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나라 요시토모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 눈 감은 소녀에 스며든 2011년의 침묵

동일본대지진 이후 완성한 대형 회화…날카로운 시선 대신 감긴 눈과 유백색 호수, 겹겹의 색채로 깊어진 내면의 표현

2026-11-07     임민정 기자

[KtN 임민정기자]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두 눈을 감고 서 있다. 둥근 이마 아래로 가느다란 속눈썹이 내려앉았고, 작은 입술은 수평에 가깝게 다물려 있다. 연녹색 옷을 입은 몸은 허리 아래부터 희미한 유백색 공간에 잠겨 있다. 고개를 조금 숙인 소녀에게서는 움직임도, 뚜렷한 표정의 변화도 느껴지지 않는다. 일본 현대미술가 나라 요시토모(Yoshitomo Nara)가 2011년 완성한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이다.

세로 259.2㎝, 가로 181.8㎝의 대형 캔버스에 한 인물만을 배치한 작품이다. 연한 크림색 바탕과 적갈색 머리카락, 옅은 녹색 옷이 그림의 색채를 이루고, 소녀의 발아래에는 물과 배경의 경계가 사라진 공간이 펼쳐진다. 단순한 구성 속에서 감긴 눈과 작은 입술, 몸을 감싸는 색채가 인물의 정서를 섬세하게 전달한다.

일본 현대미술가 나라 요시토모(Yoshitomo Nara)의 2011년작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 짙은 적갈색 벽면을 배경으로 연한 크림색과 유백색을 중심으로 한 작품의 색채가 대비를 이룬다. 아크릴 캔버스, 259.2×181.8㎝. 사진=Courtesy of the Artist and Fair Warni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나라 요시토모의 회화에서 어린 소녀는 오랫동안 반복된 인물이다. 커다란 머리와 작은 몸, 과장된 눈매는 초기 작품부터 이어져 온 특징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소녀들은 정면을 날카롭게 노려보거나 눈을 치켜뜨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때로는 칼이나 무기를 들고 등장해 어린아이의 친숙한 외형과 공격적인 태도 사이에 긴장을 만들었다.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에서는 소녀의 시선이 내부로 향한다. 정면을 응시하던 눈은 감겼고, 얼굴을 구성하는 선은 이전보다 부드러워졌다. 눈썹과 눈꺼풀의 가느다란 곡선, 작게 다문 입술, 아래로 기울어진 고개가 차분한 표정을 이룬다. 단호하게 관람자를 마주하던 인물에서 벗어나 침묵과 사색에 잠긴 소녀의 모습이 전면에 놓였다.

소녀의 커다란 이마와 둥근 볼은 밝은 살구빛과 노란빛으로 표현됐다. 얼굴 중앙에 모인 작은 코와 입은 넓은 피부 면적과 대비를 이루며, 양쪽 눈꺼풀에 이어진 짧은 속눈썹은 미세한 곡선을 남긴다. 적갈색 머리카락은 이마를 따라 둥글게 내려오다가 귀 아래에서 짧게 바깥쪽으로 뻗는다. 머리카락의 비교적 선명한 윤곽과 부드럽게 번지는 얼굴색이 만나 인물의 표정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눈꺼풀은 아래로 완만하게 굽어 있고, 입술은 짧은 붉은 선으로 처리됐다. 입꼬리가 크게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은 얼굴에는 평온함과 피로, 슬픔에 가까운 정서가 함께 머문다. 두 눈의 미세한 곡률과 입술의 길이, 턱을 향해 좁아지는 얼굴의 비례가 소녀의 감정을 구성한다. 인물의 표정은 한 가지 감정으로 고정되지 않은 채 여러 감각을 겹쳐 놓는다.

나라 요시토모의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2011). 감긴 눈과 짧게 다문 입술, 연녹색 옷을 입은 소녀의 신체가 유백색 공간 속으로 희미하게 이어진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변화한 작가의 인물 표현과 색채 구성을 담은 작품이다. 사진=Courtesy of the Artist and Fair Warni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눈을 감은 자세와 함께 살펴볼 부분은 어깨와 팔의 형태다. 소녀는 어깨를 약간 들어 올린 채 양팔을 몸 가까이에 내려놓고 있다. 목과 어깨를 잇는 선은 짧고 부드럽게 이어지며, 연녹색 옷의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도 움직임 없이 내려와 있다. 머리의 크기에 비해 작게 표현된 신체는 인물의 얼굴을 더욱 강조한다.

얼굴과 상체의 형태는 비교적 분명하지만, 몸의 아래쪽에서는 윤곽이 점차 희미해진다. 연녹색 옷의 끝부분은 밝은 바탕에 스며들고, 물속에 잠긴 신체는 유백색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소녀가 서 있는 위치를 알려주는 바닥이나 그림자도 없다. 인물을 둘러싼 공간은 위아래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물과 공기, 신체의 경계를 흐린다.

호수의 표현에는 구체적인 풍경 묘사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물결이나 수평선, 반사된 빛 대신 옅은 색채의 층이 물의 존재를 암시한다. 연한 크림색 바탕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유백색으로 바뀌고, 소녀의 옷은 점차 밝은 색과 섞인다. 수면의 위치가 뚜렷하지 않아 인물은 물에 잠긴 동시에 부드러운 색채 속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캔버스에 넓게 펼쳐진 유백색 공간은 인물의 얼굴과 신체를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얼굴 주변에는 따뜻한 노란빛과 분홍빛이 머물고, 몸 아래에는 흰색에 가까운 색이 넓게 퍼져 있다. 적갈색 머리카락에서 시작된 선명한 색채가 연녹색 옷을 지나 점차 옅어지는 구성이다. 색의 농도가 달라질수록 인물의 존재감도 변하고, 소녀가 놓인 공간에는 조용한 깊이가 생긴다.

나라 요시토모는 아크릴 물감을 얇게 여러 차례 쌓아 올리며 인물의 얼굴과 배경을 표현해 왔다. 한 가지 색으로 면을 채우기보다 비슷한 계열의 색을 반복해서 겹쳐 미세한 밝기와 농도 차이를 만든다. 피부에 스며든 분홍빛과 노란빛, 옷에 겹쳐진 녹색과 밝은 황색은 인물의 형태를 부드럽게 연결한다. 넓은 색면 속에 축적된 작은 변화가 소녀의 표정과 공간에 깊이를 더한다.

초기 작품에서 두드러졌던 선명한 윤곽과 날카로운 눈매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점차 달라졌다. 나라 요시토모는 인물의 눈과 입술을 더욱 세밀하게 다루고, 얼굴에 여러 색층을 겹쳐 감정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발전시켰다. 어린아이를 닮은 인물의 외형은 유지하면서도 색채와 붓질이 차지하는 비중은 커졌다.

2011년 완성된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에서는 변화한 회화적 표현이 한층 뚜렷해졌다. 눈을 감은 소녀의 얼굴에는 강한 명암이나 날카로운 윤곽이 사용되지 않았다. 눈꺼풀과 입술을 이루는 짧은 선, 얼굴에 겹쳐진 색채, 물속에서 희미해지는 신체가 인물의 정서를 형성한다. 표정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던 감정이 색채와 형태의 미세한 변화로 옮겨간 것이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는 나라 요시토모의 작업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아오모리현에서 성장한 작가는 고향과 가까운 지역에서 발생한 재난에 큰 충격을 받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이어지면서 기존의 창작 활동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한동안 회화 작업을 지속하지 못했다.

당시 나라 요시토모는 캔버스 대신 손으로 흙을 빚는 조각 작업에 집중했다. 물감과 붓을 사용하는 회화에서 벗어나 재료를 직접 만지며 형태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재난 이후 삶과 예술을 다시 돌아보던 시기에 완성한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은 2011년 제작된 유일한 주요 대형 회화로 기록돼 있다.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변화는 소녀의 표정과 색채에서 이어졌다. 외부 세계를 향한 반항적 시선 대신 감긴 눈과 내면에 잠긴 얼굴이 등장했고, 인물과 배경의 관계도 더욱 부드러워졌다. 몸의 윤곽을 명확하게 분리하던 표현에서 벗어나 색채가 서로 스며드는 구성이 나타났다. 재난의 충격은 직접적인 피해 현장의 묘사보다 소녀의 정적인 자세와 가라앉은 표정을 통해 회화에 남았다.

나라 요시토모는 2011년의 경험을 돌아보며 지진이나 전쟁처럼 모든 것을 파괴하는 사건이 평소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것들을 일시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재난 이후 이어진 작업에서는 이전까지 익숙하게 사용하던 표현을 다시 살피고, 인물의 내면과 주변 세계의 관계를 더욱 깊게 다루게 됐다.

물에 잠긴 인물은 나라 요시토모가 이전부터 탐구해 온 도상이기도 하다. 1995년작 'In the Deepest Puddle'에서도 인물과 물의 관계를 다뤘다. 그러나 2011년작에서는 수면의 구체적인 형태보다 물속에서 흐려지는 신체와 색채의 중첩이 강조된다. 인물의 표정 또한 외부를 응시하는 눈보다 감긴 눈꺼풀과 작은 입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에서 호수는 인물을 둘러싼 배경인 동시에 신체의 일부를 감추는 공간이다. 위쪽에서는 얼굴과 머리카락의 윤곽이 뚜렷하지만, 아래쪽에서는 옷과 팔의 형태가 흐려진다. 소녀의 존재가 가장 선명한 얼굴과 거의 사라진 신체가 하나의 캔버스 안에 놓이면서 인물과 공간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진다.

소녀의 눈은 감겨 있지만 그림의 중심은 여전히 얼굴에 있다. 커다란 이마와 둥근 볼, 가는 속눈썹과 짧은 입술은 작은 차이만으로도 표정의 변화를 만들어 낸다. 아래로 기울어진 고개와 조금 올라간 어깨에는 몸을 움츠린 듯한 자세가 남아 있다. 넓은 유백색 공간은 소녀를 둘러싸면서 얼굴에 집중된 감정을 조용히 확장한다.

2012년 제작된 'Miss Spring'과 비교하면 2011년작의 특징은 더욱 선명해진다. 'Miss Spring'의 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바라보며, 눈동자 안에는 여러 색이 겹쳐 있다.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의 소녀는 눈을 감고 아래를 향한다. 두 작품 모두 단순화된 얼굴에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지만 시선의 방향과 색채, 표정의 밀도에서는 차이가 나타난다.

2011년 이후 나라 요시토모의 작품에서 감긴 눈과 부드러운 색채는 중요한 표현 요소로 자리 잡았다. 202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 회고전과 2024년 스페인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회고전에서도 당시의 변화가 다뤄졌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은 'After the Quake' 부문에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을 포함해 재난 이후 작가의 회화가 변화한 과정을 소개했다.

작품에는 어린아이의 단순한 외형과 성숙한 감정이 함께 놓여 있다. 둥근 머리와 짧은 팔, 연녹색 옷은 어린 소녀의 모습을 이루지만 감긴 눈과 굳게 다문 입술, 고개를 숙인 자세에서는 깊은 피로와 사색이 느껴진다. 커다란 캔버스에 비해 간결하게 표현된 인물은 복잡한 표정이나 행동 없이도 오래 시선을 머물게 한다.

적갈색 머리카락의 선명함은 얼굴에서 멈추고, 연녹색 옷은 유백색 물속으로 희미해진다. 작은 입술과 가느다란 눈꺼풀이 남긴 정적인 표정은 넓은 여백과 만나 더욱 차분한 분위기를 이룬다. 2011년이라는 제작 시기와 겹쳐 볼 때, 소녀의 침묵은 재난 이후 나라 요시토모가 발전시킨 내면적 표현의 한 부분으로 읽힌다.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은 오는 11월 19일 미국 뉴욕에서 페어 워닝(Fair Warning) 경매에 출품된다. 추정가는 1000만~1500만 달러다. 2012년 일본 주요 미술관 전시를 시작으로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독일 프리더 부르다 미술관, 영국 헤이워드 갤러리의 회고전을 거친 작품은 14년 만에 공개 미술시장에 등장한다.

눈을 치켜뜨던 소녀가 두 눈을 감고, 선명했던 몸의 윤곽은 유백색 물속으로 사라진다. 표정과 색채, 인물과 공간의 관계가 달라진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에는 나라 요시토모가 2011년 이후 이어온 회화적 변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