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브랜드인가, 전략 부재의 사례인가
[KtN 임우경기자]2024년,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발렌티노(Valentino)는 매출 13억 1천만 유로, 순이익 2억 4,600만 유로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매출은 3% 감소했고, 이익은 22% 급감했다. 럭셔리 산업 전반이 성장 둔화 국면에 진입한 가운데, 발렌티노의 하락 폭은 유독 가파르다.
실적의 문제는 단기 소비 둔화 때문이 아니다. 기업의 구조적 대응력, 포지셔닝 전략, 크리에이티브 정체성의 불일치가 만들어낸 결과다.
디지털 전환의 양면성
▶성장 동력이 아닌 구조 불균형의 신호
2024년, 발렌티노의 전체 매출 중 70%는 온라인 판매에서 발생했다. 디지털 판매는 전년 대비 5% 증가했고, 이는 명목상 긍정적인 수치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온라인 채널 비중의 과도한 상승은, 도매 유통 축소 및 오프라인 수요 위축의 결과이자, 브랜드 통제력 약화의 징후로 해석된다.
발렌티노는 2025년부터 도매 유통 채널을 축소하고, 통합 파트너십 기반의 집중형 유통 전략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미 전체 매출의 70%가 디지털 채널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유통 개편은 성장을 위한 전략이라기보다 위기 대응 차원의 수습 조치에 가깝다. 디지털 중심 구조는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브랜드 고유의 가격 통제·경험 설계가 어렵고, 마진 구조 또한 취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크리에이티브 전환기의 리스크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합류, 실적 회복의 열쇠인가 변수인가
2023년 3월, 구찌의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발렌티노에 합류했다. 25년간 브랜드의 미학을 이끌어온 피에르파올로 피촐리의 퇴장과 함께 이뤄진 리더십 전환은, 단순한 인사 교체가 아니라 브랜드 정체성의 재구성이었다.
미켈레의 첫 번째 컬렉션은 비평가와 시장 모두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디자인적 완성도와 매출 간의 괴리는 여전히 크다. 발렌티노가 그간 쌓아온 로맨틱하고 절제된 조형성은, 미켈레 특유의 감각적 과잉과 상충되는 지점이 있다. 브랜드의 시그니처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기존 고객층의 충성도는 흔들릴 수 있고, 신규 고객 확보 또한 단기간에 전환되기 어렵다.
현재 발렌티노는 정체성의 전환기와 크리에이티브의 실험기가 중첩돼 있으며, 이 구조는 당분간 매출 회복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불완전한 지배 구조
▶케어링과 마이훌라, 전략 주도권은 어디에 있는가
2023년, 구찌 모기업 케어링(Kering)은 발렌티노 지분 30%를 인수하며 이사회에 입성했다. 옵션 조항에 따라 2028년까지 100% 인수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현재 대주주는 여전히 카타르 국부펀드 마이훌라(Mayhoola)다.
이중 지배구조는 브랜드의 전략 일관성을 훼손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케어링은 포트폴리오 내 브랜드 간 시너지를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중장기 전략보다는 단기 실적 개선에 초점을 맞춰 왔다. 구찌 리포지셔닝 실패, 보테가 베네타 리브랜딩의 반복성 등에서 나타난 전략적 한계는 발렌티노에도 동일하게 작용할 수 있다.
마이훌라는 자본적 안정성을 제공하지만, 브랜드의 전략적 리스크를 감내하고 추진할 실행 조직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발렌티노는 자본과 전략이 엇갈리는 이중 구조 속에서 방향성을 잃고 있다.
글로벌 시장 흐름과의 비동조화
▶시장의 진화 속도에 대응하지 못한 브랜드 전략
2024년 글로벌 럭셔리 시장은 팬데믹 회복기 이후 ‘속도의 감속기’에 접어들었다. 특히 아시아 시장의 소비 둔화, 미국의 인플레이션 지속, 중국의 부동산 위기와 부채 압박은 고가 소비 심리를 전방위로 약화시켰다. 여기에 더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재도입 가능성까지 겹치며 시장의 전반적 기대치는 하향 조정되고 있다.
발렌티노는 이 흐름에 동조하지 못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고도화되지 않은 디지털 전략, 브랜드 정체성에 기반한 프리미엄 포지셔닝의 모호함, 그리고 시장 타이밍에 맞지 않는 리더십 전환은 구조적 리스크를 심화시켰다.
KtN 리포트
▶발렌티노는 지금, 브랜드 철학이 아니라 경영 전략을 점검해야 한다
2024년 실적 하락은 단순한 외생 변수의 결과가 아니다. 창의성에 기댄 브랜드 운영, 전략적 일관성 부재, 이중 지배 구조에 따른 결정 지연, 시장 흐름과의 분리—all 구조적 문제다. 미켈레의 합류는 브랜드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성은 구조적 해법이 아니다.
발렌티노가 다시 성장을 꾀하기 위해서는, 브랜드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경영 전략의 재정의’가 우선돼야 한다. 유통 구조의 정비, 조직 운영의 명료화, 크리에이티브와 시장 전략 간의 정렬이 이뤄지지 않는 한, 브랜드의 과거는 자산이 아닌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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