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문화가 만든 ‘코리아 이모션’과 이재명 정부 문화 정책의 시험대
[KtN 임우경기자] K-컬처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현상이 아니다. 정부가 설계한 결과물도 아니고, 특정 산업 전략의 산물도 아니다.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K-컬처의 출발점은 시민 문화에 있다. 오랜 시간 일상의 소비와 선택, 취향의 축적을 통해 형성된 국민의 문화 수준이 지금의 K-컬처를 떠받치고 있다. 문화는 정책보다 먼저 움직였고, 국가는 늘 그 뒤를 따라왔다.
한국 사회에서 문화는 단순한 여가나 장식이 아니었다. 민주화 이후 시민들은 스스로의 감정과 취향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검열과 통제를 거치며 형성된 문화적 긴장은 오히려 콘텐츠의 밀도를 높였다. 음악, 영화, 드라마, 웹툰, 게임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화는 소비자의 눈높이를 기준으로 진화했다. 쉽게 만족하지 않는 관객, 반복 소비에 인색한 시청자, 완성도를 요구하는 독자가 문화의 품질을 끌어올렸다. 이 집단적 선택의 결과가 K-컬처다.
K-컬처의 경쟁력은 기술이나 자본 이전에 감정 구조에 있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 콘텐츠가 갖는 힘은 화려한 외형보다 정서의 밀도에서 나온다. 공감, 연대, 참여가 반복적으로 순환되는 구조는 하나의 문화적 시스템으로 작동해 왔다. 이 시스템을 ‘코리아 이모션’이라 부를 수 있다. 감정을 소비하고, 다시 생산하며, 집단적 경험으로 확장하는 문화 구조다. 이는 어느 한 정부의 성과가 아니라, 시민 사회가 장기간에 걸쳐 축적해 온 결과다.
문제는 국가의 태도였다. 역대 정부의 문화 정책은 이 흐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일부 정부는 문화를 통제의 대상으로 보았고, 일부는 홍보 수단으로 소비했다. 정치적 기준이 개입될 때마다 창작 환경은 위축됐고, 문화 행정은 현장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K-컬처는 성장했지만, 정책은 반복적으로 퇴보했다. 시민 문화가 정책을 끌고 가는 기형적 구조가 이어졌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문화 정책은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올라섰다. 국민주권을 기치로 내건 정부가 문화 영역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다. 그러나 이 질문은 정책의 방향이나 예산 규모에 있지 않다. 핵심은 태도다. K-컬처를 키운 주체가 시민이라는 사실을 정책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가의 문제다.
국민주권 시대의 문화 정책은 기존과 다른 기준을 요구한다. 국가는 문화를 설계하는 주체가 아니라, 시민이 만들어낸 문화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정책의 역할은 방향 제시가 아니다. 이미 형성된 문화적 역량이 훼손되지 않도록 제도와 환경을 정비하는 데 있다. 이 원칙이 흔들리는 순간, 문화 정책은 다시 과거로 회귀한다.
K-컬처의 힘은 중앙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역과 장르, 세대와 플랫폼을 가로지르며 형성됐다. 다양성과 실험, 실패와 축적이 반복되며 만들어진 구조다. 국가가 이 구조에 개입하려 들 때마다 창작의 자유는 줄어들었고, 문화의 밀도는 낮아졌다. 반대로 국가가 한발 물러설 때 문화는 확장됐다. 이 단순한 경험은 이미 여러 차례 반복돼 왔다.
이재명 정부가 마주한 과제는 명확하다. 과거 정부 시기의 문화 정책 퇴보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구호가 아니라, 오래된 교훈에 대한 존중이다. 문화는 국민의 삶에서 출발하고, 정책은 그 삶을 방해하지 않을 때 가장 큰 성과를 낸다. 문화 행정의 역할은 성과를 주장하는 데 있지 않다. 성과가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지키는 데 있다.
특히 주의해야 할 지점은 문화의 산업화 과정이다. K-컬처가 국가 성장 전략으로 편입되면서 문화는 ‘성과’와 ‘수치’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산업화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산업 논리가 문화의 기준을 잠식할 때 발생한다. 단기 성과에 집착하고, 흥행 가능성만을 기준으로 자원을 배분할 경우 문화의 토양은 빠르게 소모된다. 시민 문화가 만든 깊이는 행정 평가표로 환산될 수 없다.
국민주권 시대의 문화 정책은 여기에서 균형을 요구받는다. 시장을 존중하되, 시장에 모든 판단을 맡기지 않는 태도다. 산업을 육성하되, 창작의 자유를 거래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 기준이다. 문화 정책은 이 균형 위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K-컬처는 일시적 유행으로 소진될 위험을 안게 된다.
‘코리아 이모션’이라는 문화적 시스템은 국가가 만들어낼 수 없다. 감정은 설계되지 않는다. 시민의 삶 속에서 축적되고, 경험을 통해 공유되며, 공감의 형태로 확산된다. 국가는 이 시스템을 관리할 수 없다. 다만 파괴하지 않을 책임은 있다. 이것이 국민주권 시대 문화 정책의 최소 조건이다.
이재명 정부의 문화 정책은 결국 한 가지로 평가받게 된다. 시민이 만든 문화를 신뢰했는가, 아니면 다시 관리 대상으로 돌려세웠는가다. K-컬처의 미래는 정책의 문구나 전략 보고서에 달려 있지 않다. 국가가 시민 문화의 수준을 어디까지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문화 강국은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존중과 절제로 유지된다.
국민주권 시대의 서막에서 K-컬처는 이미 준비돼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국가의 선택이다. 시민 문화가 만들어낸 이 축적된 힘을 지켜낼 것인가, 아니면 다시 정책의 이름으로 훼손할 것인가. 그 선택이 한국 문화의 다음 단계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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