 주황·적색의 작은 빛 원형으로 퍼지던 빛을 입자와 세로의 밀도로 전환…2014년 후기 회화의 또 다른 방향
[KtN 박준식기자]방혜자의 2014년작 ‘빛에서 빛으로’는 깊은 푸른색을 세로로 길게 가른다. 양옆에는 청색과 청록이 넓게 번지고, 중앙에는 더욱 짙은 남청색의 띠가 위에서 아래로 이어진다. 그 안에는 주황과 붉은색, 노란빛에 가까운 작은 흔적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다. 180×120㎝의 세로형 작품 전체가 하나의 긴 흐름을 이루면서 수많은 작은 색의 입자가 어둠 속에서 떠오른다.
작품에서 가장 강한 것은 중앙의 세로축이다. 짙은 청색은 위에서 아래로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양옆의 푸른 영역을 가른다. 직선으로 반듯하게 잘라낸 띠보다 안료가 스며들고 번지면서 만들어진 유기적인 흐름에 가깝다. 가장자리에는 짙고 옅은 색이 겹치고, 중앙과 주변의 푸른색도 여러 농도로 섞여 있다.
그 짙은 색 안에서 작은 주황과 붉은 흔적들이 살아난다. 하나하나는 매우 작지만 수가 많고, 서로 다른 간격으로 흩어져 있다. 가까이에서는 개별적인 점과 짧은 붓질로 읽히고, 거리를 두면 수많은 색이 연결되면서 하나의 빛줄기처럼 이어진다.
빛을 하나의 커다란 중심으로 응축했던 2011년 ‘하늘의 땅’과는 다른 방식이다. ‘하늘의 땅’에서는 밝은 중심을 둘러싸고 적색과 청록의 색띠가 겹쳤으며, 가느다란 선들이 중심에서 원의 둘레를 향해 사방으로 퍼졌다. 원형 지지체 전체가 빛의 발생과 확산을 받아내는 구조였다.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중심과 둘레의 관계가 세로의 흐름으로 바뀐다. 밝은 핵 하나가 작품 전체를 조직하는 대신 수많은 작은 색이 짙은 청색 안에서 각각의 밝음을 만든다. 빛의 운동 역시 원의 중심에서 사방으로 퍼지는 방향에서 위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이 변화는 방혜자의 후기 회화가 하나의 원형에 머물기보다 빛의 상태를 계속 다른 형식으로 탐색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원은 우주와 순환을 담아내는 중요한 조형언어였고,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그 우주의 감각이 수많은 작은 입자와 긴 수직의 흐름으로 다시 압축된다.
양옆의 푸른색도 단순한 배경으로 물러서지 않는다. 청록과 남청, 밝은 푸른색이 여러 농도로 스며들며 넓은 공간을 만든다. 같은 청색 안에서도 밝고 어두운 영역이 이어지고, 닥지의 섬유가 색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표면의 깊이가 달라진다. 평면적인 단색보다 안쪽으로 여러 층이 이어지는 듯한 공간감이 생긴다.
방혜자가 오랫동안 다뤄온 닥지는 이 색의 깊이를 받아내는 중요한 재료다. 천연안료가 종이의 섬유 안으로 스며들면서 표면에 놓인 색과 종이 안쪽에 머문 색이 함께 보인다. 붓으로 한 번 그은 색보다 여러 농도의 색이 겹치며 푸른 영역 안에 미세한 깊이를 만든다.
중앙의 주황과 붉은빛은 푸른색과 강한 온도 차이를 이룬다. 차가운 청색 안에 따뜻한 색이 작은 단위로 들어가면서 색 하나하나의 존재감이 커진다. 붉은색의 면적은 푸른색보다 훨씬 작지만 눈은 자연스럽게 그 작은 흔적을 따라 위아래로 이동한다.
작은 색의 입자가 작품의 시선을 움직이는 방식이다. 붉은색이 한곳에 크게 모이기보다 여러 높이에서 나타나고, 간격도 일정하게 반복되지 않는다. 촘촘한 부분과 성긴 부분이 교차하면서 수직의 흐름에도 리듬이 생긴다. 하나의 강한 광선보다 수많은 작은 빛이 모여 긴 흐름을 만드는 구조다.
이 입자들은 별빛과도 연결돼 읽힌다. 방혜자는 1980년대 이후 천체와 성운, 우주의 빛을 지속적으로 다뤘고 후기에는 우주의 거대한 규모와 아주 작은 빛의 입자를 함께 사유했다.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광대한 우주를 직접 펼치는 대신 짙은 푸른 공간 안에 작은 빛들을 밀집시켜 극대와 극미의 감각을 한 작품에 겹친다.
작품 제목의 ‘빛에서 빛으로’도 이런 구조와 맞물린다. 하나의 빛이 다른 빛으로 이어지고, 작은 입자가 또 다른 입자를 만나며 전체의 흐름을 만든다. 출발점과 도착점을 분명하게 나누기보다 빛이 계속 이어지는 상태를 제목과 구성에 함께 담았다.
푸른색 안에 박힌 붉은 흔적은 개별적으로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의 집합을 이룬다. 각각의 점은 독립된 작은 빛이고, 멀리에서는 하나의 긴 밝음으로 연결된다. 개별성과 전체가 한 작품 안에서 동시에 성립하는 방식이다.
방혜자의 회화에서 빛은 점차 큰 형상에서 작은 단위로 세분화됐다. 초기에는 짙은 유화의 마티에르 사이에서 밝은 부분이 나타났고, 한지를 만나면서 색은 종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천연안료와 흙, 부직포를 거치며 빛은 재료의 표면과 섬유, 입자 사이에서 다양한 깊이를 얻었다.
‘빛에서 빛으로’에 이르면 빛 자체가 작은 색의 단위로 쪼개진다. 하나의 중심을 밝게 만드는 방식과 함께 작은 흔적 수백 개가 각자의 위치에서 빛을 품는 방식이 들어온다. 커다란 빛과 작은 빛의 차이보다 수많은 밝음이 함께 존재하는 상태가 중요해진다.
2011년 ‘하늘의 땅’에서 지름 179㎝의 원형 전체가 하나의 우주처럼 열렸다면, 2014년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우주의 감각이 180×120㎝의 세로형 작품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원을 따라 순환하던 시선은 중앙의 짙은 띠를 따라 위아래로 움직이고, 원형의 중심에서 뻗어나가던 빛은 수많은 입자로 분산된다.
세로의 형식은 상승과 하강을 동시에 품는다. 눈은 아래에서 위로 작은 색을 따라 올라갈 수도 있고, 위에서 아래로 긴 흐름을 따라 내려올 수도 있다. 어느 한 방향을 고정하기보다 빛의 입자들이 화면 안에서 계속 이동하도록 만든다.
작품의 양옆에서 넓게 자리한 푸른 영역은 중앙의 밀집된 색을 감싸면서 고요한 공간을 만든다. 짙은 세로 띠에 작은 빛들이 집중될수록 주변의 청색은 더욱 넓게 느껴진다. 중앙의 밀도와 양옆의 여유가 서로 다른 호흡을 만든다.
이 대비는 방혜자가 오래 이어온 명상적 작업 태도와도 연결된다. 빽빽한 색과 넓은 색, 작은 빛과 깊은 청색이 함께 놓이며 시선은 한 번에 작품 전체를 지나가기보다 한곳에 머물렀다가 다시 이동한다. 작은 색 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그 주변의 푸른 깊이가 다시 들어오고, 다시 다른 붉은 흔적으로 시선이 옮겨간다.
‘물성과 빛’에서 청록과 황토·적갈색이 맞닿는 경계에서 밝음이 올라왔다면,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청색과 붉은색의 강한 온도 차이가 빛의 입자를 또렷하게 만든다. 닥지와 천연안료라는 재료는 이어지지만 색을 조직하는 방식은 달라졌다.
방혜자는 같은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빛이 생기는 구조를 계속 변주했다. 종이에 안료가 스며드는 물성은 유지되고, 작품마다 중심과 주변, 입자와 색면, 원과 수직의 관계가 새롭게 구성된다. 재료의 지속성과 조형의 변화가 후기 작업을 함께 이룬다.
‘빛에서 빛으로’의 붉은 입자에는 물감의 흔적과 빛의 이미지가 동시에 겹친다. 실제로는 천연안료가 종이에 남긴 색이지만, 짙은 청색 안에서 작은 색들은 별과 불씨, 생명의 씨앗처럼 떠오른다. 방혜자의 후기 작업에서 반복된 빛과 생명의 관계가 아주 작은 단위로 압축되는 부분이다.
작은 점 하나는 미세하지만 수많은 점이 모이면 작품 전체의 흐름을 바꾼다. 방혜자가 우주의 빛에서 빛의 입자까지 함께 사유한 흐름은 이런 크기의 전환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거대한 우주와 작은 생명의 단위가 서로 다른 세계보다 하나의 연속된 질서로 놓인다.
푸른 영역 역시 우주나 하늘을 하나의 풍경처럼 묘사하기보다 색 자체로 깊이를 만든다. 형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이미지보다 색과 입자의 관계가 공간을 구성한다. 관람자의 시선은 특정 대상을 찾기보다 밝음의 위치와 색의 밀도를 따라 움직인다.
이 작품에서 천연안료는 정신적인 주제를 담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물리적인 입자다. 각각의 색은 닥지의 섬유와 만나 농도를 달리하고, 그 차이가 수직의 흐름과 공간의 깊이를 만든다. 방혜자가 후기까지 재료의 물성을 세밀하게 다뤘던 이유도 빛을 색의 상징에 그치지 않고 실제 색층 안에서 발생시키려는 방향과 이어진다.
‘빛에서 빛으로’는 제목처럼 하나의 완성된 빛을 제시하기보다 밝음이 계속 이어지는 상태를 만든다. 주황과 붉은빛의 작은 흔적은 하나씩 분리돼 있으면서도 짙은 푸른 띠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그 흐름은 캔버스의 위아래로 이어진다.
2011년 ‘하늘의 땅’에서 빛이 원의 중심에서 둘레로 퍼졌다면, 2014년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빛이 수많은 입자로 나뉘어 세로의 깊이를 만든다. 거대한 원 안에 응축됐던 우주의 에너지는 작은 붉은 흔적들로 세분화되고, 각각의 빛은 짙은 청색 속에서 서로를 이어 하나의 긴 흐름을 만든다. 방혜자의 후기 회화에서 빛은 중심과 확산, 입자와 흐름을 오가며 끊임없이 새로운 구조를 얻었다. ‘빛에서 빛으로’는 그 변화가 가장 응축된 형태로 드러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