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러기지의 이면②] 톰 브라운 여행가방, 98개 공정에 열흘…751만원의 제조 구조
글로브 트로터, 1897년 시작된 파이버보드 제조 기술과 수작업 유지…14겹 섬유판·5일 걸리는 가죽 성형, 장인 노동과 생산비의 관계
[KtN 임우경기자]영국 허트퍼드셔(Hertfordshire)의 글로브 트로터(Globe-Trotter) 공장에서 여행가방 한 개를 완성하기까지 약 열흘이 걸린다. 제작 과정은 98개 공정으로 나뉜다. 빅토리아 시대부터 사용한 기계와 숙련공의 수작업을 결합한 생산 방식이다. 미국 패션 브랜드 톰 브라운(Thom Browne)과 협업한 여행가방에도 같은 제조 방식이 적용된다.
톰 브라운과 글로브 트로터의 협업 컬렉션은 마이크로 케이스(Micro Case), 캐리온(Carry-On), 체크인(Check-In) 등 세 종류다. 국내 판매가격은 각각 574만원, 751만원, 1041만원이다. 캐리온과 체크인은 영국에서 제작한 단단한 본체에 가죽 모서리 보호대와 금속 잠금장치, 바퀴와 길이 조절식 손잡이를 결합했다.
98개 공정과 열흘의 제작 기간은 제품 생산에 필요한 작업의 범위와 시간을 설명하는 수치다. 열흘이라는 기간에는 재료를 가공하고 성형한 뒤 건조하는 시간, 부품을 조립하는 시간 등이 포함된다. 완성까지 열흘이 걸린다는 사실이 숙련공 한 사람이 10일간 가방 한 개만 제작한다는 뜻은 아니다.
제조 공정의 수가 많을수록 생산비가 높아질 가능성은 있지만, 공정의 개수와 비용이 단순히 비례하지는 않는다. 같은 한 단계라도 기계가 짧은 시간에 처리하는 작업과 가죽을 성형한 뒤 여러 날 건조해야 하는 작업은 생산 시간의 구성이 다르다. 장인의 노동이 실제로 투입되는 시간과 재료가 완성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필요한 시간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다.
글로브 트로터의 역사는 1897년 독일 작센(Saxony)에서 시작됐다. 영국인 데이비드 넬켄(David Nelken)이 설립한 회사는 가볍고 단단한 벌커나이즈드 파이버보드(vulcanised fibreboard)를 여행가방에 적용했다. 1901년에는 파이버보드 사용에 관한 특허를 취득했고, 1930년대 초 생산 기반을 런던으로 옮겼다.
120년이 넘는 제조 역사에서 파이버보드는 글로브 트로터의 여행가방을 구성하는 주요 소재로 남아 있다. 일반적인 가죽 트렁크나 금속 여행가방과 달리 종이를 원료로 만든 판재를 본체에 사용하는 방식이다.
글로브 트로터의 파이버보드는 14겹의 종이를 특수 처리한 뒤 열과 증기를 이용해 압축한 소재다. 얇은 종이를 여러 층 결합해 단단한 판재로 만들고, 여행가방에 필요한 형태로 가공한다. 종이를 원료로 사용하지만 일반적인 종이 상자와는 제조 방식과 물성이 다르다.
제작 과정에서는 가공된 판재를 케이스 크기에 맞게 재단하고 모서리 부분을 구부려야 한다. 금속판이나 플라스틱 사출물과는 다른 성형 방식이 필요하다. 가방의 크기와 모서리 곡률에 맞춰 판재의 형태를 잡아야 하며, 완성된 본체에는 가죽과 금속 부품이 결합된다.
글로브 트로터는 파이버보드의 강도와 가벼운 무게를 제품의 주요 특성으로 내세워 왔다. 그러나 파이버보드가 사용됐다는 사실만으로 특정 제품의 충격 저항성이나 내구성을 평가할 수는 없다. 소재의 두께와 결합 구조, 모서리 보호대와 금속 프레임의 설계도 실제 사용 성능에 영향을 미친다.
톰 브라운 협업 캐리온은 용량 40L에 무게 4.2kg이며, 체크인은 용량 83L에 무게 5.9kg이다. 파이버보드 본체에 가죽과 금속 부품, 이동 장치까지 결합한 완제품의 무게다. 소재 자체가 가볍더라도 케이스 전체의 무게는 각 부품의 구성에 따라 달라진다.
글로브 트로터가 유지해 온 전통 제조 방식에는 오래된 성형 도구와 수작업이 포함돼 있다. 파이버보드 판재를 재단하는 공정에는 현대적인 장비도 도입됐다. 과거 사용하던 재단기 대신 정밀한 레이저 절단 기술을 적용한 제품군도 있다.
오래된 기계를 사용한다는 사실과 모든 생산 과정이 19세기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설명은 구별된다. 여행가방의 기본적인 구조와 일부 성형 기술은 유지하면서 절단과 부품 가공에는 현대적인 설비를 사용하는 제조 체계다. 제작 기술의 연속성과 생산 설비의 변화가 함께 나타난다.
가죽 모서리 보호대는 글로브 트로터의 제조 기술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부품이다. 케이스 네 모서리에 부착하는 가죽은 평평한 조각을 단순히 붙이는 방식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둥근 모서리에 맞는 입체적인 형태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전통적인 모서리 제작 과정에서는 가죽을 물에 적신 뒤 압착하고, 건조한 다음 다시 압력을 가한다. 성형 과정에서 생긴 여분의 가죽을 다듬고 가장자리를 마감한 뒤 본체에 결합한다. 글로브 트로터가 공개해 온 기존 제조 방식에서는 모서리 가죽의 적심, 압착, 건조, 재압착에 약 닷새가 걸린다.
가죽 성형에 걸리는 닷새는 장인이 같은 부품을 계속 손으로 가공하는 시간과 다르다. 수분을 머금은 가죽이 형태를 유지하도록 건조하는 기간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케이스 전체 제작에 약 열흘이 소요되는 배경에도 개별 부품의 성형과 건조, 조립 과정이 자리한다.
톰 브라운 협업 제품에는 페블 그레인 레더(pebble grain leather)가 사용됐다. 표면에 작은 요철이 있는 가죽으로, 케이스의 모서리 보호대와 손잡이, 스트랩, 스트랩을 고정하는 부품 등에 적용됐다.
본체 전체를 가죽으로 감싼 구조는 아니다. 파이버보드가 케이스의 기본 형태를 만들고, 가죽은 모서리와 손잡이 등 별도의 부품으로 결합된다. 검은색 바탕에 나타나는 가죽의 질감과 금속 장식이 제품 외관을 구성하지만, 여행가방의 기본적인 구조는 글로브 트로터의 기존 제품과 연결된다.
가방 하단의 바퀴와 금속 부품은 전통적인 트렁크 제작 방식에 현대적인 이동 기능을 결합한 부분이다. 글로브 트로터가 1897년부터 사용한 파이버보드 케이스는 오늘날 공항과 철도역에서 이동하기 위한 장치까지 갖추고 있다.
톰 브라운 협업 캐리온과 체크인에는 바퀴 네 개와 ABS 소재의 길이 조절식 손잡이가 적용됐다. 본체 가장자리에는 강철 테두리를 사용하고, 금속 부품에는 황동이 들어간다. 잠금장치는 미국 교통안전청(TSA) 규격에 대응하며, 외부 가죽 스트랩에는 길이를 조절하는 버클이 달렸다.
서로 다른 소재를 결합하는 만큼 제조 과정도 여러 분야로 나뉜다. 파이버보드 본체의 재단과 성형, 가죽 부품 제작, 금속 장식 부착, 바퀴와 손잡이 조립에는 각각 다른 작업 방식이 필요하다.
가죽 모서리를 손으로 성형하는 숙련도와 바퀴가 원활하게 회전하도록 조립하는 기술은 동일하지 않다. 제조 공정 전체를 장인 한 사람의 기술로 설명하기보다 여러 작업이 결합된 생산 체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금속 리벳과 모서리 보호대는 케이스의 형태를 구성하는 부품이다. 전통적인 트렁크 디자인에서는 외부에 노출된 금속 장식과 가죽 보호대가 중요한 시각적 요소로 사용된다. 실제 여행에서는 외부 접촉이 빈번한 부분이어서 소재의 내마모성과 부품의 결합 상태가 사용 기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죽과 파이버보드, 금속을 결합하는 제작 방식은 수선 구조와도 관계가 있다. 글로브 트로터는 제품의 손상 부위를 수선하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가죽과 잠금장치 등 여러 부품을 교체하거나 보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영국의 수선 접수 절차에서는 제품 상태에 따라 작업 내용과 비용을 정하고, 일반적인 수선 기간을 약 3~4주로 안내한다. 해외에서 제품을 보내는 경우에는 운송비가 별도로 발생할 수 있다. 고가 여행가방을 오랫동안 사용하려면 최초 구매가격과 함께 수선에 필요한 비용과 기간도 고려해야 한다.
수작업 생산의 경제적 가치는 제조 이후의 관리와도 연결된다. 금속 잠금장치나 가죽 부품에 손상이 생겼을 때 해당 부분을 수리할 수 있다면 제품 전체를 교체하는 것과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 다만 제품별 수선 가능 범위와 비용은 실제 손상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글로브 트로터는 캐리온과 체크인에 개별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제작 장인과 연결하도록 하고 있다. 같은 모델이라도 제품별 제작 이력을 구분할 수 있는 방식이다. 공장에서 여러 공정과 작업자를 거쳐 완성되는 제품에 개별적인 식별 체계를 적용한 것이다.
글로브 트로터는 1997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센테너리(Centenary) 컬렉션을 출시했다. 기존 오리지널 제품의 기본 구조에 가죽 모서리 보호대와 외부 스트랩을 적용한 제품군이다. 톰 브라운 협업 여행가방에도 가죽 스트랩과 모서리 보호대가 사용됐다.
센테너리 컬렉션이 출시된 시점은 글로브 트로터 설립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였다. 오래된 제조 기술을 유지하는 브랜드도 시대에 따라 소재와 부품을 바꾸고, 여행가방의 외관과 기능을 조정해 왔다. 전통적인 제조 방식이 제품 디자인의 변화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2027년 소비 흐름을 다룬 '트렌드 코리아 2027'에는 인간 고유의 역량을 뜻하는 '휴먼엣지(Human Edge)'가 주요 키워드로 등장한다. 자동화와 기계화가 확대되는 제조 환경에서 사람의 숙련 기술이 갖는 가치를 살펴볼 수 있는 개념이다. 글로브 트로터의 생산 방식에서는 가죽 성형과 마감처럼 숙련공의 작업이 필요한 공정과 현대적인 기계 가공이 함께 유지된다.
그렇다고 수작업 비중이 높다는 사실만으로 제품의 품질이나 가격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재료의 성능과 부품 조립의 정확도, 완성된 제품의 품질관리, 사용 이후의 수선 체계 등이 함께 작용한다. 오래된 방식으로 제작했다는 이력과 실제 사용에 필요한 성능을 구분하는 소비자의 판단도 중요하다.
톰 브라운 협업 컬렉션의 국내 가격은 캐리온 751만원, 체크인 1041만원이다. 두 제품 모두 파이버보드 본체와 가죽 모서리 보호대, 금속 부품, 네 개의 바퀴를 사용하지만 크기와 용량이 다르다. 캐리온은 40L, 체크인은 83L로 용량 차이가 두 배를 넘는다. 가격 차이는 290만원이다.
동일한 제작 계열에 속하더라도 제품 크기에 따라 필요한 소재의 양과 부품 규격, 조립 조건이 달라질 수 있다. 제조원가에는 재료비와 노동비, 기계 설비의 운영비, 품질관리 비용 등이 포함된다. 98개 공정과 열흘의 제작 기간은 생산 방식을 설명하지만, 실제 비용을 계산하려면 각 공정에 투입되는 노동시간과 부품 단가 등이 필요하다.
톰 브라운의 가죽 마감과 삼색 스트라이프가 더해진 협업 제품에는 제조비용뿐 아니라 브랜드 디자인과 상품 기획, 유통에 따른 비용도 반영된다. 같은 가방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물리적인 노동과 판매가격 사이에는 여러 단계의 비용 구조가 존재한다.
글로브 트로터의 파이버보드 제조 기술은 1897년부터 이어졌고, 가죽 모서리 성형과 금속 부품 조립은 현재의 생산 체계에도 남아 있다. 제작에 걸리는 열흘은 재료가 성형되고 여러 부품이 결합해 완제품이 되는 기간이다.
751만원짜리 캐리온에 적용된 98개 공정은 제조 과정의 복잡성을 설명하는 숫자다. 가죽을 적시고 성형하는 기술부터 금속 잠금장치와 바퀴를 결합하는 작업까지, 서로 다른 공정이 하나의 제품 안에 모여 있다. 전통적인 제작 기술을 유지하는 생산 방식과 고가의 판매가격 사이에는 숙련 노동뿐 아니라 소재, 설비, 디자인, 유통에 이르는 제조업의 비용 구조가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