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힌 얼굴, 부서진 금속, 수입된 산호… 2,000년 전 브리튼은 무엇을 ‘남기고자’ 묻었는가
[KtN 임민정기자] 영국 북부 요크셔의 작은 마을 멜슨비(Melsonby)에서 발굴된 대규모 철기시대 유물은, 단순한 고고학적 발견을 넘어 고대인이 시각을 통해 권력과 기억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마차 부속, 장식된 말의 장구, 파손된 가마솥, 그리고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금속 장신구들. 이 유물들은 물질을 통해 지위를 드러내고, 의식을 연출하며, 기억을 남기려 했던 흔적들이다.
부서진 가마솥, 고의적 파괴가 말해주는 장례의 방식
가장 눈길을 끄는 유물은 파손된 상태로 뒤집혀 매장된 대형 가마솥이다. 발굴 조사에 따르면, 이 유물은 매장 직전에 무거운 돌에 의해 일부러 깨졌고, 안쪽에는 흙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단순한 폐기물이 아니라 의도된 파괴의 순간이 그대로 보존된 것이다.
고대인이 장례나 제의를 위해 물건을 부순 뒤 땅에 묻는 방식으로 의례의 장면을 구성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파괴된 형태조차도 장엄함을 띠며, ‘없음’을 통해 오히려 강한 존재감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현대 미술에서도 일부러 해체하고 비워내는 방식이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쓰이는 것처럼, 당시에도 파괴는 일종의 언어였을 가능성이 있다.
지중해산 산호와 혼성 장식, 연결된 세계의 증거
이 유물군의 또 다른 특징은 당시 브리튼 북부가 닫힌 사회가 아니었다는 증거를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속 장식 중 일부에는 지중해에서 수입된 산호가 부착돼 있다. 원래는 선명한 붉은색이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며 산화된 청록색 금속 위에 흰색으로 남아 있다.
서로 다른 지역의 재료와 장식이 한 유물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은, 고대 브리튼이 지중해 문화권과 교류하며, 외래 재료를 사용해 신분을 드러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당시의 장식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소속과 위계, 그리고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상징하는 수단이기도 했을 것이다.
얼굴의 전복, 존재를 상징하는 방식
특이하게도 유물 중 일부에는 인간의 얼굴이 새겨진 금속 조각이 포함돼 있는데, 이 얼굴들은 대부분 거꾸로 되어 있거나 비틀린 상태로 발견됐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존재나 권위, 혹은 신적인 상징을 암시했던 조형물일 수 있다.
무덤은 없었지만, 유물의 구성이 장례의 흔적을 암시하는 만큼, 이 얼굴 역시 어떤 존재를 기리는 장치였을 가능성이 있다. 얼굴을 정면이 아니라 전복된 형태로 배치했다는 점에서, 당대의 시각문화가 ‘보이는 방식’ 자체를 다르게 설정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덩어리째 발굴된 ‘블록’, 시간의 조각을 보는 방식
현장에서 ‘블록’이라 불린 금속 유물 덩어리는 무게와 부식의 정도 때문에 통째로 채취되어 CT 촬영을 통해 내부를 관찰하고 있다. 창과 바퀴 부속, 말 장신구들이 엉켜 있으며, 직물로 감싼 흔적까지 남아 있어 고대의 어떤 의도된 묶음 상태가 지금까지 보존된 것이다.
CT 이미지 속 유물은 전면적으로 해체되지 않고, 관찰하는 사람에게 일종의 ‘가상 발굴’ 경험을 제공한다. 이는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 속 가상 전시 방식이나, 비가시적인 것을 시각화하는 현대 예술의 방식과도 닿아 있다.
고대인의 시선은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묻는가
멜슨비 유물군은 고대 브리튼 북부 지역이 단절된 시공간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장식은 지위를 상징했고, 파괴는 하나의 의식이었으며, 재료는 네트워크의 증거였다. 그리고 이 모든 물건은 무덤 없이도 어떤 존재를 말하고, 기억하려는 장치로 기능했다.
오늘날의 시각문화 역시 특정 인물이나 사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여러 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멜슨비의 유물은 묻는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떤 형식으로 남기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시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시 발굴될 수 있을까?
2,000년 전의 시선이 지금의 예술을 향해 던지는 이 질문은, 앞으로 더 자주 되새겨야 할 미술사의 시작점 중 하나다.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