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0만 명 피해자, 그러나 목소리는 흩어진다

최태원 SK 회장. 사진=2025 04.30  국회 영상 갈무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최태원 SK 회장. 사진=2025 04.30  국회 영상 갈무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내 정보가 어디까지 흘러나갔을까.” 이번 SK텔레콤 유심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불안에 휩싸인 피해자는 2,324만 명에 달한다. 국민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다. 하지만 피해자 수가 아무리 커도 현실에서 보상받기는 쉽지 않다. 개인이 소송을 제기하려면 시간과 비용, 전문적 법 지식이 필요하다. 결국 대부분은 체념하고, 일부 적극적인 피해자만 개별 소송에 나선다. 집단적 피해는 개인의 부담으로 흩어지고, 기업은 거대 자본력으로 법적 책임을 축소시킨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 사회의 제도적 공백, ‘집단소송제 부재’가 드러난다.

 반복되는 ‘이중 태도’의 기업들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터질 때마다 기업들은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깊이 사과드린다, 재발을 막겠다.” 그러나 그 뒤에는 전혀 다른 태도가 기다린다. 과징금 부과 처분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하고, 피해자들과의 분쟁조정 결정에 불응한다. 결국 법정에서는 한 푼이라도 줄이려는 ‘소송전’이 벌어진다.

이번 SK텔레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과징금, 방통위 통신분쟁조정위원회의 직권조정결정을 끝까지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만약 불복 소송으로 이어진다면 피해자 구제는 또다시 지연되고, 소비자는 소송 비용과 시간 앞에서 손을 놓게 될 것이다.

집단소송제 없는 한국, 기업은 웃는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에는 실질적 집단소송제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일부 분야(증권·환경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집단소송이 가능하고, 개인정보 유출 같은 대규모 피해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반면 해외는 다르다. 미국에서는 페이스북, 구글 등 거대 플랫폼이 개인정보 문제로 수십억 달러 규모의 집단소송에 휘말렸다. 유럽에서도 GDPR을 근거로 수천만 유로에 달하는 피해 배상 합의가 이어졌다. 기업은 보안 투자와 투명성을 강화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태로운 구조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규모 피해에도 기업이 짊어지는 비용은 과징금과 제한적 민사소송 정도다. ‘소송 리스크’가 약하니 기업은 보안보다 법무팀을 강화하는 게 더 이익이라는 계산이 작동한다.

2,300만 명의 피해, 960만 원의 과태료

이번 SK텔레콤 사건은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피해자는 2,300만 명이 넘지만, 부과된 과태료는 고작 960만 원이다. 과징금 1,348억 원조차 기업 영업이익에 비하면 부담이 되지 않는다. 피해자 개인이 실제로 받을 보상은 얼마나 될까? 과거 사례를 보면, 피해자는 몇천 원에서 많아야 수만 원 수준의 보상만 기대할 수 있었다.

이는 소비자에게 굴욕감을 안긴다. “내 개인정보 한 건의 가치는 커피 한 잔 값에도 못 미치는가?”라는 물음은 사회적 불신을 확산시킨다. 피해자가 흩어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동안, 기업은 큰 틀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멈춰선 제도 개혁, 정치권의 책임

사실 집단소송제 도입 논의는 오래됐다. 문재인 정부는 정부안을 마련해 추진했으나, 재계 반발로 입법화에 실패했다. 이재명 정부 역시 국정과제에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명시했지만, 국회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소비자 권익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제 입법은 늘 기업 이해관계 앞에서 후퇴한다.

정치권의 미온적 태도는 곧 국민 불신으로 돌아온다. “정부와 국회가 기업 편에 서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사회적 신뢰 기반 자체가 흔들린다. 집단소송제 도입은 단순히 법률 제정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과 기업 사이 권력 균형을 바로잡는 문제다.

해외는 벌금이 아니라 ‘교훈’을 남겼다

구글은 2019년 프랑스에서 GDPR 위반으로 5천만 유로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이후 개인정보 정책을 전면 개편했다. 페이스북(메타)은 미국에서 개인정보 관련 집단소송 합의금으로 7억 2,500만 달러를 지불했다. 기업은 금전적 손실뿐 아니라 사회적 이미지 타격까지 감내해야 했다.

해외 사례가 보여주는 핵심은 ‘기업이 배우도록 만드는 구조’다. 과징금과 집단소송은 단순히 돈을 빼앗는 수단이 아니라, 재발 방지를 강제하는 사회적 압력이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벌금 내고 버티면 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바로 이 차이가 보안 투자와 기업 책임성에서 한국을 뒤처지게 만든다.

피해자가 모여야 바뀐다

SK텔레콤 사태는 2,300만 명 피해자라는 사상 최대 규모를 남겼다. 그러나 제도적 장치가 없으면 이 거대한 피해는 또다시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국민 절반이 당했지만, 목소리는 개인 단위로 쪼개져 힘을 잃는다. 이 구조를 깨뜨리는 길은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뿐이다.

기업이 진정한 책임을 지게 만들고, 소비자가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반복되는 유출 사고를 끊고, 보안산업이 성장할 토양을 마련하는 첫걸음이다. 한국 사회는 이제 더 이상 ‘집단소송 없는 나라’라는 오명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국민 절반의 피해를 방치하는 사회는, 결국 모든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사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