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위에 선 권력, 판단을 거부한 기관… ‘결정하지 않음’이 만들어낸 체제 위기

 

[KtN 박준식기자] 대한민국 헌정 질서를 구성하는 핵심 축들은 지금 심각한 불일치를 드러내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양상은 헌법기관 간의 공식 결정조차 이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회가 추천한 헌법재판관 임명안이 대통령 권한대행에 의해 거부되고,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집행되지 않는 현실은 단순한 정치적 갈등이 아니라, 민주주의 시스템의 작동 자체에 금이 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쟁점은 더 이상 법적 정당성의 논쟁이 아니다. 핵심은 “누가 법을 지키지 않는가”이며, “그 불이행에 어떤 제도적 책임이 존재하는가”이다.

‘결정 불이행’이라는 시스템 파괴 메커니즘

정치 시스템의 근간은 절차와 이행이다. 국회가 다수결로 결정하고, 헌재가 위헌을 선고하며, 행정부가 이를 이행하는 구조는 삼권분립의 기본 작동 원리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그 기본 명제가 흔들리고 있다.

한덕수 총리는 국회의 임명 동의안을 95일째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헌재의 위헌 결정에도 불구하고 마은혁 후보자 임명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헌법적 의무의 거부로서, 체계 내의 ‘자기 정지’ 현상이다. 민주당은 이를 “헌재 판결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자신에 대한 기각 결정은 수용하는 이중성”이라고 비판하며, 행정부의 헌정질서 파괴 책임을 명시했다.

헌재와 행정부 사이의 상호 무력화

헌법재판소 역시 헌법기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결정 기일 미지정, 심리 지연, 입장 표명 회피는 모두 결과적으로 헌법적 기능의 무력화를 초래하고 있다. 박찬대 원내대표는 “헌법재판소가 지금처럼 침묵을 이어간다면, 신(新) 을사오적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처럼 헌재는 정치적 충돌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독립성과 신뢰를 훼손하고 있으며, 행정부는 헌법기관의 결정을 기각함으로써 법치주의를 훼손하고 있다. 그 사이에서 국회는 결정만 할 뿐, 집행력을 상실한 기구로 남아 있다.

‘윤석열 복귀’라는 기획과 ‘마비된 국가’

김민석 최고위원은 “윤석열 복귀 작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 모든 구조적 무력화가 단일한 정치적 목적에 복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헌재 구성의 고의적 지연 → 재판관 2인 임기 만료 → 대통령 몫 재판관 임명 → 판결 기각”이라는 시나리오를 지적하며, 지금의 시간 끌기 전략이 ‘제2의 계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단순한 정치 공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국가 시스템을 악용한 정략적 설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를 드러낸다. 즉, 체제가 ‘악용될 여지’를 포함하고 있을 때, 그 틈을 막지 않는 것이야말로 체제 붕괴의 전조다.

민주주의의 조건은 '이행'이며, 불이행은 곧 붕괴다

민주주의는 ‘결정’ 그 자체보다 ‘결정의 이행’에 의해 유지된다. 지금 한국 정치의 위기는 절차가 없어서가 아니라, 절차를 무력화시키는 권력의 존재에서 비롯된다. 누구도 헌법 위에 설 수 없다는 원칙이 무너질 때,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은 껍데기로 전락할 수 있다.

헌재의 판단, 국회의 결의, 국민의 요구가 모두 이행되지 않을 때, ‘권력’만이 유일하게 작동하는 시스템이 시작된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부정이자, 통치의 비합법화 신호다. 지금의 결정 불이행 사태는 단순한 직무유기가 아니다. 그것은 체제 내부에서 작동하는 가장 은밀한 방식의 쿠데타일 수 있다.