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성과 디지털 신화를 교차시키는 미술적 복원의 언어
[KtN 임민정기자] 현대 회화에서 ‘풍경’은 더 이상 지형적 개념에 머물지 않는다. 미국 작가 로버트 젠더(Robert Zehnder)의 개인전 《Resurrection》은 고전적 풍경화를 디지털의 감각과 내면적 공간으로 치환하며, 회화가 재현하는 현실이 아니라 사유의 구조로 작동하는 심리적 지형도로 작용한다. 역사와 픽션, 물성과 가상성의 경계에서 재구성된 이 세계는, 회화가 여전히 유효한 ‘전복적 상상력의 매체’임을 조용히 증명한다.
풍경은 장소가 아니라 심상이다… 멜팅된 지역주의의 재해석
《Resurrection》의 풍경들은 단번에 미국 지역주의(American Regionalism)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풍경들은 향수를 자극하지 않는다. 오히려 젠더의 붓 아래에서 그 세계는 서서히 녹아내리며, 경계 없는 심상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익숙한 지형과 건축의 형상은 명확한 기원 없이 재조립되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이러한 회화적 접근은 물리적 장소가 아닌 심리적 풍경, 즉 인간 내면의 구조를 시각화하는 실험으로 읽힌다. 젠더의 회화는 고정된 의미 대신 흐릿한 상태(slippage) 속에서 의미의 재구성을 유도하며, 관람자는 작품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의미 만들기'를 수행하게 된다.
디지털 감각과 신화의 접점… 픽셀 대신 붓질로 완성한 가상 세계
《Resurrection》이 주목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디지털적 감각이 회화적 매체를 통해 구현되었다는 점이다. 게임 맵을 연상시키는 서사 구조, 경계 없는 시점, 그리고 구조화된 세계 속 무한한 환영은 회화라는 아날로그 형식 안에 디지털 세계의 패러독스를 끌어들인다.
갤러리 측의 언급처럼, 젠더는 “구조화된 환경 속 환영의 무한성”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표현 방식은 철저히 물성적이다. 디지털 현실이 일견 경계 없는 자유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숨겨진 코드와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회화적 문법으로 환기시키며, 기술 환상에 대한 조용한 비판의식을 동반한 미적 전복을 시도한다.
‘부활’은 복원이 아닌 창조… 회화가 묻는 존재론적 질문
‘Resurrection’이라는 전시 제목은 고전적 종교 서사를 떠오르게 하지만, 젠더가 말하는 부활은 상실된 것을 되찾는 행위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다.
이 전시는 관람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부활은 과거로의 회귀인가, 아니면 미래로의 전이인가? 이는 단지 신화적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고 기억하며, 다시 써내려갈 수 있는지를 묻는 미학적·존재론적 제안이다.
회화의 회복, 현실 재구성을 향한 조용한 전략
젠더의 《Resurrection》은 디지털 이미지가 압도하는 시대에 회화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은밀하고 정제된 전략이다. 작가는 회화의 본질을 물성적 반응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사유의 가능성, 기억의 중첩, 심리의 지형도라는 새로운 문법으로 이동시킨다.
이 전시는 기술 중심 예술이 아닌, 사유 중심 예술의 가능성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젠더의 회화는 더 이상 회복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복원'이 아닌 '재창조'로 어떤 세계를 그려야 하는가를 질문한다. 그것이 오늘날 회화가 여전히 유의미한 이유다.
전시명: Resurrection
작가: Robert Zehnder
장소: C L E A R I N G (New York)
기간: ~ 2025년 4월 12일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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