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임하나 ‘Replenish’, 검은 천 위에 쌓인 기억과 은빛으로 되찾는 균형

광화문국제아트페스티벌 청년작가 선정전…원형 회화와 나뭇가지, 오래된 의자로 풀어낸 감정의 회복과 사유의 구조

2026-10-29     박준식 기자
임하나(LIMHANA).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검은 천이 바닥을 넓게 덮고 있다. 가운데 놓인 오래된 나무 의자에서는 잎이 떨어진 가지들이 위로 뻗어나간다. 의자 뒤편에는 검정과 은빛이 맞닿은 원형 회화가 자리하고, 양쪽에 매달린 새장 형태의 금속 오브제와 공중에 흩어진 검은 깃털이 공간을 채운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의 그림자는 흰 벽을 따라 퍼지며 실제 사물보다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임하나(LIMHANA) 작가가 10월 21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관에서 열린 ‘2026 제21회 광화문국제아트페스티벌’ 아시아현대미술청년작가 선정전에서 선보인 작업이다. ‘Replenish’를 중심으로 ‘생각의 나무’, ‘보이고 싶지 않은, 보일 수밖에 없는’의 조형 요소를 연결해 기억과 감정, 관계 속에서 소모된 내면이 다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을 공간적으로 구성했다.

올해 아시아현대미술청년작가공모전에서는 임하나를 포함한 61명이 전시작가로 선정됐다. 개인의 기억과 트라우마, 가족과 공동체, 환경과 사회적 현실을 다룬 작품들이 출품됐으며, 드로잉을 기반으로 한 회화와 다양한 재료를 결합한 입체 작업이 함께 소개됐다.

임하나는 회화와 사물, 직물이 지닌 서로 다른 성질을 활용했다. 검정과 은빛의 대비, 오래된 의자의 고정된 구조, 바깥으로 뻗는 가지의 선, 바닥에 쌓이는 천의 주름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관계를 맺는다. 감정과 기억이라는 비물질적인 대상을 색채와 질감, 무게와 방향의 차이로 풀어낸 구성이다.

임하나 작가의 ‘Replenish’ 관련 설치 구성. 원형 회화와 오래된 의자, 나뭇가지, 검은 직물과 공중의 오브제가 어우러져 기억과 회복의 과정을 공간적으로 구성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plenish’의 원형 회화에는 짙은 검정과 은빛 마티에르(matière)가 함께 놓인다. 원의 윗부분은 어두운 색이 넓게 차지하고, 아래쪽에서는 은빛 물질이 겹겹이 솟아오르며 불규칙한 경계를 만든다. 은빛의 결은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휘어지거나 겹쳐지면서 파문과 소용돌이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이룬다.

검정은 작가가 설정한 관용과 포용의 색이다. 여러 색을 품는 바탕 위로 은빛의 질감이 차오르면서 소진된 에너지가 서서히 회복되는 과정을 표현했다. 은빛을 단순한 밝음이나 장식으로 사용하기보다 어둠 속에서 축적되는 물질의 변화로 다뤘다.

원의 아래쪽에 집중된 은빛 물질은 깊게 패인 부분과 두껍게 쌓인 부분 사이에서 서로 다른 빛을 낸다. 짙은 바탕과 만나는 경계에는 잔잔한 곡선과 불규칙한 굴곡이 반복된다. 회화의 중심부에 남은 질감은 여러 차례 물질이 쌓이고 변형된 흔적을 담고 있으며, 하나의 원형 안에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을 만든다.

원형이라는 형태도 작품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시작과 끝을 특정하기 어려운 둥근 윤곽 안에서 은빛 물질이 검은 영역과 맞물리고, 경계는 파도처럼 굴곡을 이룬다. 회복을 단번에 완성되는 변화보다 반복과 축적을 거쳐 균형을 되찾는 과정으로 다룬 것이다.

회화 아래 놓인 오래된 의자는 ‘생각의 나무’와 연결된다. 의자의 등받이와 팔걸이는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지만, 양옆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 때문에 앉아서 쉬는 가구로서의 기능은 사라진다. 의자의 등받이 위로 가지들이 솟아오르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굵은 가지에서 갈라진 가느다란 선들은 서로 엇갈리며 복잡한 형태를 이룬다.

의자는 사람의 몸이 머무는 자리이자 휴식의 공간이다. 임하나는 익숙한 가구의 기능을 바꿔 기억과 생각이 머무는 자리로 옮겨 놓았다. 누군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를 비워둔 채 가지들이 차지하도록 구성하면서 부재와 사유의 지속성을 함께 다뤘다.

실제 나뭇가지의 물성에도 시간의 흔적이 담겨 있다. 나무에서 잘려 나온 가지는 생물학적으로 더 자라지 않지만, 작품에서는 여전히 바깥으로 확장하는 형태를 유지한다. 성장이 멈춘 재료에서 계속 이어지는 생각의 움직임을 끌어낸 구성이다.

의자의 정적인 구조와 가지의 불규칙한 선은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의자의 등받이는 일정한 곡선과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가지들은 서로 다른 굵기와 방향으로 뻗으며 예측하기 어려운 형태를 만든다. 기억이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되기보다 시간에 따라 새로운 생각과 감정을 낳는 과정이 가지의 확장과 연결된다.

빛을 받은 나뭇가지의 그림자는 흰 벽을 따라 다시 퍼진다. 실제 가지보다 크게 드리운 그림자들이 서로 겹치면서 공간에는 두 겹의 나무가 형성된다. 의자 주변에 놓인 실체와 벽에 남은 그림자가 다른 크기와 밀도로 나타나며 기억의 잔상과 현재의 사물이 함께 존재하는 듯한 구성을 만든다.

임하나의 ‘Replenish’ 설치 작품을 측면에서 담은 모습. 오래된 의자와 나뭇가지의 입체적 구성, 벽면에 드리운 그림자, 검은 천의 주름이 서로 다른 공간적 깊이를 형성한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의자 아래 넓게 펼쳐진 검은 천은 ‘보이고 싶지 않은, 보일 수밖에 없는’의 정서와 연결된다. 두꺼운 암막천은 바닥에 여러 겹으로 쌓이면서 깊은 주름을 형성한다. 천이 접히는 방향과 겹쳐지는 두께에 따라 검정의 농도가 달라지고, 빛을 받는 능선과 어둡게 가라앉은 골이 반복된다.

암막천은 빛을 차단하는 재료다. 임하나는 이러한 물성을 감추고 싶은 감정과 연결하고, 얇고 투명한 오간자(organza)를 함께 사용해 드러나는 감정의 성질을 다뤘다. 외부의 시선을 막는 두꺼운 직물과 빛을 통과시키는 얇은 직물이 서로 다른 심리적 상태를 표현한다.

검은 천의 주름은 공간 안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깊게 접힌 부분은 무겁게 가라앉고, 느슨하게 펼쳐진 부분은 바닥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감정이 쌓였다가 풀어지고 다시 축적되는 과정이 직물의 형태에 담겨 있다.

특히 바닥의 검은 천과 의자 위로 뻗는 나뭇가지는 서로 반대되는 방향성을 만든다. 천은 아래로 내려앉고, 가지는 위로 확장된다. 무겁게 가라앉은 직물 사이에 놓인 의자는 두 움직임이 만나는 중심을 이룬다.

공중에 매달린 깃털과 새장 형태의 금속 오브제는 바닥의 무거운 질감과 대비된다. 깃털은 각기 다른 높이에 흩어져 있고, 가느다란 금속선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은 수직으로 늘어진 연결부와 둥근 윤곽을 드러낸다. 가벼운 깃털과 고정된 금속 구조, 아래쪽의 두꺼운 직물이 서로 다른 무게감을 만든다.

새장 형태의 오브제는 원형 회화와도 시각적인 관계를 맺는다. 커다란 원을 이루는 회화와 작은 금속 곡선, 의자 등받이의 둥근 형태가 반복되며 공간 전체에 일정한 조형적 흐름이 형성된다. 나뭇가지의 가느다란 선과 금속 오브제의 곡선이 서로 겹치는 부분에서는 직선과 곡선의 대비도 나타난다.

그림자는 입체 작품의 구성에 깊이를 더한다. 나뭇가지의 선뿐 아니라 공중에 매달린 금속 오브제의 윤곽도 벽에 드리워진다. 실제 물체와 그림자가 서로 다른 위치에 나타나면서 공간의 빈 부분까지 조형적 구성에 참여한다. 흰 벽은 회화와 오브제를 배치하는 배경이면서 동시에 빛과 그림자가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장소가 된다.

임하나의 작업에는 회화와 설치를 악보처럼 배열하는 음악적 구성도 이어진다. 큰 주제에서 파생된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고 축적되는 방식으로, 개별 작품의 형태와 간격이 전체 공간 안에서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KLOINM의 ‘SCORE: Caprice & Sonnet’에서 다뤄온 기보의 개념은 이러한 구성과 연결된다. ‘SCORE’는 소리를 기록하는 악보의 의미를 중심에 두고, 회화와 설치를 통해 연주의 시간과 리듬을 옮기는 작업이다. 임하나가 작곡 과정에서 사용해온 독자적인 기보 방식 역시 소리의 흐름과 간격을 시각적으로 구성하는 작업과 맞닿아 있다.

‘Replenish’에서는 원형 회화의 은빛 질감과 나뭇가지의 선, 직물의 주름, 공중에 매달린 오브제의 간격이 서로 다른 리듬을 만든다. 원형 회화에서 시작된 시선은 의자와 나뭇가지, 벽에 드리운 그림자로 이동하고, 다시 검은 천의 주름을 따라 아래로 내려온다. 관람자의 위치가 바뀌면 가지와 그림자가 겹치는 정도도 달라지면서 작품의 공간적 구성에 변화가 생긴다.

회화와 입체, 직물이 맡은 역할도 서로 구별된다. 원형 회화에는 소진된 감정이 차오르는 과정이 담겨 있고, 오래된 의자와 나뭇가지는 기억과 생각의 지속성을 표현한다. 검은 천과 오간자는 감정을 감추거나 드러내는 심리적 상태를 재료의 물성으로 옮긴다. 여러 요소가 연결되면서 감정의 회복이라는 주제가 구체적인 공간 구성으로 이어진다.

임하나는 ‘신진경산수화’, ‘SCORE’ 등에서 시간과 순환, 음악적 기보를 회화의 구조와 연결해왔다. 이번 설치에서는 평면 위에 쌓인 질감이 실제 사물의 부피와 직물의 무게, 그림자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원형 회화가 벽에 놓인 상태에서 의자와 가지, 직물이 앞쪽으로 펼쳐지면서 관람자가 마주하는 공간도 넓어졌다.

은빛 마티에르는 검은 바탕 위에 쌓여 있고, 잘려 나온 가지들은 의자 위에서 뻗어나간다. 바닥에 펼쳐진 검은 천에는 깊고 얕은 주름이 남으며, 깃털과 금속 오브제는 공중에 서로 다른 간격으로 배치돼 있다.

‘Replenish’는 소모된 감정이 다시 차오르는 과정을 이러한 물질의 성질과 형태로 풀어냈다. 회화의 은빛 질감에서 시작된 회복의 움직임은 나뭇가지의 확장과 직물의 주름, 빛과 그림자의 관계로 이어진다. 기억과 감정의 변화가 실제 사물의 형태와 공간의 깊이 속에 남아 있는 설치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