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방혜자의 빛, K-아트가 세계에 건넨 오래된 지혜
프랑스가 읽은 ‘물질에서 태어나는 빛’…한지와 흙에서 샤르트르의 유리까지 원과 입자, 하늘과 땅, 마음과 우주를 잇는 60년…오늘 다시 읽는 한국의 빛
[KtN 박준식기자]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 생피아 예배당의 유리창으로 햇빛이 들어오면 방혜자 작가의 푸른 원과 주황빛이 건축 안으로 번진다. 종이와 천연안료, 흙과 부직포에 스미던 빛이 말년에는 태양광을 직접 받아들이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됐다. 한지의 섬유 안에서 조용히 올라오던 밝음은 유리를 지나 벽과 바닥, 그곳에 선 사람에게까지 닿는다. 방혜자 작가가 60년 넘게 좇았던 빛의 긴 여정이 샤르트르에서 실제 자연광과 만난 셈이다.
프랑스는 일찍부터 방혜자 작가의 빛을 재료의 문제와 함께 읽었다. 파리 세르누치박물관이 2019년 회고전에 붙인 ‘Et la matière devint lumière’라는 제목은 우리말로 옮기면 ‘그리고 물질은 빛이 되었다’에 가깝다. 한지와 천연안료를 한국적 재료로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종이와 안료, 흙의 입자가 어떻게 밝음으로 바뀌는지를 방혜자 회화의 중심에 놓았다. 샤르트르에서는 오랫동안 이어온 원형을 우주와 연결해 읽었고, 빛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사랑으로, 다시 기쁨과 평화로 이어지는 작가의 세계를 받아들였다.
K-아트를 생각할 때 방혜자 작가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을 상징하는 소재를 많이 사용해서가 아니다. 한국에서 익힌 재료와 사유를 자기 언어로 만들고, 그 언어가 국경을 넘어 다른 문화권에서도 읽힐 수 있는 깊이에 도달했다. 1961년 파리로 떠난 뒤 서구 미술을 접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닥지를 새롭게 만났으며, 다시 프랑스로 건너간 뒤에도 한지를 놓지 않았다. 프랑스 남부 루시용의 붉은 흙은 한국의 종이를 만나 작품 안으로 들어왔다. 자연의 음양과 계절, 오행에 대한 생각은 천체와 성운, 새벽의 빛으로 넓어졌다. 한국과 프랑스 가운데 한쪽을 선택하기보다 두 지역에서 얻은 재료와 경험을 오랜 시간 한 회화 안에 쌓았다.
1961년 ‘지심’의 빛은 짙고 거친 유화 물감 사이에서 어렵게 모습을 드러낸다. 1993년 ‘정관묘오’에서는 적갈색 원과 서체가 시선을 안쪽으로 모은다. 2000년 ‘비상’에서는 천연안료가 부직포의 섬유를 따라 번지며 상승과 확산의 리듬을 만들고, 2007년 ‘물성과 빛’에서는 닥지와 천연안료, 루시용의 황토가 만나 색층 안에서 밝음을 길어 올린다. 종이와 흙이라는 가장 구체적인 물질을 깊게 파고들수록 작품은 오히려 빛과 우주, 생명의 문제로 넓어졌다.
2011년 ‘하늘의 땅’에서는 원이 작품 안의 한 형상을 넘어 작품 자체의 몸이 된다. 지름 179㎝의 원 한가운데 밝은 중심이 놓이고 주황과 적색, 청록의 색띠와 가는 선이 사방으로 퍼진다. 2014년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거대한 원의 에너지가 수많은 작은 색의 입자로 나뉘어 짙은 푸른색 안을 흐른다. 2020년 ‘빛의 기쁨 I’에서는 주황빛의 작은 핵을 남색과 청록의 원이 여러 겹 감싸며 다시 중심으로 모인다. 거대한 원과 작은 입자, 중심과 확산은 서로 다른 형식처럼 보이지만 방혜자 작가의 회화에서는 같은 세계의 크기만 달라진다.
우주의 빛에서 미세한 빛의 입자까지 오간 방혜자 작가의 작업을 바라보면 원자와 입자, 별과 우주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이를 물리학의 공식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하나의 질서 안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작품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작은 색의 흔적 수백 개가 모여 우주의 깊이를 만들고, 거대한 원 역시 수많은 선과 색의 미세한 떨림으로 이루어진다. 극미의 세계와 극대의 세계가 서로 닮은 구조로 겹친다.
한국의 오래된 사유에서도 낯설지 않은 감각이다. 하나 안에 모두가 있고, 모두 안에 다시 하나가 있다는 화엄의 세계는 개별 존재를 지우는 생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끝없이 관계를 맺고 있다는 지혜에 가깝다. 방혜자 작가의 회화를 특정 종교철학으로 한정할 수는 없지만 작품에서 반복되는 하늘과 땅, 마음과 우주, 빛과 생명의 관계에는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세계보다 이어져 있는 세계에 대한 생각이 깊게 흐른다.
‘별들의 노래’, ‘하늘과 땅과 손을 잡고’, ‘물성과 빛’, ‘빛에서 빛으로’, ‘빛의 기쁨’이라는 작품명을 오래 이어놓아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다. 서로 다른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지만 별과 땅, 물질과 마음, 생명과 빛은 계속 서로의 자리로 들어간다. 방혜자 작가가 남긴 시와 작품 역시 하나의 긴 서사처럼 읽힌다. 하나의 빛이 생명으로 이어지고, 생명은 사랑과 기쁨, 평화로 넓어진다. 각각의 단어는 독립돼 있으면서도 더 큰 하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된다.
한국 문화에서 빛은 오래전부터 혼자 밝아지는 존재보다 관계를 만드는 매개에 가까웠다. 한지는 강한 햇빛을 그대로 들이기보다 섬유 사이로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연등은 작은 불 하나에서 시작하지만 가족과 이웃, 공동체의 안녕을 비는 빛으로 이어졌다. 하나의 등이 수천 개의 등과 만나면 거리 전체의 빛이 된다. 작은 불 하나가 주변의 어둠을 밀어내는 것보다 수많은 작은 밝음이 함께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다.
한국 현대사의 광장에도 촛불이 있었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진 대규모 촛불집회, 이른바 ‘촛불혁명’에서 시민들은 저마다 작은 불빛을 손에 들었다. 촛불 하나는 바람 한 번에도 흔들리는 작은 빛이지만 수많은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들었을 때 개인의 뜻은 공동의 의사로 커졌다. 방혜자 작가의 작품과 당시의 정치적 사건을 직접 연결할 이유는 없다. 다만 작은 빛 하나와 수많은 빛의 관계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정서와 기억을 갖는지는 함께 생각해볼 수 있다. 한 사람의 빛이 다른 사람의 빛과 만나 더 큰 공간을 밝히는 감각이다.
방혜자 작가의 회화에서 원과 입자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모습도 이런 생각을 불러온다. ‘빛에서 빛으로’의 작은 붉은 흔적은 하나하나 떨어져 있지만 함께 놓이면 긴 밝음의 흐름을 만든다. ‘하늘의 땅’에서는 수많은 가는 선이 한 중심에서 출발해 거대한 원 전체로 번진다. ‘빛의 기쁨 I’에서는 둘레로 퍼진 선이 다시 중심의 밝음을 향해 시선을 돌려놓는다. 하나가 모두를 향하고, 모두가 다시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
방혜자 작가의 작품을 오래 따라가며 읽게 되는 ‘하나’는 획일적인 하나가 아니다. 흙과 종이, 사람과 자연, 한국과 프랑스, 작은 입자와 거대한 우주가 저마다의 성질을 지닌 채 하나의 관계망 안에서 이어져 있다는 뜻에 가깝다. 하나는 모두를 삼키는 중심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를 연결하는 원리다. 방혜자 작가의 원은 그 관계를 가장 단순하면서도 깊은 형태로 남긴다.
우리 시대의 빛을 생각하면 이 지점은 더 선명해진다. 지금의 도시는 밤에도 밝다. 스마트폰과 디스플레이, 인공지능과 네트워크는 하루 종일 수많은 빛과 정보를 쏟아낸다. 인류가 만들어낸 인공광은 어느 때보다 강해졌고 연결의 속도도 빨라졌다. 방혜자 작가의 작품 앞에서는 다른 밝음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을 더 빨리 움직이게 하는 빛보다 자신의 마음과 다른 존재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빛이다.
방혜자 작가의 빛에는 기다림의 시간이 있다. 한지를 구기고 다시 펴고, 안료를 스며들게 하고, 종이가 색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지켜본다. 루시용의 흙은 종이의 섬유 안에 머물며 색의 깊이를 바꾼다. 부직포에서는 안료가 앞뒤를 통과하면서 밝음을 만든다. 빠른 효과보다 재료가 스스로 가진 성질을 받아들이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를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빛은 순간적인 효과보다 오랜 시간 물질과 마음이 함께 다듬어낸 결과에 가까워졌다.
‘물성과 빛’이라는 작품명은 방혜자 예술 전체를 압축해 읽게 한다. 정신적인 세계를 향할수록 물질을 더욱 세밀하게 다뤘고, 우주를 생각할수록 발밑의 흙과 손끝의 종이를 가까이 두었다. 가장 먼 별과 가장 작은 흙의 입자가 같은 작품 안에서 만난다. 마음의 빛도 현실의 물질을 통과한 뒤에야 모습을 얻는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이 긴 작업의 끝에 놓인다. 한지와 천연안료 안에서 빛을 만들어왔던 방혜자 작가는 마지막 시기에 실제 햇빛을 작품으로 받아들였다. 태양빛은 청색과 주황의 유리를 지나 건축 안으로 들어오고, 벽과 바닥을 거쳐 사람의 몸 가까이 이동한다. 작품 안에 머물던 빛이 현실의 공간으로 나와 관객과 직접 관계를 맺는다.
프랑스에서 방혜자 작가의 작업이 오래 읽히는 이유도 한국적 재료의 낯섦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흙과 종이에서 출발해 빛과 생명, 우주와 인간의 문제로 나아가는 사유가 보편적인 언어를 얻었기 때문이다. 세르누치박물관이 ‘물질에서 빛으로’를 읽었고, 샤르트르가 원형에서 우주의 의미를 받아들인 것도 방혜자 작가의 작업이 오랜 시간 같은 물음 안에서 재료와 형식을 바꾸며 깊어졌기 때문이다.
K-아트가 세계와 만나는 방식도 여기에 하나의 답을 얻는다. 한국적 이미지를 앞세우는 것보다 한국의 재료와 문화, 사유 속에서 자란 감각을 자기 언어로 밀어붙여 세계의 관객이 자신의 삶과 연결해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방혜자 작가의 한지는 한국의 종이이면서 동시에 빛을 품는 물질이 됐고, 원은 동양의 상징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과 우주, 극미와 극대를 이어주는 구조로 넓어졌다.
방혜자 작가가 평생 작품에 남긴 빛의 비밀을 하나의 말로 압축한다면 ‘연결’에 가까울 것이다. 인간과 자연, 땅과 하늘, 물질과 마음, 작은 입자와 거대한 우주가 따로 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한다는 지혜다. 하나의 빛은 다른 빛을 만나고, 작은 생명은 더 큰 생명의 질서 안에 놓이며, 한 사람의 마음도 다른 사람과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하나의 빛은 작다. 수많은 빛이 모이면 별자리가 되고, 작은 입자가 모이면 물질이 되며, 사람 한 명의 마음이 다른 마음과 만나면 공동체가 된다. 방혜자 작가가 원과 빛의 입자를 오가며 남긴 회화에서는 작은 것과 큰 것이 서로의 안으로 들어간다. 하나가 모두를 말하고, 모두가 다시 하나의 관계로 돌아온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빛도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더 강한 밝기보다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빛, 더 빠른 연결보다 관계의 깊이를 만들어주는 빛, 혼자 빛나는 존재보다 함께 살아갈 공간을 밝히는 빛이다. 방혜자 작가가 한지와 흙, 천연안료와 유리 속에 남긴 빛은 화려한 효과보다 사람과 자연, 마음과 우주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오래된 지혜를 향한다.
프랑스는 방혜자 작가의 회화에서 물질이 빛으로 바뀌는 시간을 읽었다. 한국에서 그 빛을 다시 바라보면 한지의 섬유와 흙의 입자, 연등의 작은 불과 광장을 채웠던 촛불, 하늘과 땅을 하나의 원으로 품어온 사유까지 함께 겹친다. 샤르트르의 유리를 통과한 햇빛은 다시 세계의 관객에게 닿는다.
방혜자 작가가 남긴 빛은 한 화가의 조형언어를 넘어선다. 가장 작은 입자에서 우주를 바라보고, 한 사람의 마음에서 생명과 사랑, 기쁨과 평화를 이어간 60년의 작업은 지금도 하나의 오래된 지혜를 되돌려준다. 모든 존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하나의 빛은 모두에게 닿고, 모두의 빛은 다시 하나의 세계를 밝힌다. 방혜자 작가의 K-아트가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빛도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