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트렌드④] 문훈 ‘텅스텐 월드’, 한글을 회전시켜 만든 건축의 또 다른 형태

문자와 드로잉에서 출발한 입체 건축…광산의 기억을 조형으로 옮기고 현실의 제약을 넘어 상상력 확장

2026-11-08     박준식 기자
[전시 트렌드④] 문훈 ‘텅스텐 월드’, 한글을 회전시켜 만든 건축의 또 다른 형태.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텅스텐’이라는 한글 세 글자가 회전하면서 서로 뒤엉킨다. 평면에 적힌 글자는 본래의 형태를 잃어가고, 겹쳐진 선과 획은 새로운 입체 구조를 만든다. 글씨를 읽는 행위에서 출발한 작업이 건축적 공간을 상상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건축가 문훈(Moon Hoon)의 ‘텅스텐 월드(Tungsten World)’는 문자를 건축의 형태로 발전시킨 작업이다.

서울 구띠갤러리에서 11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리는 ‘탈주와 침묵(ESCAPE & SILENCE)’에는 문훈이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을 배경으로 구상한 아홉 가지 미래 건축이 소개된다. 김만중의 고전소설 '구운몽'에서 제목을 가져온 ‘구운몽(Goo Woon Mong / BaKeD DrEaM)’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지역의 산업적 특성을 바탕으로 한 건축 프로젝트다. 아홉 번째 꿈인 ‘텅스텐 월드’에는 문훈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한글의 조형성과 건축 드로잉의 가능성이 함께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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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훈은 아홉 가지 꿈 가운데 자신의 건축적 관심이 집약된 작업으로 ‘텅스텐 월드’를 꼽았다. 한글의 형태를 이용해 건축을 구상해 온 실험이 영월 상동의 산업적 기억과 만났기 때문이다. 문훈은 이전부터 한글을 기하학적인 조형 요소로 활용하고, 글씨를 회전시켜 입체적인 건축을 만드는 작업에 관심을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글자를 이루며, 글자마다 일정한 공간 안에서 획과 선이 배열된다. 문훈은 글자의 의미뿐 아니라 형태에도 주목했다. 평면의 글씨를 입체로 바꾸는 과정에서 획은 서로 겹치고, 글자의 구조는 새로운 공간적 관계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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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훈은 “텍스트를 뭉개면서 텍스트를 없애면서 동시에 텍스트가 가질 수 있는 힘을 표현하는 거죠”라고 말했다. 문자를 변형하면서 글씨의 원래 모습을 지우지만, 입체화된 구조에서는 다른 성격의 조형적 에너지가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텅스텐’이라는 글씨를 그대로 적으면 읽는 사람은 광물의 이름을 인식한다. 글자를 회전시키고 형태를 겹치면 문자로서의 가독성은 약해진다. 대신 글씨를 구성하던 선과 획이 공간을 만드는 요소로 바뀐다. 문훈은 문자로부터 출발한 작업이 입체가 되면서 새로운 전달력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문훈의 작업에서 글자는 설계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표기 수단에 머무르지 않는다. 글씨 자체가 건축의 형태를 구성하는 출발점이 된다. 평면의 문자를 입체적인 공간으로 바꾸면서 글자의 의미와 형태를 함께 다루는 방식이다.

‘텅스텐 월드’에 사용된 단어는 문훈의 고향인 영월 상동과 직접 연결된다. 상동은 텅스텐 광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으로, 광산의 시설과 기계설비는 문훈의 어린 시절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문훈에게 텅스텐은 광물의 이름이면서 고향의 산업적 역사와 연결되는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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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훈은 어린 시절 상동에서 굴뚝과 컨베이어, 거대한 기계설비를 보며 자랐다. 공장에서는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경사지에는 여러 산업시설이 자리했다. 문훈은 당시의 건물과 기계들이 가만히 있는 구조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존재처럼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광산시설에 대한 기억은 건축의 형태와 움직임을 생각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문훈이 관심을 가져온 기계적 구조와 역동적인 형태에는 어린 시절 경험한 산업시설의 모습이 남아 있다. ‘텅스텐 월드’에서 한글의 획이 회전하며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방식도 문훈이 지속해 온 조형 실험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문훈은 지질학자였던 아버지에게 상동의 지하에 수많은 갱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갱도들이 복잡하게 이어진 지하 공간을 떠올리면서 땅속에 남아 있는 구조를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건축을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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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갱도를 지상에 드러내고 미술관과 같은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상상도 여기에서 나왔다. 과거 광물을 채굴하던 공간을 새로운 건축으로 옮기고, 산업시설에 남은 기억을 문화적 경험으로 연결하려는 구상이다.

‘텅스텐 월드’에서는 문자와 지하 공간이라는 서로 다른 요소가 만난다. 텅스텐이라는 단어는 지역의 산업적 기억을 가리키고, 회전하는 글자의 형태는 새로운 건축을 만드는 조형적 수단이 된다. 광산의 갱도는 복잡한 공간 구조를 상상하는 또 다른 출발점이다.

문훈이 한글의 형태에 주목한 작업은 문자와 조형물의 경계를 함께 다룬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상태에서는 언어가 먼저 전달된다. 글자가 회전하면서 서로 얽히면 문자로서의 기능보다 입체적인 형태가 두드러진다. 하나의 글씨가 변형되는 과정에서 언어와 건축의 관계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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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훈은 인터뷰에서 부적을 예로 들며 문자가 가진 시각적 힘을 설명했다. 부적은 글자나 상징을 통해 특정한 뜻을 전달하는 형태를 갖는다. 문훈이 관심을 두는 부분은 종교적인 기능보다 문자 하나에 응축된 생각이나 비전을 입체적인 조형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평면에 쓰인 글자를 회전시키면서 원래의 뜻을 곧바로 읽기 어렵게 만들고, 변형된 구조에 새로운 공간적 성격을 부여한다. 문훈은 이를 통해 이차원적인 문자에 머무르지 않고 삼차원으로 발전한 비전을 표현하고 싶다고 밝혔다.

건축 드로잉은 이러한 작업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문훈은 실제 건축물을 설계할 때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때 건축가가 고려해야 하는 조건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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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을 실제로 지으려면 의뢰인이 있어야 하고, 건축가는 의뢰인의 요구와 예산을 고려해야 한다. 설계가 진행되면 행정 절차와 시공 조건, 주변 주민과의 관계도 영향을 미친다. 처음 구상한 형태를 그대로 완공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는 이유다.

문훈은 의뢰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건축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실현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건축물은 여러 사람의 의견과 현실적인 조건을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드로잉에서는 건축가가 자신의 상상을 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 의뢰인의 요구와 공사비, 시공 과정에 앞서 새로운 건축의 형태와 기능을 구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훈은 드로잉을 건축가가 타협하지 않은 미래의 비전을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텅스텐 월드’에서 글자를 회전시켜 건축적 공간을 만드는 실험도 드로잉의 자유로운 성격과 연결된다. 실제 건축물의 구조와 시공 방식을 먼저 결정하기보다 문자에서 출발해 새로운 입체 형태를 탐색한다. 평면의 글자가 건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한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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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드로잉과 실제 건축은 문훈에게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드로잉은 자유로운 상상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실제 건축은 여러 조건을 조율하면서 구상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문훈은 현실적인 조정을 거쳐 완공된 건축물에도 드로잉과 다른 고유한 에너지가 있다고 말했다.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는 건축가의 생각뿐 아니라 시공자와 행정기관, 주변 환경 등 여러 조건이 작용한다. 문훈은 어려운 조율을 거치더라도 처음 품었던 건축적 구상이 실제 공간으로 완성되는 일에서 건축의 힘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문훈의 건축 드로잉은 설계 이전의 구상에 머무르지 않고 독립적인 예술 작업으로도 발전해 왔다. 문훈은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초대 작가로 참여했고, 2015년 시카고 비엔날레와 2017년 브뤼셀 한국문화원 초대전에도 참가했다. 건축 드로잉은 독일 베를린의 쵸반재단 건축드로잉박물관과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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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설계와 드로잉, 영상 작업을 함께 이어온 활동은 문훈이 자신의 작업을 특정 분야에 한정하지 않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건축을 중심에 두면서 미술과 영상, 문자와 조형 등 여러 표현 방식을 활용해 왔다.

‘탈주와 침묵’에서 문훈이 맡은 ‘탈주’도 정해진 형식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반영한다. 문훈은 사회의 규칙과 관습이 때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느끼며, 익숙한 질서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욕망이 창의적인 작업의 바탕에 있다고 설명했다.

문훈에게 탈주는 건축물의 형태를 특이하게 만드는 일에 한정되지 않는다. 건축가라는 직업의 경계나 이미 정해진 예술적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건축과 미술을 구분하는 관습, 문자와 조형물을 나누는 기준도 문훈의 작업에서는 고정된 조건으로 남지 않는다.

문훈은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면서 건축가의 탈을 쓴 예술가인지, 예술가의 탈을 쓴 건축가인지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하나의 분야에 자신을 가두지 않으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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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제목인 ‘탈주’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보였다. 문훈은 특정한 제목이나 개념이 작품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작가의 활동 전체를 규정하는 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시 자체도 작품을 일정한 형식 안에서 보여주는 방식이라는 생각이다.

문자로 출발한 ‘텅스텐 월드’는 문훈이 말하는 탈주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글씨는 회전하면서 본래의 형태에서 벗어나고, 광물의 이름은 새로운 건축을 상상하는 출발점이 된다. 평면과 입체, 언어와 조형, 드로잉과 건축의 구분을 넘나드는 작업이다.

영월 상동의 산업적 기억도 문자와 드로잉을 거치며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광산을 직접 재현하는 대신 텅스텐이라는 글씨를 변형하고, 지하 갱도를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공간을 상상한다. 과거의 산업시설이 새로운 건축 구상을 만드는 재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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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훈은 ‘텅스텐 월드’를 비롯한 아홉 가지 미래 건축을 모두 실제 공간으로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현을 서두르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건축 드로잉을 접한 누군가가 새로운 구상을 발전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텅스텐 월드’는 2024년 구상한 ‘구운몽’의 아홉 번째 꿈으로, 이번 구띠갤러리 전시에 포함됐다. 광물의 이름에서 출발한 한글의 조형 실험과 상동의 지하 갱도에 대한 기억이 하나의 건축 구상으로 이어졌다. 문훈은 글씨를 회전시켜 문자의 원래 형태를 지우는 동시에 입체적인 구조를 만들었고, 건축 드로잉을 통해 아직 지어지지 않은 공간을 구체적인 형태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