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자연, 몸의 조형화

“예술은 언제나 경계에 선다.” 이 말은 단지 미학적 수사가 아니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예술은 언제나 경계에 선다.” 이 말은 단지 미학적 수사가 아니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우경기자] 작가 쉬가에프의 작업은 키르기스스탄의 대지로부터 비롯된 신화와 공동체적 기억, 그리고 개인적 체험을 회화와 설치, 바디아트의 형식으로 환기시키는 복합적 창작 행위다. 단순한 민속적 재현을 넘어서, 작가는 신화를 현재화하는 조형적 언어로 새롭게 제시하며, 그 과정에서 ‘몸’은 단지 물리적 대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쉬가에프에게 있어 몸은 신화와 자연, 그리고 장소성이 중첩되는 기호적 장(場)이다. 바디아트, 설치, 회화 등의 장르를 유동적으로 오가며 ‘장르 이전의 감각’을 회복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동시대 예술이 잃어버린 통합성과 신화적 감수성을 되살리는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기억의 장소로서의 예술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환경의 형상화’라고 말한다. 실제로 쉬가에프의 작업실은 하나의 ‘의례적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이곳의 오브제들은 단순한 소품을 넘어 마치 신화적 기억을 매개하는 존재처럼 구성된다.

작가는 전통 유목 텐트(유르트)의 재료로 구성한 ‘마나스의 왕좌’나, 상징적 문양으로 뒤덮인 말의 두개골, 회화의 흔적이 남은 이젤과 사진, 드로잉 등을 통해 ‘살아 있는 공간’ 속에서 예술의 조형언어를 전개한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단순한 예술적 표현을 넘어, 장소성과 기억, 존재의 시간을 교차시키는 공간미학으로 기능한다.

Крик. 1988. Из цикла «Приют». Б., линогравюра. 75х57,5. КНМИИ The Shout. 1988. From cycle «Shelter». Paper, linocut. 75х57,5. KNMFA  [갤러리 A]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Крик. 1988. Из цикла «Приют». Б., линогравюра. 75х57,5. КНМИИ The Shout. 1988. From cycle «Shelter». Paper, linocut. 75х57,5. KNMFA [갤러리 A]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쉬가에프의 조형언어와 동시대성

쉬가에프는 <Shelter>, <Village and City>, <Manas-Tamga>와 같은 연작을 통해 신화와 사회적 풍경, 그리고 인간 존재의 조건을 교차시킨다. 특히 <Shelter> 연작은 병원에서 본 소외된 아동의 현실을 소재로 하여, 단순한 다큐멘터리를 넘은 신화적 고통의 형상화로 읽힌다.

이러한 작업은 오늘날 동시대 바디아트, 퍼포먼스, 사회참여적 미술과도 겹쳐지며, 아날로그적 회화의 언어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증명한다. 작가는 현실의 한 장면을 조형화할 때에도, 일관되게 신화적 구조와 반복 기호, 리드미컬한 색채 구성을 통해 이미지에 감정적 중층성을 부여한다.

신화의 회복은 가능한가

글로벌 아트신(scene)은 점차 다원성과 탈중심성을 강조하며, 비서구권 작가들의 조형언어에 주목하고 있다. 이 가운데 쉬가에프는 민속적 이미지 소비에 머물지 않고, 전통 신화를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드문 작가다.

그의 작업은 회화이자 제의이며, 개인적 기억의 표출이자 공동체 신화의 재맥락화다. 특히 ‘몸’을 회화적 대지로, ‘장소’를 의례적 공간으로 변환시키는 쉬가에프의 시도는 동시대 예술이 기술적 과잉에서 잃어버린 감각—즉, 신화적 지각의 회복이라는 미학적 가능성을 다시 제안한다.

유리스탄벡 쉬가에프는 '무엇을'이 아닌 '어떻게' 말할지를 통해,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구조를 제안한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유리스탄벡 쉬가에프는 '무엇을'이 아닌 '어떻게' 말할지를 통해,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구조를 제안한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억을 그리는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기억

쉬가에프의 예술은 과거를 재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기억을 그리는 예술, 기억 자체가 예술이 되는 순간을 설계한다. 디지털 시대의 정보 기반 미술이 빠르게 추상화되고 탈맥락화되는 지금, 작가의 작업은 ‘잊힌 장소’와 ‘몸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신화는 반복될 때 살아나며, 쉬가에프의 예술은 그 살아있는 반복의 증거이다. 이 시대에 예술이 감당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질문  “우리는 무엇을 잊었는가”에 대한 깊은 응답이 그 안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