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트렌드②] 문훈 ‘구운몽’, 광산도시 영월 상동에 그린 아홉 가지 미래
굴뚝과 컨베이어, 지하 갱도가 남긴 어린 시절의 기억…야구장·우주온천·시간여행터미널로 다시 상상한 고향
[KtN 박준식기자]강원도 영월군 상동읍의 광산에는 거대한 기계설비와 컨베이어가 있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솟았고 공장에서는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경사지에 매달린 듯한 건물들과 높이 솟은 구조물은 어린 문훈(Moon Hoon)에게 살아 움직이는 건축처럼 다가왔다. 광산마을의 일상적인 풍경은 훗날 건축가가 된 문훈의 작업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문훈은 11월 6일 개막한 ‘탈주와 침묵(ESCAPE & SILENCE)’ 전시에서 고향 영월 상동을 배경으로 아홉 가지 미래 건축을 구상한 ‘구운몽(Goo Woon Mong / BaKeD DrEaM)’을 선보였다. 서울 구띠갤러리에서 15일까지 열리는 전시에는 호텔과 야구장을 합친 건축물부터 텅스텐 크리스털 온천, 시간여행터미널, 우주호텔까지 현실과 상상이 뒤섞인 건축 드로잉이 등장한다.
문훈은 어린 시절 상동의 광산시설을 떠올리며 “모든 게 살아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공장에서 나는 소리와 움직이는 기계, 경사지에 자리한 건물들이 단순한 산업시설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어린 시절에는 주변의 구조물들이 저마다 움직이고 살아 있는 존재처럼 다가왔다. 당시의 경험은 이후 기계적인 형태와 역동적인 건축을 상상하는 바탕이 됐다.
1968년 태어난 문훈은 어린 시절을 영월 상동에서 보냈고 청소년기에는 호주 태즈메이니아에서 생활했다. 이후 한국과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2001년부터 문훈발전소(MOONBALSSO)를 운영해 왔다. 여러 지역을 거쳐 생활했지만 상동은 문훈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었다.
상동은 텅스텐 광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문훈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상동에는 광산시설과 공장, 기계설비가 생활공간 가까이에 있었다. 문훈은 당시의 산업시설을 아름답지 않은 대상으로 보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자신에게는 대단히 아름다운 장소였다고 회상했다. 건축물을 바라보는 개인적인 경험이 외부의 평가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도 고향에 대한 기억에서 드러난다.
고향에 대한 관심은 김만중의 고전소설 '구운몽'과 만나 새로운 작업으로 발전했다. 문훈은 어린 시절 접했던 고전소설을 다시 살펴보면서 이야기의 전개와 구조에 흥미를 느꼈다. 상동의 미래를 구상하던 중 소설의 제목을 건축 작업에 활용하기로 했다.
문훈은 '구운몽'의 발음을 바탕으로 아홉 가지 꿈을 설정하고 영어 제목에는 ‘BaKeD DrEaM’을 사용했다. 꿈을 굽는다는 표현에는 상상 속 건축을 현실의 가능성으로 발전시키려는 생각이 담겼다. 처음부터 아홉 개의 프로젝트를 정해 놓고 시작한 작업은 아니었다. 상동의 미래에 관한 여러 구상을 고전소설의 제목과 연결하면서 아홉 가지 꿈으로 정리했다.
숫자 9에도 문훈의 개인적인 해석이 반영됐다. 문훈은 아홉을 가득 차 있으면서도 완전히 넘치지 않은 숫자로 받아들였다. 아홉 가지 이야기는 각각 독립된 건축 구상이면서 상동이라는 하나의 지역을 배경으로 연결된다.
문훈은 길게 이어진 상동의 지형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 강렬한 기억이 남아 있거나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 아홉 곳을 골랐다고 설명했다. 각 장소에 새로운 기능과 이야기를 부여해 미래의 모습을 그려 본 것이다. 건물을 먼저 구상한 뒤 부지를 선택하는 일반적인 설계 과정과 달리 개인의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에서 건축적 상상을 시작했다.
‘구운몽’의 ‘지하세계’에는 호텔과 야구스타디움을 결합한 ‘호디움(Hodium)’이 등장한다. 호텔과 스타디움을 하나로 묶은 건축으로, 숙박과 스포츠 관람이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구상이다. 야구를 주제로 한 카페도 별도의 프로젝트로 제시했다.
야구는 문훈이 어린 시절부터 상동에서 보았던 산업시설과는 다른 지역의 변화에서 출발했다. 문훈은 고향으로 돌아온 초등학교 동창들이 지역 학교의 폐교를 막기 위해 야구부를 제안했던 일을 소개했다. 지역의 인구 감소와 학교의 존립을 걱정하던 주민들이 야구를 새로운 활동으로 선택했고, 문훈은 당시의 움직임에서 미래 건축의 소재를 발견했다.
문훈은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야구시설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고 밝혔다. 야구부 활동을 계기로 선수들이 훈련하고 방문객들이 머무는 시설을 구상할 수 있다는 생각이 호디움으로 발전했다. 야구 카페 역시 스포츠 활동과 지역의 일상생활을 연결하려는 제안이다. 지역 주민들이 시작한 활동에 건축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셈이다.
텅스텐을 소재로 한 작업에는 광산도시 상동의 오랜 산업적 기억이 반영됐다. ‘우주온천’은 텅스텐 크리스털 온천 숙박시설을 구상한 프로젝트다. 광물의 특성을 온천과 결합하고 우주적인 이미지를 더했다. ‘텅스텐 월드’는 광물의 이름 자체를 건축의 형태로 발전시킨 작업이다.
문훈은 아홉 가지 꿈 가운데 ‘텅스텐 월드’를 여러 구상이 집약된 프로젝트로 꼽았다. ‘텅스텐’이라는 한글 글씨를 회전시켜 입체적인 형태를 만들었다. 평면에 적힌 문자가 회전하면서 서로 얽히고, 글자의 형태가 건축적 공간으로 변하는 구조다.
문훈은 이전부터 한글의 기하학적 형태를 입체 건축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에 관심을 가져왔다. ‘텅스텐 월드’에서도 글자를 읽는 기능과 공간을 형성하는 기능을 결합했다. 문자가 회전하면서 본래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워지는 대신, 입체적인 구조가 새로운 조형성을 갖게 된다.
상동의 지하 갱도 역시 텅스텐 월드의 구상에 영향을 주었다. 지질학자였던 아버지에게 상동 지하에 수많은 갱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문훈은 갱도가 복잡하게 이어진 지하 공간을 상상했다고 밝혔다. 광산이 남긴 지하 구조를 지상으로 끌어올려 미술관과 같은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구상도 여기에서 출발했다.
광물의 이름을 입체화한 형태와 땅속에 축적된 산업시설의 기억이 하나의 건축 프로젝트에서 만난다. 텅스텐을 단순히 건축 재료로 사용하는 대신 문자와 지하 공간, 지역의 역사를 연결한 점이 특징이다. 상동의 산업적 특성을 새로운 건축 형태로 바꾸려는 문훈의 작업 방식이 잘 드러난다.
‘시간여행터미널’은 버스터미널에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부여한 작업이다. 이동을 위한 시설에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상상적 기능을 더했다. ‘우주호텔’에는 우주를 주제로 한 숙박시설을, ‘비전문화센터’에는 박물관과 영화관이 결합된 복합문화시설을 구상했다.
‘신무당집’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존재하는 주택이다. ‘캐터필러 스테이’에는 움직이는 공간이라는 개념이 적용됐다. 아홉 가지 꿈에는 이동과 숙박, 문화와 여가, 주거와 종교적 상상까지 서로 다른 기능이 포함돼 있다. 문훈은 일상적인 건축시설에 시간여행이나 우주, 움직임과 같은 요소를 더해 기존 건축의 용도를 새롭게 구성했다.
상동의 자연환경도 미래 건축을 구상하는 소재가 됐다. 문훈은 밤하늘의 별이 잘 보이는 지역적 특성을 언급하며 일반적인 펜션과 다른 숙박시설을 상상했다고 설명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온천을 즐기는 방식처럼 자연환경과 체류 경험을 함께 고려한 구상이다. 광산시설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 작업이 야구와 관광, 숙박시설로 넓어졌다.
‘구운몽’과 함께 영월을 대상으로 한 다른 프로젝트들도 전시에 포함됐다. ‘영월 플레이마트(2020)’, ‘거울동굴 체험공원(2021)’, ‘영월보행교(2022)’, ‘영월 상동 지도(2025)’ 등이다. 상동을 배경으로 한 아홉 가지 미래 건축과 실제 지역을 대상으로 구상한 프로젝트들이 함께 소개된다.
문훈이 건축 드로잉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구운몽’의 제작 방식과 연결된다. 실제 건물을 설계하려면 의뢰인의 요구와 예산, 행정 절차, 시공 조건 등을 고려해야 한다. 건축가가 처음 구상한 형태와 기능이 여러 조건을 거치면서 달라지기도 한다.
문훈은 드로잉을 통해 건축가가 자신의 상상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실적인 제약에 앞서 건축가가 떠올린 미래의 모습을 구체적인 형태로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건물을 실제로 짓는 과정에서도 여러 관계자의 요구를 조율하면서 새로운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점을 함께 강조했다.
‘구운몽’은 완공된 건축물을 소개하는 작업과 구별된다. 실제 장소를 바탕으로 하지만 드로잉에 등장하는 건축물은 아직 상상 속에 존재한다. 문훈은 익숙한 건축의 형태와 기능을 벗어나는 태도를 ‘탈주’라는 개념과 연결했다. 사회의 규칙과 관습을 넘어 더 자유롭게 생각하려는 욕망이 자신의 창작 활동에 영향을 미쳐 왔다고 설명했다.
문훈이 기억하는 상동에는 광산의 기계설비와 공장, 굴뚝이 있었다. 현재의 상동을 대상으로 한 구상에는 야구장과 카페, 온천, 문화시설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경험한 산업도시의 구조물들은 상상 속에서 새로운 형태와 기능을 갖춘 건축물로 바뀌었다.
고향에 대한 애착은 개인적인 기억을 보존하는 일과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훈은 어린 시절 앉아서 놀던 커다란 돌을 예로 들었다. 당시에는 무척 크게 느껴졌던 돌이 어른이 되어 다시 찾아갔을 때는 작아 보였다고 했다. 같은 장소와 사물도 시간이 흐르면서 다르게 인식된다는 설명이다.
문훈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 돌을 바탕으로 명상 공간을 구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과거의 기억을 단순히 회상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건축을 만드는 출발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구운몽’의 아홉 가지 꿈도 고향의 장소와 기억에서 시작해 미래의 건축으로 발전한 작업이다.
상동에 구상한 야구장과 카페, 숙박시설에 대해서도 문훈은 실제 건축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 주민들과 야구시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고, 지역의 특성을 살린 카페와 펜션도 구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홉 가지 꿈을 모두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생각하면서도 서두르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문훈은 자신의 건축 드로잉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 그린 건축물이 당장 세워지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작업을 보고 또 다른 건축을 구상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영월 상동의 광산시설에서 출발한 기억은 아홉 가지 미래 건축으로 이어졌다. 호텔과 야구장을 결합한 호디움, 텅스텐의 글씨를 입체화한 건축, 우주온천과 시간여행터미널은 지역의 산업과 생활문화에 문훈의 상상력이 더해진 결과다. 문훈은 아홉 가지 꿈의 실현을 서두르기보다 앞으로 누군가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씨앗으로 남겨 두겠다는 생각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