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트렌드⑤] 문훈·심근영 ‘탈주와 침묵’, 흙과 햇빛에서 만난 두 건축 세계

전시장 중앙의 자연과 장소애착 ‘토포필리아’…김종진 교수와 두 건축가가 풀어낸 기억·대지·빛의 관계

2026-11-08     박준식 기자
[전시 트렌드⑤] 문훈·심근영 ‘탈주와 침묵’, 흙과 햇빛에서 만난 두 건축 세계.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서울 구띠갤러리 전시장 중앙에는 실제 흙과 식물이 놓여 있다. 천창에서 내려오는 햇빛은 시간에 따라 흙과 식물의 밝기를 바꾸고, 주변에는 서로 다른 건축 세계가 펼쳐진다. 건축가 문훈(Moon Hoon)은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의 기억을 바탕으로 미래 건축을 상상하고, 심근영(Shim Keunyoung)은 빛과 자연, 사람이 머무는 공간을 탐구한다. 두 건축가의 공동 전시 ‘탈주와 침묵(ESCAPE & SILENCE)’에서 서로 다른 작품을 연결하는 요소는 건축의 가장 오래된 바탕인 땅과 자연이다.

11월 6일 개막한 ‘탈주와 침묵’은 문훈의 ‘구운몽(Goo Woon Mong / BaKeD DrEaM)’과 심근영의 ‘이방인의 외출: 빛을 향하여’를 함께 소개한다. 문훈이 건축의 기존 형태와 기능에서 벗어난 상상에 집중했다면, 심근영은 주택과 체류시설에서 사람이 느끼는 빛과 침묵, 자연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건축적 표현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어린 시절의 경험과 장소에 대한 기억을 중요하게 다룬다.

건국대학교 건축도시전문대학원 김종진 교수는 두 건축가의 작품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전시장 중앙의 흙과 식물을 꼽았다. 실제 자연을 전시장에 옮겨 놓은 이유도 두 건축가의 공통된 관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김 교수는 탈주와 침묵이 서로 상반된 개념이지만 시간과 공간, 존재라는 출발점에서 공통된 뿌리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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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중앙 영역에는 ‘그레이존(Gray Zon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레이존에서 다루는 개념은 ‘토포필리아(Topophilia)’다. 사람이 특정한 장소에 느끼는 애착과 정서적 유대를 뜻한다. 장소는 지리적인 위치나 건물이 세워지는 부지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의 경험과 기억이 쌓이는 대상이 된다.

문훈에게 장소애착은 어린 시절을 보낸 영월 상동에서 시작된다. 상동은 텅스텐 광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공장의 굴뚝과 컨베이어, 거대한 기계설비와 경사지에 자리한 건물들은 문훈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산업시설이 밀집한 광산마을이었지만 어린 문훈에게는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공간이었다.

문훈은 고향에서 보았던 공장과 기계설비를 떠올리며 당시의 경험이 건축적 상상력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 높이 솟은 구조물들은 어린 시절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광산시설을 단순한 생산설비가 아니라 움직임과 생명력을 가진 존재처럼 받아들였던 기억은 건축가가 된 이후에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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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기억은 ‘구운몽’에서 미래의 건축으로 발전했다. 문훈은 상동에서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강렬한 기억이 남아 있는 아홉 장소를 골라 각각의 미래를 상상했다. 호텔과 야구장을 결합한 ‘호디움’, 텅스텐 크리스털 온천, 시간여행터미널, 우주호텔 등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과거의 광산시설을 그대로 복원하기보다 기존 장소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했다. 텅스텐은 온천과 움직이는 공간의 소재가 됐고, 야구는 숙박시설과 카페를 구상하는 출발점이 됐다. 문훈이 기억하는 상동의 과거와 앞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건축이 한 지역 안에서 겹쳐진다.

장소에 대한 기억이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경험도 문훈의 건축적 사고와 연결된다. 문훈은 어린 시절 앉아서 놀던 돌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무척 크게 느껴졌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찾아갔을 때는 작아 보였다고 했다. 돌의 크기가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장소를 경험하는 사람의 신체와 기억이 달라지면서 같은 사물에 대한 인식도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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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훈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 돌을 바탕으로 명상 공간을 구상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개인의 기억 속에 존재하던 장소가 새로운 건축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장소애착은 과거를 회상하는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공간을 다시 바라보고 미래의 건축을 상상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심근영 역시 어린 시절 자연과 가까이 생활했던 경험을 건축과 연결했다. 자연 속에서 경험한 감각과 기억이 시간이 흐른 뒤에도 건축가의 생각과 작업에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이다. 심근영은 문훈의 작업을 살펴보면서 과거의 기억과 자연에 대한 애착이 서로 다른 형태의 건축으로 나타나는 점에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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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근영은 특정한 장소가 가진 고유한 성격을 설계의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한다. 땅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역사와 기억이 있으며, 건축물은 그곳에서 생활할 사람의 요구와 주변 자연을 함께 고려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지의 형태와 주변 환경, 거주자의 생활 방식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건축의 구성이 달라진다.

주택과 체류시설을 설계해 온 심근영에게 자연은 건축물의 외부에 존재하는 풍경만을 뜻하지 않는다. 실내로 들어오는 빛과 그림자,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 공간에 머무는 동안 느끼는 감정도 자연과 연결된다. 사람이 특정한 장소를 편안하고 친밀하게 느끼는 경험에는 눈에 보이는 재료뿐 아니라 시간과 기억도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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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근영은 빛과 그림자를 하나의 언어로 설명했다. 빛이 있어야 어둠을 인식할 수 있고, 어둠이 있어야 빛의 존재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빛을 환대에 연결하고 어둠을 침묵에 비유한 작업도 서로 다른 두 요소가 하나의 공간 안에서 공존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영성의 빛’, ‘빛의 조각’, ‘풍경이 흐르는 집’, ‘경주의 시간’ 등 심근영의 주요 프로젝트에는 주거와 체류라는 생활 조건이 담겨 있다. 심근영은 주택을 설계할 때 건축가의 의도뿐 아니라 실제 거주자의 생활 방식과 요구를 함께 살펴야 한다고 설명했다. 건축물은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지만 내부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경험은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달라진다.

문훈과 심근영은 고향과 자연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면서도 건축으로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문훈은 기억 속 장소를 바탕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설을 상상하고, 심근영은 사람이 실제로 생활하는 공간에서 자연의 변화를 경험하도록 설계한다. 한쪽에서는 장소의 과거가 미래 건축의 형태로 발전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지와 자연이 생활공간의 구성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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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훈은 심근영의 건축을 처음 살펴봤을 때 자신의 작업보다 조용하고 정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내부에 다양한 움직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문훈의 건축에서 형태와 기능의 변화가 적극적으로 드러난다면 심근영의 건축에서는 빛과 자연, 공간의 관계를 통해 절제된 움직임이 나타난다는 해석이다.

두 건축가의 차이는 작업의 외형뿐 아니라 건축을 구상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문훈은 사회의 규칙과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자신의 창작 활동과 연결했다. 정해진 형태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태도다. 심근영은 시각적 이미지에 치우친 건축에서 벗어나 사람이 공간에서 느끼는 본질적인 경험을 찾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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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훈은 건축가와 예술가라는 구분에도 자신을 가두지 않으려 한다. 건축 설계와 드로잉, 영상, 문자 조형을 넘나드는 작업을 통해 기존 분야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간다. 심근영 역시 건축을 외형적인 조형물로만 이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빛과 그림자, 사람의 기억과 자연의 관계를 함께 다룬다.

문훈은 심근영과 자신의 작업이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 대한 관심을 공유한다고 설명했다. 심근영의 건축에는 절제된 형태 안에 움직임이 존재하고, 자신의 건축에는 형태를 적극적으로 변형하면서 다른 차원의 공간을 상상하려는 태도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조형적 표현 속에서 공통된 관심을 발견한 셈이다.

심근영도 두 건축가의 작품이 비슷한 출발점을 갖고 있으면서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난다는 점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자연에 대한 애착이 작업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설계와 조형을 통해 표현되는 결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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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교수는 이러한 차이를 전시장 구성에 반영했다. 입구의 스크린을 지나면 2025년 베니스 유럽문화센터(ECC)의 국제 건축 전시 ‘Time Space Existence’와 연결된 흰색 공간이 나오고, 주 전시실에는 붉은색과 흰색으로 구분된 영역이 마련돼 있다. 2026년의 새로운 전시 주제인 ‘탈주와 침묵’을 두 건축가의 작품과 함께 공간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주 전시실 중앙에 놓인 흙과 식물은 서로 다른 영역을 연결한다. 문훈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고향의 기억과 심근영이 강조하는 대지의 고유성이 실제 자연물을 통해 만난다. 김 교수는 중앙의 자연을 두 건축가와 전시 전체를 연결하는 대자연의 모습으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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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흙이 전시장에 놓였다는 점은 건축 전시의 일반적인 표현 방식과도 구별된다. 건축 전시에서는 도면과 드로잉, 모형, 사진 등을 통해 건물의 형태와 설계 내용을 소개한다. 구띠갤러리에는 건축이 세워지는 땅의 일부를 직접 옮겨 놓았다. 자연은 작품을 둘러싼 배경이 아니라 관람객이 전시장 안에서 마주하는 요소가 됐다.

천창에서 내려오는 자연광도 전시 공간의 일부로 작용한다. 햇빛은 시간에 따라 방향과 밝기가 변하고 흙과 식물에 드리우는 그림자도 달라진다. 일정한 밝기를 유지하는 인공조명과 달리 자연광은 하루 동안 같은 모습을 유지하지 않는다. 심근영이 건축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빛과 그림자의 변화가 전시장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정오부터 오후 1시 사이를 중앙의 자연 공간을 경험하기 좋은 시간대로 꼽았다. 천창에서 내려오는 햇빛이 아래에 놓인 흙과 식물을 비추는 시간이다. 실제 자연과 빛의 관계를 경험하면서 두 건축가가 공유하는 장소에 대한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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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을 전시장에 옮길 때는 실제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험을 그대로 재현하기 어렵다. 주택에서 보내는 오랜 시간이나 자연광이 달라지는 계절의 변화는 도면과 모형만으로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 구띠갤러리는 흙과 식물, 천창의 자연광을 활용해 관람객이 전시장 안에서도 시간과 자연의 변화를 경험하도록 구성했다.

문훈의 상상 속 건축과 심근영의 주택 프로젝트는 건축을 만들어가는 서로 다른 방법을 담고 있다. 문훈은 고향의 기억을 출발점으로 건물의 형태와 용도를 자유롭게 바꾸고, 심근영은 실제 생활공간에서 대지와 자연의 특성을 세밀하게 다룬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장소애착은 특정한 건축 양식이나 형태보다 건축가가 자신의 경험을 설계에 반영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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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중앙의 흙과 식물은 문훈의 과거와 심근영의 현재를 단순히 연결하는 상징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두 건축가가 다루는 땅과 자연을 관람객 앞에 직접 놓고,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는 햇빛을 받아들이는 공간이다. 건축물의 형태를 바라보는 경험과 실제 공간에 머무는 경험이 한 전시 안에서 함께 이루어진다.

11월 15일까지 열리는 ‘탈주와 침묵’에는 문훈의 아홉 가지 미래 건축과 심근영의 주거·체류시설 프로젝트가 소개돼 있다. 전시장 중앙에는 실제 흙과 식물이 놓여 있으며, 정오 무렵에는 천창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문훈이 고향의 기억을 미래 건축으로 옮기고 심근영이 대지와 자연의 경험을 주거공간에 담아온 작업은 ‘토포필리아’라는 공통된 주제 아래 한자리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