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금귀걸이·기와 등 5점으로 관람 동선 구성…런던 ‘더 시티’와 10월 한국 특별전 잇는 K-콘텐츠 확장
[KtN 홍은희기자]런던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 67실 한국국제교류재단 갤러리에 방탄소년단(BTS)의 정규 5집 ‘ARIRANG’을 따라 한국 유물을 살펴보는 관람 동선이 마련됐다. 조선시대 사랑방과 백자 달항아리, 신라 금귀걸이 한 점과 기와 두 점이 약 20분짜리 아트 트레일에 포함됐다. BTS의 무대 의상이나 음반 소품을 별도로 전시하지 않고, 한국관에서 오랫동안 공개해 온 소장품을 앨범의 음악과 주제에 맞춰 다시 배치한 기획이다.
‘BTS THE CITY ARIRANG 한국관 트레일’은 7월 6일부터 23일까지 운영된다. 대영박물관이 오는 10월 개막하는 한국 특별전 ‘Korea’를 앞두고 마련했으며, 전시를 준비한 김상아(Sang-ah Kim) 큐레이터가 유물 다섯 점을 골랐다. 세계 순회공연을 따라 런던에 모인 BTS 팬들을 한국관으로 불러들이고, 대중음악에서 출발한 관심을 한국의 고대 공예와 건축, 조선시대 생활문화까지 넓히는 관람 방식이다.
성덕대왕신종 소리에서 신라 금공예로
앨범 수록곡 ‘No. 29’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가 담겼다. 성덕대왕신종은 대영박물관 소장품이 아니지만, 한국관에는 같은 신라시대의 금귀걸이와 기와가 전시돼 있다. 박물관은 음악에 사용된 종소리를 출발점으로 삼아 당시의 금속공예와 건축 문화를 살펴보도록 관람 순서를 짰다.
5세기 무렵 제작된 금귀걸이에는 가는 금선을 꼬아 붙이는 필리그리(filigree)와 작은 금 알갱이를 표면에 접합하는 누금세공 기술이 사용됐다. 연꽃과 포도 덩굴 문양을 새긴 기와는 신라 수도의 궁궐과 관청, 사찰 지붕을 장식했던 건축 부재다. 건물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지만, 금귀걸이와 기와에는 신라 장인들이 다뤘던 재료와 세공 기술, 당시 건축 장식의 특징이 남아 있다.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를 음원에 사용한 BTS의 선택이 박물관 소장품과 만나는 지점도 여기서 생긴다. ‘아리랑’이라는 제목만으로 한국 문화 전반을 포괄하기보다, 앨범에 실제로 사용된 문화유산의 소리와 같은 시대의 유물을 연결했다. 음악과 유물 사이의 근거가 구체적일수록 유명 가수의 이름만 앞세운 협업이라는 인상도 줄어든다.
조선시대로 들어서면 사랑방과 달항아리가 이어진다. 사랑방은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손님을 맞고 글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던 공간이다. 대영박물관 한국관의 사랑방은 한국 장인들이 2000년 현지에서 전통 건축 방식으로 조성했다. 한국관 개관 때부터 전시돼 온 공간으로, 건축 구조와 가구 배치를 통해 19세기 주거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백자 달항아리는 두 개의 큰 몸체를 따로 빚어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접합 과정에서 생긴 비대칭과 미세한 형태 차이는 달항아리의 특징으로 남았다. 대영박물관 한국관을 대표하는 소장품 가운데 하나로, 신라의 금속공예와 건축 부재에서 조선의 생활공간과 도자기로 이어지는 관람 흐름을 만든다.
신라와 조선에서 제작된 유물들은 시대도 다르고 쓰임도 다르다. 아트 트레일은 서로 다른 유물을 ‘한국적 정서’라는 한 문장으로 묶기보다, 금속·흙·나무로 이어지는 제작 문화와 생활방식의 차이를 차례로 살펴보게 한다. BTS의 앨범은 관람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개별 유물의 역사와 제작 배경은 박물관의 해설을 통해 전달된다.
토트넘 공연에서 대영박물관 67실까지
한국관 트레일은 BTS의 런던 공연에 맞춰 마련된 도시 프로그램 ‘BTS THE CITY ARIRANG–LONDON’과 함께 진행됐다. ‘더 시티’는 7월 6일과 7일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에서 열린 공연을 중심으로 런던 시내 여러 공간에 팬 프로그램을 배치했다. 주영한국문화원과 런던아이, 팝업 매장, 음식 행사, 팬 참여 공간 등이 공연 전후 일정에 포함됐다.
위버스에서 진행된 스탬프 랠리는 행사 장소 여덟 곳을 하나의 이동 경로로 묶었다. 공연장과 팝업 매장, 한국문화원, 런던아이, 한국관광 행사 등을 방문한 이용자가 현장 QR코드를 인식해 디지털 스탬프를 모으는 방식이다. 공연 관람객은 경기장에 머무르지 않고 런던 곳곳을 이동하며 앨범과 관련된 전시·관광·쇼핑·음식 프로그램을 접했다.
K팝의 해외 사업도 음원과 공연 티켓 판매에서 도시 체류형 콘텐츠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 공연이 열리는 며칠 동안 팬들의 숙박과 이동, 식사, 쇼핑, 문화시설 방문을 한 일정 안에 담고, 팬 플랫폼은 지도와 인증, 보상 체계를 제공한다. 런던 프로그램에서 대영박물관은 상품을 판매하거나 공연을 중계하는 장소가 아니라 한국 문화의 역사적 배경을 접하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아트 트레일의 운영 기간은 런던 ‘더 시티’의 공식 일정인 7월 4일부터 10일보다 길다. 공연과 도시 행사가 끝난 뒤에도 한국관 방문이 가능하도록 7월 23일까지 이어진다. 콘서트 기간에 집중된 팬들의 관심을 상설 박물관 관람으로 옮기려는 일정 배치로 읽힌다. 다만 한국관은 7월 13일부터 17일까지 문을 닫을 예정이어서 실제 관람 가능일은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음악·관광·전시·유통을 한 묶음으로 구성하는 방식은 K-콘텐츠가 해외에서 소비되는 범위를 넓힌다. 공연은 일정이 끝나면 철거되지만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은 남는다. 팬들이 BTS를 따라 한국관을 방문한 뒤 달항아리와 신라 금귀걸이의 명칭을 기억하거나, 한국미술 전시를 다시 찾는다면 일회성 공연 수요가 문화기관 관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스탬프와 인증 사진이 관람의 중심이 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사랑방과 달항아리, 신라 유물이 앨범을 설명하는 배경으로만 소비되면 제작 시대와 용도, 문화적 차이는 충분히 전달되기 어렵다. 관람객 수와 온라인 게시물뿐 아니라 유물별 안내 이용량, 체류 시간, 특별전 예매로 이어진 비율 등이 공개돼야 실제 효과를 판단할 수 있다. 현재까지 관련 수치는 공개되지 않았다.
10월 한국 특별전 앞둔 대영박물관
대영박물관 한국국제교류재단 갤러리는 2000년 문을 열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지원으로 조성됐으며 2014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지원을 받아 개편됐다. 서기 300년 무렵부터 현대까지 제작된 도자기와 금속공예, 조각, 회화, 판화, 직물, 나전칠기, 화폐 등을 전시한다.
BTS 협업을 위해 외부 전시품을 새로 들여오거나 별도 전시장을 만든 것은 아니다. 기존 한국관의 소장품 가운데 다섯 점을 고르고, 관람 순서와 디지털 해설을 더했다. 박물관은 새로운 전시를 제작하는 부담을 줄이면서 한국관을 평소 찾지 않던 관람객에게 방문 이유를 제공할 수 있다.
대영박물관은 10월 1일부터 2027년 1월 31일까지 조지프 호퉁 그레이트 코트 갤러리에서 특별전 ‘Korea’를 연다.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현대까지 2000년 이상 이어진 한국의 미술과 제작 문화를 다루는 전시다. 조각과 회화, 공예품 등을 통해 한반도에서 이어진 창작의 흐름을 연대기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7월의 한국관 트레일과 10월 특별전은 규모와 운영 방식이 다르다. 아트 트레일은 무료 상설관에서 기존 전시물을 따라 걷는 짧은 관람 코스다. ‘Korea’는 별도 전시장에서 네 달 동안 열리는 기획전이다. 대영박물관은 여름에는 BTS 팬들을 상설 한국관으로 불러들이고, 가을에는 2000년 한국미술사를 다루는 특별전을 내놓는다.
두 행사의 일정이 석 달 간격으로 배치된 만큼 아트 트레일에는 특별전의 잠재 관람객을 넓히려는 목적도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BTS 팬에게 한국관의 위치와 주요 소장품을 먼저 알리고, 한국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을 전시까지 이어가려는 구성이다. 대영박물관도 홈페이지에서 이번 트레일을 BTS의 새 앨범과 10월 특별전에서 영감을 받은 관람 코스로 소개하고 있다.
세계적인 박물관과 K팝 그룹의 협업은 양쪽의 인지도만 합치는 방식으로는 지속되기 어렵다. 박물관이 유물을 팬 마케팅의 소품처럼 다루거나, 대중음악의 해석을 역사적 사실보다 앞세우면 전시의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 대영박물관은 성덕대왕신종이 소장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로 같은 시대의 신라 유물을 선택했다. 앨범과 유물의 관계를 무리하게 확대하지 않고, 실제로 확인되는 시대적 연관성 안에서 동선을 구성했다.
BTS 음악에서 한국미술 관람으로
BTS는 그동안 한국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그룹으로 해외 공연과 국제행사에 참여해 왔다. 대영박물관 협업에서는 BTS 자체가 전시 대상이 되지 않는다. 팬들이 알고 있는 앨범 제목과 수록곡을 따라 한국관에 들어가고, 사랑방과 달항아리, 신라 금공예와 건축 문화를 만난다.
‘No. 29’에 사용된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는 박물관 협업을 가능하게 만든 구체적인 근거다. 전통 문양이나 한복을 무대 장식으로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유산의 실제 소리를 음반에 넣었다. 대영박물관은 곡에 담긴 소리를 같은 시대의 물질문화로 넓혔다. BTS가 음악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박물관이 유물의 제작 배경과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팬덤의 문화 소비도 이번 협업을 뒷받침한다. BTS 팬들은 음원과 공연뿐 아니라 멤버들이 언급한 책과 작가, 미술관, 문화유산을 찾아왔다. 가수의 관심사를 따라 새로운 문화 분야로 이동하는 소비 방식이 대영박물관 한국관까지 이어졌다. 공연 티켓과 음반 구매에 집중됐던 팬 활동이 박물관 관람과 문화유산 학습으로 넓어질 수 있는 기반이다.
BTS의 이름이 한국 문화 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아리랑과 신라, 달항아리처럼 해외에 비교적 잘 알려진 소재만 반복되면 한국 문화가 몇 개의 익숙한 상징으로 좁아질 수 있다. 지역과 계층, 시대에 따라 달라진 제작 문화와 생활사를 함께 다뤄야 한국미술의 폭도 제대로 전달된다.
대영박물관 한국관 트레일은 7월 23일까지 이어지고, 특별전 ‘Korea’는 10월 1일 개막한다. 공연을 따라 런던에 모인 팬들이 상설 한국관을 다시 찾는지, 여름의 짧은 관람이 가을 특별전 예매로 이어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박물관과 주최 측이 향후 공개할 방문객 수와 디지털 이용 자료가 이번 협업의 지속성을 판단할 근거가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