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인간의 조건⑨] 일하지 않아도 존엄한 인간…살아남을 사람의 새로운 조건

2025년 한국 임금근로자 일자리 만족도 38.3%, 일과 가정의 균형 중시 46.5%…AI가 노동을 대신하는 시대, 생계의 안정과 인간의 선택권·경험·관계·사회참여의 가치

2026-11-05     임우경 기자

[KtN 임우경기자]한국에서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조건은 수입과 안정성이다. 2025년 사회조사에서도 수입과 안정성이 적성·흥미보다 앞섰다. 직장은 생활비를 마련하는 수단이면서 개인의 사회적 위치와 생활방식을 결정하는 기반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어 경제적으로 독립한 뒤 가정을 꾸리고 노후를 준비하는 과정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삶의 경로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러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만족도가 반드시 높은 것은 아니다. 2025년 임금근로자의 전반적인 일자리 만족도는 38.3%였다. 2년 전보다 3.2%포인트 상승했지만 만족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10명 가운데 4명에 미치지 못했다. 일과 가정생활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46.5%로, 일을 우선한다는 응답 34.3%보다 많았다. 경제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직장 밖의 생활과 가족, 개인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적 업무를 수행하고 로봇이 육체노동의 일부를 대신하는 시대에는 직업과 생활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 AI의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과 직무의 구성이 달라질 수 있으며, 개인이 자신의 노동을 제공해 소득을 얻는 방식도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기술이 반복적인 업무를 줄여준다면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재편하는 영상 산업의 권력과 창의성의 경계 .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술이 확보한 시간이 사람의 여가와 생활의 안정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일부 기업의 비용 절감과 이익 증가에 집중될지는 고용과 임금, 노동시간과 사회보장제도에 따라 달라진다. AI의 발전으로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줄어들더라도 개인의 생계비가 자동으로 감소하거나 충분한 소득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25년 생성형 AI가 세계 일자리의 약 4분의 1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가장 가능성이 큰 변화는 직업 전체의 소멸보다 업무 내용의 재편이었다. 사무행정과 전문서비스 등 일부 분야에서는 자동화의 영향이 크게 나타날 수 있지만 다른 직무에서는 AI가 노동자의 업무를 보완하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현재의 연구 결과만으로 인간의 노동이 대부분 사라지는 시점을 예측할 수는 없다. 범용 인공지능(AGI)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광범위하게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도 기술의 발전과 실제 도입 수준, 사회적 수용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AI가 이미 수행하고 있는 업무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노동과 인간의 가치에 관한 논의는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는 '지식인초대석' 대담에서 AI가 인간의 일상적인 업무를 대신하는 미래에 관해 여러 가능성을 제시했다. 기존의 일부 직업이 사라지는 동안 스포츠와 여행, 엔터테인먼트, 사람들 사이의 대화와 교류처럼 현재의 경제활동과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일이 형성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산업과 기술이 변하면 사회가 노동으로 인정하는 활동의 범위도 달라질 수 있다는 취지다.

김 교수는 동시에 AI가 인간보다 더 많은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시대가 반드시 인간에게 행복한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을 수 있다고 봤다. 기술이 이용자의 건강과 생활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선택까지 제한하는 상황을 예로 들었다. 늦은 밤 음식을 주문하려는 사람에게 AI가 건강상 이유로 다른 음식을 권하거나 주문 자체를 막는 상황이다.

사람의 건강을 보호하려는 기술이 개인의 일상적인 선택까지 통제할 수 있다는 우려다. AI가 생활습관을 분석하고 위험을 경고하는 일은 이용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용자가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은 뒤 자신의 생활을 결정하는 것과 시스템이 허용하는 행동만 수행하는 생활은 다르다.

김 교수는 이러한 미래를 인간이 다시 어린아이처럼 보호와 통제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 빗댔다. 기술이 사람을 위해 행동하더라도 인간의 자율성이 약해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AI가 모든 상황에서 인간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는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개인의 의사와 책임을 존중하는 기술 설계는 더욱 중요해진다.

AI가 인간 대체하는 시대에… 토론토 발칵 뒤집은 '가능한 사랑' 이창동, 감독상 수상 소감 사진=2026. 09.16 SNS 갈무리  .(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 이창동 감독이 신작 ‘가능한 사랑’으로 북미 최대 영화 축제인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인 최초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은 지식을 많이 기억하거나 계산을 빠르게 수행하는 능력과 구분된다. 건강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알고도 개인적인 즐거움과 생활의 형편에 따라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직업을 선택할 때도 높은 소득과 안정성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예술적 성취와 사회적 기여, 생활의 여유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선택에는 개인의 가치관과 가족관계, 경제적 여건, 신체적 조건과 사회적 경험이 작용한다. 같은 정보를 제공받더라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AI는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정리하고 예상되는 결과를 비교하도록 도울 수 있지만 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목표와 우선순위는 당사자의 경험과 의사에 따라 달라진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2025년 인간개발보고서의 주제를 'AI 시대의 사람과 가능성'으로 정했다. AI의 성능이 향상되는 과정에서 인간개발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 자체보다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고 실제로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는 관점이다.

인간개발은 소득의 증가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건강하게 생활하고 교육받으며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AI가 특정 업무를 자동화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교육과 의료, 사회적 참여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이 늘어난다면 기술의 경제적 성과와 인간의 삶의 질 사이에는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경제적 생산성이 높은 사람만이 존엄한 삶을 누릴 자격을 갖는다는 생각은 현대 인권의 기본 원칙과도 다르다. 1948년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이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명시했다. 직업의 유무와 소득 수준, 사회적 지위에 따라 인간의 존엄이 달라지는 구조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세계인권선언은 일할 권리와 실업에 대한 보호를 규정하면서 휴식과 여가의 권리도 인정했다. 교육받을 권리와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 역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에 포함했다.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과 함께 직장 밖에서 자신의 삶을 발전시키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려는 취지다.

AI의 발전으로 노동의 경제적 가치가 일부 감소하더라도 이러한 권리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나 노동시장에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도 교육과 의료, 문화생활과 사회적 관계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기술 발전으로 생산성이 높아지는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탱하는 조건은 임금노동의 성과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독일 출신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1958년 저서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했다. 생존을 위해 반복하는 노동과 인간이 사용하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업,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말하고 행동하며 사회에 참여하는 행위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갖는다는 설명이다.

아렌트가 구분한 인간의 활동은 경제적 생산만으로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철학적 근거가 된다. 사람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를 생산하면서 사회를 유지하지만,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공동의 문제를 논의하며 정치적·사회적 결정을 내리는 활동에도 참여한다.

예술 작품을 만들고 공동체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이 모이는 활동에는 경제적 가치와 구분되는 사회적 의미가 포함돼 있다. 이러한 활동은 반드시 높은 소득을 얻는 사람만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AI가 노동과 작업의 일부를 수행하는 범위가 확대되더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참여와 사회적 관계의 의미까지 기술의 생산성으로 환산할 수는 없다. 시민이 공동체의 규칙을 정하고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참여하는 권한은 전문적인 지식이나 경제적 성취의 크기만으로 배분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노동시장에서 받는 보수와 사회적으로 중요한 활동의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어린 자녀를 돌보거나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고 고령의 부모를 간병하는 일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활동은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고 다른 구성원이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지만 경제통계와 임금체계에서 충분히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국제노동기구가 2024년 발표한 추계에서는 2023년 전 세계 15세 이상 인구 가운데 약 7억4800만 명이 돌봄 책임 때문에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여성은 약 7억800만 명, 남성은 약 4000만 명이었다. 보수를 받지 못하는 돌봄이 노동시장 참여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도 경제활동으로 충분히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수치다.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이 임금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녀의 성장과 가족 구성원의 건강, 고령자의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활동에는 경제적 효과와 사회적 가치가 함께 존재한다. 기술이 돌봄 노동의 일부를 지원할 수 있게 되더라도 돌봄을 받는 사람의 권리와 실제 생활조건을 고려하는 일은 계속된다.

AI와 로봇이 약을 복용할 시간을 안내하거나 생활정보를 제공하고 가사노동의 일부를 수행할 수는 있다. 그러나 돌봄의 질은 서비스의 제공 속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용자의 상태를 세밀하게 살피고 예상하지 못한 변화에 대응하며 필요한 지원을 조정하는 일에는 전문지식과 책임, 실제 생활환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람을 돌보는 활동에 정당한 보상을 제공하는 문제도 AI 시대의 노동정책과 연결된다. 돌봄 노동이 사회적으로 중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종사자의 생활이 안정되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임금과 휴식, 안전한 노동환경, 전문교육과 사회보장제도를 갖춰야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도 존엄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예술과 문화활동에서도 경제적 성공과 인간의 성취는 서로 다른 기준으로 평가될 수 있다. 전문 예술가가 작품을 제작하고 공연하는 활동은 노동이면서 창작이다. 반면 직업과 관계없이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지역의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도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표현한다.

[애플의 전략⑦] 사진전까지 브랜드가 된 애플…AI 시대 ‘문화 프리미엄’의 힘과 한계. 사진=Appl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작품이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지 않더라도 창작활동은 개인의 생활에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은 악기를 배우며 새로운 능력을 익히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경험을 정리하며, 공연과 전시를 통해 다른 사람의 표현을 접한다. 경제적 보상과 별개로 문화활동은 자신과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2025년 한국의 사회조사에서 문화예술·스포츠 현장 관람 경험률은 57.7%였다. 2년 전보다 참여가 늘어난 수치다. 자원봉사활동 경험률도 14.4%로 상승했다. 국민들이 노동과 직업 외의 활동을 통해 문화생활을 누리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문화예술·스포츠 현장 관람률이 높아졌다는 사실만으로 국민의 삶의 질이 모두 개선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개인의 소득과 거주지역, 건강과 여가시간에 따라 문화활동에 참여할 기회는 달라진다. 그러나 직업과 생산활동 이외에도 사람들이 시간을 사용하고 의미를 찾는 다양한 활동이 존재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2025년 한국의 여가생활 만족도는 39.4%였다. 같은 해 문화예술·스포츠 현장 관람률이 57.7%에 이르렀지만 여가활동 자체에 만족한 사람은 10명 가운데 4명에 미치지 못했다. 문화시설에 방문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경험이 늘어나는 것과 자신의 일상적인 시간 사용에 만족하는 일은 서로 다른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25년 1833시간으로 전년보다 32시간 줄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집계가 가능한 36개 회원국 평균 1736시간보다는 97시간 길었다. 노동시간은 감소하고 있지만 일과 여가의 균형, 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규모에는 여전히 차이가 존재한다.

AI가 반복적인 사무업무를 줄여주는 효과가 나타나더라도 직장인이 실제로 퇴근 시간을 앞당기거나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릴 수 있는지는 기업의 인력 운용과 노동시간 제도에 달려 있다. 같은 업무를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된 직원에게 추가적인 업무가 배정된다면 생산성 향상이 곧바로 여가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미래를 논의하려면 노동시간의 단축과 임금의 안정, 휴식과 문화활동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함께 살펴야 한다. 시간을 확보한 뒤에도 경제적 부담이 지나치게 크거나 문화시설과 지역사회 활동에 접근하기 어렵다면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생활의 범위는 제한될 수 있다.

AI 시대에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또 다른 조건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다. 인간은 생애 전반에 걸쳐 가족과 친구, 동료와 이웃 등 여러 관계를 형성하며 생활한다. 어린 시절에는 보호와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된 뒤에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노년에는 건강과 생활을 지원받는 경우가 많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5년 발표한 사회적 연결에 관한 보고서에서 전 세계 인구 약 6명 중 1명이 외로움을 경험한다고 분석했다.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은 신체와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치며 교육과 고용, 지역사회의 활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AI 동반자 서비스가 일상적인 대화와 정서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지만 지역사회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와 실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망은 별도로 형성돼야 한다. 장기간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이 AI와 대화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만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 문제, 실제 돌봄의 부족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기술 발전으로 개인의 생활이 편리해질수록 인간관계의 의미도 달라질 수 있다. AI가 대화와 상담의 일부를 지원하고 로봇이 가사노동을 줄여주면 사람들은 기존에 업무와 생활 유지에 사용하던 시간을 다른 활동에 활용할 수 있다. 반면 자동화된 서비스가 사람과의 접촉을 줄이는 방향으로 확대되면 일상적인 교류의 기회가 감소할 가능성도 있다.

김대식 교수는 대담에서 AI가 반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미래에 스포츠와 여행, 사람들 사이의 대화와 교류가 새로운 활동 영역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현재 경제적인 생산활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활동이 새로운 서비스와 직업의 형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더라도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문화활동과 여가가 반드시 직업으로 전환될 필요는 없다. 취미를 통해 수익을 얻는 사람도 있지만 보수를 받지 않고 지역의 축제에 참여하거나 공동체 활동을 지속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활동이 경제적으로 성공해야만 가치 있다고 평가되는 사회에서는 여가와 문화생활까지 경쟁과 생산성의 기준에 종속될 수 있다.

기술 발전 이후의 인간형을 논의할 때도 이와 같은 구분이 중요하다. AI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사람, 높은 전문성을 갖춘 사람,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노동시장과 경제활동에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뛰어난 기술 활용 능력과 경제적 성취를 갖춰야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업을 선택할 때 요구되는 능력과 시민으로서 보장받는 권리는 다른 기준에 속한다. AI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는 고령자나 노동시장 진입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 장애와 질병으로 경제활동이 제한된 사람 역시 사회적 보호와 문화생활, 교육과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생산성에 따른 차등 보상과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은 구분해 다뤄져야 한다.

AI와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전문성을 발전시키는 능력이 중요해질 수 있다. 실제 현장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업의 목표를 정하고 AI가 생성한 결과를 검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성능이 높아져도 결과가 실제 상황에 적합한지 판단하려면 관련 분야의 이해가 필요하다.

AI를 활용해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는 사람과 해당 업무의 목적과 책임을 이해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전문성의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의료정보를 분석하는 AI의 결과를 이용하는 전문가는 환자의 상태와 치료의 조건을 함께 고려해야 하고, 문화유산에 관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창작자는 역사적 맥락과 표현의 정확성을 판단해야 한다.

교육에서도 AI 사용법과 함께 실제 경험을 통해 배우는 능력이 중요하다. 학생이 직접 실험을 설계하고 실패한 원인을 찾으며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과정에서는 단순한 정보 처리 이상의 학습이 이루어진다. 직업과 기술이 변화하더라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필요한 지식을 다시 배우는 능력은 개인의 생활과 경제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창작과 문화활동에서는 개인의 감각과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김혜연 안무가는 대담에서 AI 시대의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을 설명하면서 세밀한 관찰과 신체적 감각을 강조했다. 물체의 재질과 색채, 사람의 목소리와 억양을 주의 깊게 살피는 활동이 창작자의 경험과 표현으로 연결된다는 견해였다.

같은 공간을 경험하더라도 개인은 자신의 기억과 관심에 따라 서로 다른 요소를 발견한다. 음악가는 소리와 리듬의 차이에 주목하고, 무용가는 신체의 움직임과 공간의 관계를 살핀다. 화가는 색채와 형태를 관찰하고, 역사 연구자는 특정한 장소에 축적된 기록과 변화를 추적한다. 이러한 경험은 각자의 전문성과 생활방식에 따라 발전할 수 있다.

AI가 이미지와 음악, 문장을 생성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면서 인간의 감각과 창작 능력이 기술보다 항상 우월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워졌다. 그러나 창작자가 어떤 주제를 선택하고 자신의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지,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결과물의 생산 속도와 구분되는 활동이다.

인간의 전문성과 창작적 경험은 타인과 협력하는 과정에서도 발전한다. 서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갈등을 조정하며 공동의 목표를 정하는 일은 실제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AI가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여러 선택지를 비교할 수 있어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결정에 참여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사회적 책임과 신뢰가 작용한다.

개인의 판단력과 책임감, 새로운 경험을 배우는 능력, 타인과 협력하는 태도는 AI 시대의 직업과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능력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을 기계가 절대로 수행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으며 인간과 AI가 각자의 능력을 활용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과 인간의 능력을 비교하는 것만으로 개인의 미래를 결정하기도 어렵다. 같은 수준의 전문성과 학습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도 경제적 여건과 교육 기회, 건강과 거주지역에 따라 직업을 구하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조건이 다르다. AI를 이용할 수 있는 비용과 시간이 부족한 사람은 기술 활용의 이익을 충분히 누리지 못할 수 있다.

AI 시대의 생존에는 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사회적 조건이 함께 작용한다. 실직한 노동자가 새로운 직무를 배울 수 있는 교육과 훈련, 직업을 전환하는 동안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는 소득 지원, 건강과 주거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가 필요하다.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더라도 실패의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는 생활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AI의 생산성 향상으로 기업이 얻는 경제적 성과가 커질수록 임금과 노동시간, 고용 유지와 사회보장에 반영되는 방식도 중요해진다. 기업이 기술을 통해 비용을 줄인 뒤 인력 채용을 축소하는 경우와 생산성 향상의 일부를 직원의 교육과 임금, 노동시간 단축에 활용하는 경우에는 사회적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노동기구가 다뤄온 AI와 노동시장 연구에서도 기술의 효과는 도입 방식과 경제정책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분석돼 왔다. AI가 노동자의 업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활용되면 생산성과 전문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노동자의 협상력과 고용 안정이 약한 환경에서는 기술 발전의 성과가 일부 기업과 자본 소유자에게 집중될 가능성이 있다.

노동소득과 기술의 소유에서 발생하는 소득 사이의 격차가 커질 경우 사회보장제도의 역할도 달라질 수 있다. 임금노동에 기반한 보험료와 세금으로 복지재정을 마련하는 구조에서는 고용 형태와 소득의 변화가 재정과 급여에 영향을 미친다. 기술 발전으로 늘어난 기업이익과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 실직자와 직업 전환자의 지원, 공공서비스의 확충이 정책 논의에 포함되는 이유다.

AI의 도입으로 모든 사람이 일하지 않아도 충분한 소득을 얻는 사회가 실현됐다는 근거는 없다. 생산과 유통, 돌봄과 공공서비스에는 여전히 인간의 노동이 필요하며 기업과 국가의 경제적 조건도 다르다.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 사회보장 확대는 각기 다른 재원과 운영방식을 요구하는 제도적 선택이다.

디지털 전환은 뷰티 산업의 풍경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은 소비자 경험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며 뷰티 콘텐츠 제작의 전 과정을 혁신하고 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실제 노동시장에서는 업무의 일부가 자동화되는 변화와 새로운 직무가 형성되는 변화가 함께 진행되고 있다. 의료와 교육, 돌봄과 문화산업에서도 AI와 사람의 역할을 나누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개인이 직업을 유지하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문성과 기술을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발전시키는 과정이 계속 요구된다.

동시에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중받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를 돌보는 부모와 고령의 가족을 간병하는 사람, 은퇴한 고령자와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 질병이나 장애로 일하기 어려운 사람의 생활은 노동시장에서 평가받는 생산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의 삶을 지원하는 제도는 AI가 모든 노동을 대체하는 먼 미래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돌봄 부담과 실업, 소득 불안정과 사회적 고립에 대응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AI는 기존의 사회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하도록 지원할 수 있지만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소득과 서비스, 사회적 권리를 대신 보장하지는 않는다.

AI가 사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범위가 확대되면서 시민의 판단권도 중요한 조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공공기관이 AI를 활용해 자료를 분석하고 복지나 교육, 행정서비스의 일부를 자동화하더라도 정책의 우선순위와 예산의 배분, 개인의 권리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는 책임 있는 감독이 필요하다.

AI가 제안한 결과를 시민과 담당자가 이해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도 중요하다. 기술이 제시한 답을 그대로 승인하는 방식과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사회적 결정을 내리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인간의 자율성은 개인이 기술을 사용하는 능력뿐 아니라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제도와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과 연결된다.

세계인권선언이 규정한 노동과 휴식, 교육과 문화생활의 권리는 AI의 발전에 따라 중요성이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이 생산과 정보 처리를 더 많이 담당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보장되는 생활조건과 선택권을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생산성의 증가와 인간의 삶의 질은 각각 다른 지표와 제도를 통해 평가될 수 있다.

2025년 한국에서는 임금근로자의 일자리 만족도가 38.3%, 여가생활 만족도가 39.4%였다. 문화예술·스포츠 현장 관람률은 57.7%, 자원봉사활동 경험률은 14.4%였다. 직업과 여가, 문화활동과 공동체 참여가 개인의 생활에서 서로 다른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경제활동 이외의 경험도 삶의 만족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관여하고 있다.

AI가 반복적인 노동을 줄이고 새로운 기술을 이용할 기회를 제공하더라도 개인에게 충분한 소득과 자유로운 시간이 보장되지 않으면 생활의 안정으로 연결되기 어렵다. 문화시설과 교육, 의료와 돌봄에 대한 접근도 경제적 여건과 지역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확보된 시간과 생산성의 성과가 실제 생활에 반영되도록 하는 노동·복지·문화정책이 중요한 이유다.

AI 시대에 전문성을 유지하는 사람은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결과를 판단하며 다른 사람과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창작자는 자신의 감각과 경험을 작품에 반영하고, 노동자는 기술의 도움을 받아 전문적인 업무의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시민은 AI가 제공하는 정보를 활용하면서도 자신의 생활과 공동체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한 능력을 모두 갖추지 못한 사람도 동등한 존엄을 가진 사회구성원이다. 기술에 적응하는 속도와 노동시장에서 얻는 보상이 다르더라도 교육받고 건강을 유지하며 문화생활과 사회적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2026년 AI 기술은 사무업무와 연구, 창작과 생활서비스의 일부를 수행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기업은 자동화와 생산성 향상을 추진하고 있으며 정부와 공공기관은 AI의 활용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고용과 소득의 안정, 기술 활용의 접근성, 인간의 감독과 시민의 권리, 문화와 돌봄에 대한 공공적 지원도 사회가 결정해야 할 영역으로 남아 있다.

기술이 노동의 일부를 대신하는 속도에 맞춰 사람에게 돌아가는 소득과 시간, 교육과 문화활동의 기회도 달라질 수 있다. AI로 확보한 생산성의 이익을 임금과 노동시간, 사회보장과 공공서비스에 반영하는 정책과 기업의 선택이 인간의 실제 생활을 바꾼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키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존엄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사회적 기반이 AI 시대 인간의 생존 조건을 결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