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이 사라진 화면, 남은 것은 리듬뿐

WALKING THE 8 디지털 아트, 작가 Michael PARK.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WALKING THE 8 디지털 아트, 작가 Michael PARK.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민정기자] 디지털 아트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누적되고, 되돌아오며, 반복된다. 시작과 끝이 분명했던 전통적 서사의 시간은 디지털 화면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동일한 동작, 유사한 장면, 거의 구분되지 않는 차이가 화면 위에서 끊임없이 이어진다. 디지털 아트가 반복을 핵심 구조로 삼는 이유는 단순하다. 디지털 이미지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반복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회화에서 시간은 암시된다. 한 화면 안에 압축된 순간, 정지된 장면을 통해 앞과 뒤의 시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사진 역시 한순간을 고정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멈춘다. 디지털 아트의 시간은 이와 다르다. 디지털 이미지는 멈추지 않는다. 정지된 화면처럼 보이더라도, 내부에서는 반복과 재생을 전제로 작동한다. 파일은 언제든 다시 열리고, 화면은 동일한 상태로 재현된다. 디지털 이미지에게 시간은 한 번 지나가고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호출되는 상태다.

이 특성은 디지털 아트의 화면 구성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동일한 인물, 동일한 동작, 유사한 장면이 나란히 배열되거나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차이는 미세하다. 옷의 패턴, 배경의 색, 배열의 간격 정도만 달라진다. 그러나 이 작은 차이는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 대신 리듬을 형성한다. 디지털 아트에서 반복은 서사를 대신하는 시간 장치다.

〈WALKING THE 8〉에서 이 구조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화면 속 인물은 걷고 있다. 그러나 어디로 향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반복된다. 같은 자세, 같은 보폭, 거의 동일한 움직임이 화면 안에서 이어진다. 인물은 이동하지만, 화면은 제자리다.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패턴과 색, 배열은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나 그 차이는 방향을 만들지 않는다. 시간은 전진하지 않는다. 순환한다.

이 반복 구조는 디지털 이미지가 시간을 처리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디지털 환경에서 시간은 선형적이지 않다. 재생 버튼을 누르면 언제든 같은 지점으로 돌아갈 수 있고, 동일한 장면은 무한히 반복된다. 디지털 아트는 이 조건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시간의 성격 자체를 드러낸다. 반복은 결핍이 아니라 조건이다.

디지털 아트에서 반복이 중요한 이유는 효율이나 편의성 때문이 아니다. 반복은 구조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동일한 이미지가 반복될수록, 개별 장면의 의미는 약해진다. 대신 전체 배열이 만들어내는 구조가 전면에 드러난다. 관람자는 특정 장면에 머무르지 않는다. 화면 전체를 훑으며 반복의 리듬을 인식하게 된다. 이때 시간은 사건이 아니라 패턴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시간 감각은 컨템포러리 미술의 퍼포먼스나 영상 작업과도 구분된다. 퍼포먼스의 반복은 긴장과 변화를 전제로 한다. 반복될수록 피로가 쌓이고, 몸의 상태가 달라진다. 디지털 아트의 반복은 다르다. 반복될수록 이미지의 상태는 유지된다. 피로는 인물에게 쌓이지 않는다. 관람자의 인식에만 축적된다. 시간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가 된다.

디지털 아트의 반복은 또한 개별성의 약화를 동반한다. 반복되는 이미지 속 인물은 점점 특정성을 잃는다. 이름이나 서사는 필요하지 않다. 동일한 동작이 계속될수록, 인물은 하나의 유형으로 환원된다. 이는 인간을 비인격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디지털 이미지가 대상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화면은 개별 사건보다 패턴을 우선한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 아트는 시간의 방향성을 제거한다. 앞과 뒤의 구분은 희미해지고, 언제 보아도 동일한 상태가 유지된다. 관람자는 어느 지점에서 화면을 접해도 놓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지점에서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반복은 완결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해는 한 번의 감상이 아니라 누적된 노출을 통해 형성된다.

반복은 디지털 아트의 미학이자 윤리다. 한 번 보고 지나가는 이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 보게 되는 이미지, 반복해서 마주치는 화면이 의미를 만든다. 이때 의미는 메시지로 전달되지 않는다. 화면이 유지하는 리듬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디지털 아트는 시간을 설명하지 않는다. 시간을 사용한다.

〈WALKING THE 8〉에서 숫자 ‘8’은 우연이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순환 구조를 암시하는 기호다. 걷는 동작은 멈추지 않고, 화면은 계속해서 같은 리듬을 유지한다. 시작도 없고 결말도 없다. 남는 것은 반복되는 상태뿐이다. 디지털 아트가 다루는 시간의 본질은 바로 이 상태성에 있다.

디지털 아트는 시간을 극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사건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대신 반복을 통해 시간의 구조를 드러낸다.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는지를 보여준다. 변화는 미세하고, 구조는 유지된다. 이 균형 속에서 디지털 이미지의 시간은 작동한다.

디지털 아트에서 시간은 흐름이 아니라 배열이다.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놓여 있는 것이다. 반복은 그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치다. 디지털 아트의 화면에서 시간은 더 이상 서사의 재료가 아니다. 구조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