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EV4 GT 클레이 콘셉트, 나달의 63승을 빚다…달리지 않는 자동차에 담긴 기억
테니스 코트의 흙과 자동차 디자인용 점토 결합…붉은 차체에 새긴 클레이코트의 기록 주행 기능 없는 실물 크기 조형물, 스포츠 후원에서 산업디자인으로 확장된 자동차의 의미
[KtN 김상기기자]스페인 마요르카의 붉은 테니스 코트에 자동차 한 대가 놓였다. 보닛과 지붕, 유리창까지 코트와 같은 붉은빛으로 덮였고, 차체의 모서리를 따라 흰 선이 이어졌다. 검은색 바퀴와 날렵한 외형을 갖췄지만 도로를 달릴 수는 없다. 기아가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Rafael Nadal)의 선수 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실물 크기 조형물 'EV4 GT 클레이 콘셉트'다.
기아는 지난 2일 마요르카 마나코르에 있는 라파 나달 아카데미에서 조형물을 공개했다. 자동차 디자인에 사용하는 모델링 점토에 나달이 63차례 단식 우승을 거둔 클레이코트의 흙을 결합했다. 자동차와 테니스라는 서로 다른 분야의 재료를 사용해 한 선수의 기록을 자동차의 형태로 남긴 작업이다.
EV4 GT 클레이 콘셉트는 전기차의 새로운 성능을 제시하기 위해 제작한 시제차가 아니다. 자동차의 외형을 갖췄지만 실제 주행을 목적으로 하는 차량은 아니며, 양산형 EV4 GT와도 구분된다. 차체에 적용한 흰 선과 나달의 기록은 기념 조형물을 위해 별도로 제작됐다. 자동차의 기계적 기능을 제외하고 형태와 재료, 한 인물의 경력에 집중한 결과물이다.
테니스 선수 나달에게 흙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클레이코트 단식 우승 63회, 프랑스오픈 남자 단식 우승 14회, 클레이코트 50세트 연속 승리. 느린 공의 움직임과 긴 랠리, 미끄러지는 발놀림이 요구되는 붉은 코트에서 나달은 테니스 역사에 남을 기록을 쌓았다. 통산 다섯 차례 연말 세계랭킹 1위에 오른 경력도 자동차의 표면에 새겨졌다.
기념 조형물의 제작에는 자동차 산업에서 익숙한 재료가 사용됐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실제 차량을 개발하기 전 점토로 차체를 만들고 형태를 수정한다. 디지털 설계로 구현한 곡면과 비례를 실제 크기로 옮겨 차체의 부피와 선의 흐름을 검토하는 과정이다. 손으로 깎고 덧붙이면서 미세한 곡률과 표면의 변화를 조정한다.
자동차 디자인용 점토는 제품의 형태를 완성하기 위한 작업 재료다. 반면 테니스 코트의 흙은 선수의 발과 공이 직접 닿는 경기 환경의 일부다. 코트의 표면은 경기 중 선수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고, 자동차의 점토는 디자이너가 의도한 형태에 따라 변화한다. 물성을 다루는 방식은 다르지만 사람의 움직임과 작업의 흔적이 남는 재료라는 공통점이 있다.
클레이 모델링은 자동차 디자인에서 형태를 검토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다. 완성된 디자인이 실제 차량으로 발전하면 점토 모형은 역할을 마친다. 나달을 위해 제작한 EV4 GT는 제작 과정에서 사용하던 재료를 최종 결과물로 남겼다는 점에서 다르다. 자동차의 형태를 검토하는 수단이었던 점토가 한 사람의 경력을 기념하는 조형물의 재료가 됐다.
붉은 점토가 덮인 차체에는 일반적인 자동차 도장에서 볼 수 있는 반짝이는 광택이 거의 없다. 빛이 표면에서 부드럽게 퍼지면서 보닛과 측면의 굴곡이 드러난다. 자동차의 색을 바꾼 데 그치지 않고 표면의 질감 자체를 새롭게 구성했다.
차체의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지는 흰색 선은 자동차 모델링 과정에서 사용하는 디자인 테이프로 구현했다. 테니스 코트의 흰 경계선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차체의 각도와 굴곡을 강조한다. 흙빛 차체와 흰 선을 결합한 구성은 실제 경기장과 자동차의 조형적 특징을 한꺼번에 담고 있다.
EV4 GT의 전면부는 낮게 내려간 보닛과 각진 형태가 두드러진다. 전조등 주변에는 날카롭게 방향을 바꾸는 흰 선이 배치됐고, 차체 하단에는 수직적인 구조를 강조했다. 기존 EV4 GT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색과 표면 처리만으로 자동차가 지닌 인상을 바꾼 것이다.
자동차를 디자인할 때 차체의 선은 단순한 장식에 머물지 않는다. 선이 이어지는 방향과 곡면이 만나는 각도에 따라 자동차의 높이와 길이, 부피감이 달라진다. 실제 차량에서는 공기저항과 실내 공간, 충돌 안전성 같은 공학적 조건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자동차 디자인이 조각과 닮았으면서도 산업디자인의 영역에 속하는 이유다.
EV4 GT 클레이 콘셉트에는 실제 주행을 위한 공학적 조건보다 외형의 조형성이 강조됐다. 자동차의 기능을 구현할 필요가 없는 만큼 차체의 표면과 선이 전체 인상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가 됐다. 디자이너가 자동차의 형태를 검토하기 위해 사용하던 작업 방식이 관람자를 위한 표현 방식으로 바뀌었다.
후면부에는 나달의 서명과 경력을 기념하는 세부 요소가 더해졌다. 넓은 테일게이트를 따라 흰 선이 이어지고, 붉은 표면 위에 흰 글씨로 기록을 남겼다. 차체 하단에는 각진 구조가 배치돼 EV4 GT의 형태적인 특징을 유지한다.
선수의 기록을 자동차에 새기는 방식은 일반적인 스포츠 기념품과 차이가 있다. 우승컵이나 기념패가 경기의 성과를 직접 나타낸다면 EV4 GT는 한 선수의 경력을 자동차의 외형과 재료에 담았다. 테니스 코트의 흙을 차체에 사용했다는 사실이 별도의 장식보다 중요한 표현 요소로 작용한다.
기아와 나달의 관계는 2004년 시작됐다. 기아 스페인이 당시 신예 선수였던 나달을 후원했고, 2005년 프랑스오픈 첫 우승 이후 2006년부터 글로벌 브랜드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자동차회사의 장기 후원이 선수 생활의 주요 시기와 이어진 것이다.
2004년은 나달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기 전이었다. 이후 나달은 프랑스오픈 14회 우승을 포함해 그랜드슬램 단식에서 통산 22차례 우승했다. 클레이코트에서 특히 뛰어난 성적을 거두면서 '클레이의 황제'라는 별칭도 얻었다.
기아는 20년 넘게 이어진 후원 관계를 기념하기 위해 자동차 디자인과 테니스 코트의 재료를 결합했다. 선수의 이름이나 이미지를 차체에 부착하는 일반적인 기념 방식에서 벗어나 선수 생활의 물리적인 환경을 자동차 제작에 활용한 것이다.
나달이 테니스 코트에서 남긴 성과는 기업의 후원과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 클레이코트 63회 우승과 프랑스오픈 14회 우승은 선수의 기량과 훈련, 경기 경험이 쌓인 결과다. 기아와의 협력은 그러한 경력을 기념하는 배경이 됐으며, 이번 조형물은 오랜 후원 관계를 디자인 작업으로 확장한 결과물이다.
테니스와 자동차의 결합은 색과 재료에만 머물지 않는다. 경기장은 정해진 규격의 선으로 구획되고, 자동차는 여러 곡면과 직선을 조합해 형태를 완성한다. 평면적인 경기장의 구조와 입체적인 자동차의 구조가 하나의 공간에 놓이면서 서로 다른 디자인의 성격이 드러난다.
위에서 내려다본 EV4 GT는 붉은 코트와 색이 거의 일치한다. 차체는 경기장 안에 놓인 하나의 입체적인 물체가 되고, 코트의 흰색 경계선과 자동차의 흰색 디자인 테이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직사각형 경기장과 자동차의 유선형 차체가 대비되는 구도다.
차체의 매끄러운 지붕선과 뒤쪽으로 이어지는 형태는 자동차의 길이를 강조한다. 그러나 평면적인 테니스 코트에서는 실제 도로에서 볼 때와 다른 인상이 형성된다. 전면과 측면에서 강조됐던 차체의 부피감보다 전체적인 윤곽과 경기장 안에서 차지하는 비례가 두드러진다.
자동차는 본래 사람과 물건을 이동시키기 위한 산업제품이다. 주행 성능과 안전성, 내구성, 유지관리 비용은 실제 자동차의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제조사는 이동에 필요한 기술적 조건을 충족하면서 소비자가 원하는 디자인과 편의성을 구현해야 한다.
자동차의 외형에는 산업의 기술과 시대의 취향도 담긴다. 차체의 크기와 비례는 생산기술과 사용 환경에 영향을 받고, 색과 형태는 소비자가 자동차를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같은 이동수단이라도 설계 방식과 디자인에 따라 서로 다른 인상을 갖는 이유다.
나달을 위한 EV4 GT에서는 이동수단의 기능을 제외하면서 자동차의 또 다른 성격이 드러났다. 실제 주행에 필요한 유리창과 실내 공간은 사용하지 않고, 차체 전체를 하나의 조형물로 만들었다. 자동차의 외형을 유지했지만 운전자가 탑승해 이동할 수 있는 기계는 아니다.
기능을 제외하고 남은 형태는 자동차를 문화적 대상으로 바라볼 여지를 넓힌다. 자동차는 도로를 달리는 제품인 동시에 영화와 사진, 음악, 미술에서 반복해서 사용돼 온 소재다. 특정 시대의 자동차가 오랫동안 기억되는 데에는 기계적인 성능뿐 아니라 디자인과 당시의 생활문화가 영향을 미친다.
영화에 등장한 자동차가 작품과 함께 기억되거나 오래된 차량이 박물관에서 전시되는 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동차가 실제로 이동에 사용되는 시기를 지난 뒤에도 형태와 제작 방식, 사용된 시대에 관한 기록은 남는다. 산업제품이 역사와 디자인의 자료로 다뤄지는 과정이다.
EV4 GT 클레이 콘셉트는 실제 사용된 자동차가 아니라 처음부터 기념을 위해 제작한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운행의 흔적이나 소유자의 생활이 쌓인 물체가 아니라 다른 분야의 기억을 자동차의 형태로 옮긴 작업이다. 나달이 경기했던 코트의 흙을 사용하고 선수의 기록을 차체에 남김으로써 스포츠와 자동차의 관계를 물리적인 재료로 연결했다.
자동차 디자인에서 재료의 역할도 다시 살펴볼 만하다. 일반적인 양산차는 금속과 유리, 플라스틱 등 여러 소재를 사용해 구조와 기능을 완성한다. 재료의 선택은 무게와 강도, 생산비용, 안전성에 영향을 미친다. 표면의 색과 질감은 차량의 인상을 결정하지만 실제 사용 과정에서는 내구성과 관리도 고려해야 한다.
클레이 콘셉트에는 양산차에 요구되는 조건이 적용되지 않는다. 점토는 디자이너가 형태를 만들고 수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재료이며, 이번 조형물에서도 점토의 질감과 색을 그대로 활용했다. 흙이라는 재료의 특성이 자동차의 기능을 대신해 표현의 중심에 놓였다.
자동차를 문화적 대상으로 다루는 작업이 늘어난다고 해서 본래의 산업적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실제 차량에서는 안전성과 환경성, 에너지 효율, 수리와 유지관리 비용이 여전히 중요하다. 전기차 시장에서도 배터리와 충전 기반시설, 장기간의 사용 편의성이 소비자의 구매와 이용에 영향을 미친다.
EV4 GT 클레이 콘셉트의 조형적 특징을 실제 전기차의 기술 경쟁력과 동일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점토로 제작한 기념물은 주행 성능이나 안전성, 내구성을 입증하는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형태를 활용한 문화적 작업과 도로에서 사용하는 제품의 품질은 각각 다른 기준으로 평가돼야 한다.
기아는 조형물의 제작과 전달 과정을 영상으로도 공개했다. 자동차의 외형을 만드는 작업과 테니스 선수의 경력을 기념하는 과정을 하나의 콘텐츠로 구성했다. 스포츠 후원이 경기장 광고와 선수의 이미지 사용을 넘어 디자인과 영상 제작, 전시로 확장되는 방식이다.
기업이 오랜 후원 관계를 문화 콘텐츠로 제작하면 기존 광고와 다른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접근할 수 있다. 한 선수의 성과를 기념하는 작업은 팬들에게 친숙한 소재를 제공하고, 자동차 디자인을 새로운 맥락에서 소개할 수 있다. 동시에 기업이 기념 작업을 통해 얻으려는 홍보 효과와 조형물 자체의 디자인 가치는 구분해 살펴야 한다.
클레이 콘셉트는 한 점만 제작됐다. 일반 소비자를 위한 판매 모델이나 EV4 GT의 새로운 양산 사양은 아니다. 특별히 제작된 차체의 색과 흰색 선, 나달의 기록은 실제 판매 차량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완성된 자동차의 형태를 빌렸지만 제작 목적은 제품 개발이나 판매보다 스포츠 선수의 경력을 기념하는 데 있었다.
자동차 디자인의 디지털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실물 점토 모형을 활용한 작업이라는 점도 남는다. 컴퓨터와 AI를 이용해 복잡한 형태를 빠르게 구현할 수 있게 됐지만 실제 크기의 물체를 만들고 재료의 질감을 확인하는 과정에는 여전히 다른 경험이 있다. 손으로 형태를 다듬고 표면의 굴곡을 검토하는 작업은 자동차 디자인에서 물리적인 재료가 수행하는 역할을 드러낸다.
자동차가 개인의 기억과 연결되는 방식은 다양하다. 오랜 기간 사용한 차량에는 여행과 가족, 생활의 변화가 남을 수 있다. 특정 시대의 디자인을 갖춘 자동차는 산업과 문화의 기록으로 보존되기도 한다. 실제 도로를 달리지 않는 자동차의 형태도 사람의 경험과 시간을 담는 대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나달의 EV4 GT에는 자동차가 이동한 거리 대신 테니스 선수가 코트에서 남긴 기록이 담겼다. 흙과 점토, 차체의 선과 비례를 통해 자동차 디자인의 제작 방식이 다른 분야의 역사와 연결됐다. 기술을 통해 이동을 실현하는 산업제품의 외형이 기억을 기록하는 조형물로 사용된 것이다.
기아가 마요르카에서 공개한 것은 실제 주행하는 차량이 아니라 자동차 디자인용 점토와 테니스 코트의 흙으로 제작한 실물 크기 조형물이다. 클레이코트 63회 우승과 50세트 연속 승리, 다섯 차례 연말 세계랭킹 1위라는 나달의 기록이 차체에 남았다. 2004년 시작된 후원 관계를 기념하는 작업에 자동차 디자인의 제작 기술이 활용됐으며, 완성된 조형물과 제작·전달 과정은 영상으로도 공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