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 구조 안에 제한적으로 들어온 강한 색의 배치
[KtN 박인경기자]발렌시아가 2027 봄 컬렉션의 기본 색은 어둡다. 검은 롱코트, 블랙 셋업, 블랙 드레스, 블랙 백이 컬렉션의 큰 덩어리를 만든다. 흰 로브형 아우터와 셔츠 트레인, 회색 재킷, 브라운 스웨이드, 데님 블루가 사이를 나누지만 전체 흐름은 무채색과 낮은 채도의 색에 가깝다. 보라색 시스루 드레스, 핫핑크 후드 아우터, 터쿼이즈 백, 파우더 블루 백, 연핑크 미니 백은 이런 어두운 바탕 안에서 더 선명하게 튄다.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Pierpaolo Piccioli)가 디자인한 2027 봄 컬렉션의 제목은 ‘Unsized – A Lightness of Being’이다. 발렌시아가는 몸을 창작의 출발점으로 삼고, 옷을 몸 주변에 놓은 뒤 천과 드레이프로 조정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색도 같은 방식으로 쓰인다. 컬렉션은 밝은 색으로 전체를 덮지 않고, 큰 실루엣의 특정 지점에 색을 넣어 시선을 이동시킨다.
검은색은 가장 안정적인 바탕이다. 롱코트와 드레스, 셋업, 가방에 쓰인 블랙은 몸 주변의 부피를 하나로 묶는다. 실루엣이 클수록 검은색은 외곽선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다만 검은색이 컬렉션 전체를 무겁게 누르지는 않는다. 긴 천의 낙차, 열린 앞섶, 드러난 피부, 금속 장식이 어두운 색의 밀도를 나눈다.
흰색은 블랙과 반대편에서 실루엣을 밝힌다. 흰 로브형 아우터는 몸을 크게 감싸고, 흰 셔츠형 트레인은 청바지 위로 길게 이어진다. 흰 백리스 드레스는 등을 열어두면서도 긴 천으로 착장을 정리한다. 흰색은 순수하거나 낭만적인 분위기를 앞세우기보다, 큰 형태를 더 또렷하게 보이게 하는 색으로 쓰인다.
데님 블루는 컬렉션의 현실감을 붙든다. 물 빠진 데님 셋업, 와이드 데님 팬츠, 셔츠와 함께 놓인 청바지는 검은색과 흰색 사이에서 일상복의 색을 가져온다. 데님 블루는 튀지 않지만, 쿠튀르적 부피를 현실의 옷 쪽으로 당긴다. 화려한 색보다 익숙한 색이 컬렉션의 균형을 만든다.
보라색 시스루 드레스는 컬렉션의 색 흐름을 가장 크게 바꾼다. 얇은 보라색 천은 몸의 윤곽을 드러내고, 긴 소매와 긴 기장은 피부 위에 색의 막을 씌운다. 보라색은 전체 룩을 부드럽게 만들기보다, 투명한 소재와 결합해 노출의 긴장을 키운다. 색이 장식처럼 덧붙기보다 몸과 천 사이의 거리감을 강조한다.
핫핑크 후드 아우터는 기능복의 형태에 강한 색을 넣은 룩이다. 후드와 넉넉한 품은 테크웨어나 스포츠웨어에 가까운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핫핑크는 실용복의 평범함을 바로 끊어낸다. 밝은 색은 컬렉션의 무채색 흐름 속에서 단번에 시선을 끌지만, 전체 착장 수를 압도할 만큼 많지는 않다. 피치올리의 색감은 이 지점에서 제한적으로 개입한다.
백의 색은 의류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인다. 터쿼이즈 백, 파우더 블루 백, 연핑크 미니 백은 옷보다 작은 면적으로 강한 변화를 만든다. 블랙 코트나 데님, 흰 셔츠와 함께 놓이면 가방의 색이 착장의 중심이 된다. 옷이 어둡고 클수록 작은 백의 밝은 색은 더 크게 읽힌다. 발렌시아가는 이번 컬렉션에서 가방을 실루엣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색을 넣는 장치로 활용한다.
초록색 슈즈와 레드 계열 백도 같은 흐름에 놓인다. 컬렉션의 옷은 대체로 차분하지만 액세서리의 색은 더 뚜렷하다. 색은 넓은 옷 전체를 바꾸기보다, 손과 발 주변에 놓이며 시선을 아래나 옆으로 이동시킨다. 큰 옷이 몸의 외곽선을 만들고, 작은 액세서리가 색의 방향을 정한다.
색의 사용이 모두 새롭다고 보기는 어렵다. 블랙과 화이트, 데님을 바탕에 놓고 밝은 색 백과 아우터로 포인트를 만드는 방식은 럭셔리 브랜드에서 익숙한 구성이다. 발렌시아가 2027 봄 컬렉션의 차이는 색보다 실루엣에 있다. 색은 컬렉션을 끌고 가는 주역이라기보다 큰 옷과 긴 천, 부드러운 가방을 읽게 만드는 보조 장치에 가깝다.
피치올리의 색감은 발렌시아가 안에서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발렌시아가의 어두운 부피와 차가운 표면이 중심을 잡고, 보라와 핑크, 블루 계열은 특정 룩에서만 힘을 받는다. 낭만성을 크게 밀어붙이기보다 하우스의 어두운 색 위에 밝은 색을 제한적으로 얹는 방식이다. 이런 절제는 컬렉션의 균형을 만들지만, 동시에 피치올리 특유의 풍부한 색채를 기대한 소비자에게는 다소 조심스러운 접근으로 보일 수 있다.
발렌시아가 2027 봄 컬렉션의 색은 큰 실루엣을 부드럽게 만드는 데 머물지 않는다. 검은색은 부피를 묶고, 흰색은 긴 천의 형태를 드러내며, 데님 블루는 옷을 현실 쪽으로 끌어온다. 보라와 핑크, 터쿼이즈와 파우더 블루는 무채색 흐름을 끊는 위치에 놓인다. 다음 평가는 밝은 색이 룩북의 포인트에 그칠지, 실제 매장에서 가방과 아우터의 판매 색상으로 힘을 받을지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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